●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0515c | 장준석展으로 갑니다.
장준석 홈페이지_http://jangjunseok.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예술가의 상상과 함께하는 .(닷)자갈마당의 별(別) 이야기展
기획,주최 / 대구광역시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 Dot Jagalmadang ArtSpace 대구시 중구 북성로3길 68-5 Tel. +82.(0)53.421.0037 www.djdrcf.or.kr blog.naver.com/jagalmadang_art
장준석.자갈마당의 별☆ 이야기 ● '.(닷)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는 오랜 시간 지속되어온 성매매 집결지역(속칭, '자갈마당')의 중심부에서부터 예술을 통한 변화變化를 실험하는 시작점(.)의 상징이며, 또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를 거치며 '성장成長'이라는 지속적인 기대를 받아온 도시가 봉착한 머뭇거림에 대하여 또 다른 '재생再生'을 고안하려는 미술 장치이다. ● 이 곳, 자갈마당은 100년 이상의 삶과 기억이 축적된 공간이다. 1909년 공창으로서 최초 영업을 시작하였고, 해방 이후 6.25전쟁 기간은 연합군의 위안소로, 이후 1960년대부터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던 시기까지 특별 관리구역으로 존재해왔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자갈마당은 인권과 생존, 주거환경 개선, 정치와 경제적 이익 등 복잡한 삶의 문제들이 얽혀있는 상태이며, 최근 자갈마당 폐쇄 발표 이후에는 이 지역 도시재생의 방향이라는 첨예의 숙제宿題를 안고 있다. 우리는 이곳 '자갈마당'을 어떻게 기억하고 변화시켜야할지를 질문하는, 100년의 삶이 담긴 장소의 기억을 깨끗이 지워버리기 전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창조적 기억의 원림園林으로서 '.자갈마당'을 기록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첫 번째 별 이야기, '기억정원 .자갈마당'(2017.10.18 ~ 2018.3.18)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별 이야기, '뮌&이명호.자갈마당'과 '김주연.자갈마당'(2018.4.25 ~ 2018.9.16)에 이은 세 번째 전시, 1층의 '정희욱.자갈마당'과 2층의 '장준석.자갈마당'은 어떻게, 원치 않는 문화적 유산을 미래를 위한 기대감으로 전환시킬 것인가의 문제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여, 특정 장소의 일상을 낯선 지각으로 발견하려는 뜻밖의 개입intervention을 통하여 지역과 도시 전체의 변화를 배양하려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창조적 기억과 상상력에 주목한다. 이는 폐업한 과거 성매매 업소 공간에 예술작업으로 개입하는 물리적인 문제와 복잡한 사회적 이해관계가 얽힌 현실 환경들에 대하여 예술가의 시선이 어떻게 개입하고, 그 장소 특정적 해석 속에서 예술가의 생각과 기억, 신체행위, 그 결과적 흔적이 어떠한 설계로 시각화되느냐의 지점이다. 이렇게 이번 전시는 참여 예술가의 별☆別 이야기와 행위를 기억하는 원림으로서 '.자갈마당'을 그리고 있다. ● 황폐한 땅이나 척박한 도시 어디에나 뿌리를 내리며 점차 주변을 감싸 안고 치유하는 식물 본연의 특별한 능력은 변화와 생명에 관한 자연의 경외로 해석될 수 있고, 이번 .자갈마당의 전시 역시, 그 식물의 능력을 차용한다. 식물을 닮은 예술의 기억들을 채집하고 펼쳐 보이면서, 도시 한가운데에서 숲과 산이 이어진 산맥의 태도를 떠올리는 것, '.자갈마당展'은 거대한 산맥을 도심의 폐쇄된 건물 안으로 그려내면서 이 장소를 다시 창조적으로 기억하고, 결국 우리 본연의 자신을 만나려는 기대를 담아낸다. ● 세 번째 거대한 산맥과 같은 참여 예술가의 상상과 설계의 질문은 이렇다. 첫째, 콘크리트 건물로 둘러싸여 정체된 도시의 중심지역, 이곳이 깊은 숨을 내쉴 수 있는 원림으로서 치유의 예술공간이 될 수 있을까? 둘째, '.자갈마당'이 원시와 현대, 자연과 도시문명, 음과 양이 결속하는 하나의 살아있는 예술적 유기체로서 지속할 수 있을까? 셋째, 탐사하듯 거닐듯, 건물 내부의 공간 곳곳에서 참여 예술가의 태도와 신체행위를 발견하고, 이를 미래의 기억으로 껴안을 수 있을까? 넷째, 변화의 기대로서 '.자갈마당'이 확산되어, 동네주민들이 자율自律하는 식물적 생태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섯째, 결국에는 동네와 지역이 서서히 치유되고 변화, 성장하여, 그 기록과 보존을 공공公共으로 현실화하는 미술 장치로 지지받을 수 있을까? 등이다. ● 꽃, 숲, 볕, 별의 생태를 자세히, 오래 살펴보는 식물성의 태도로서, 이곳 장소의 기억과 치유와 성장을 나누려는 장준석의 설계는 다음과 같다.
'별 없는 밤, 헤는 별'에 관한 장준석의 설계 ● 이런 기억이 있다. "오래전, 작업실을 처음 가졌을 때이다. 당시 친하게 왕래하는 동료들을 초대했는데, 기념으로 화분에 심겨져 있는 꽃을 선물로 받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식물을 꾸준히 잘 보살피고 키우는 재주가 없었기 때문에 꽃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시들어 죽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마음이 무거웠고 꽃과 동료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고민을 하다 프린터로 꽃이라는 글자를 인쇄해서 시들어 버려진 꽃이 있던 자리 창문 쪽에 붙여 놓았다. 색도 칠하고 종이가 구겨질까 신경을 써서 바라보면서 실제 꽃을 가꿀 때 보다 더 아끼고 보살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이는 사실보다 보는 마음이 중요해서인지 꽃이라는 글자가 생화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한글은 상형문자가 아닌 표음문자인데도 불구하고 내 눈 앞에는 글자 속의 꽃 이미지가 드러났다. 이로써 생태적 의미의 꽃은 관념으로서의 꽃이 되었다." 물론, 이 기억은 장준석 작가의 행위에 관한 작가 자신의 말이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 변화를 관찰하며 실재와 관념 사이에서 작용하는 작가의 태도가 어떤 관계 '되기'이며, 이 관계 '되기'의 태도가 매력적인 예술 프로세스로 확신할 수 있었던 계기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차이나는 관계 '되기' 행위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면서 작가만의 '꽃' 작업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 장준석은 '꽃'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플라스틱으로 성형한 작은 입체 '꽃' 글자 조형들을 잔디 위에 흩뿌려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설치하거나, 그 플라스틱 '꽃' 글자 수백 개를 평면 지지체 위에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환상적으로 핀 꽃 형태의 연결 통로 이미지를 그리거나, 금속으로 제작한 크고 작은 크기의 '꽃' 글자 입체조형을 거꾸로 세워서 꽃이 피어나는 상태를 연출하거나, '꽃' 글자 입체조형을 거리 위에 두고 꽃을 키우듯이 물을 주는 퍼포먼스를 하며 사진 기록도 남기는 작업들이 장준석 작가의 대표적인 '꽃' 작업들이다. '꽃'을 설치하여 보살피고 피우는 행위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나무 모양의 '숲' 글자를 빽빽하게 세워 '숲'을 조성하고 그 사이를 거닐거나, '볕' 글자로부터 '볕'의 따스함을 쬐고, '별' 글자로부터 '별'의 빛을 헤아리는 작가의 행위는 실재實在의 직접적인 형상대신 관념성觀念性의 상징처럼 보이는 글자 모양의 기호를 통해, 관습적으로 굳어진 상징과 의미의 체계를 의문시하며 실재와 상징화된 관념 기호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間隙에 주목하고 그 관념 기호를 실제實際처럼 취급하는 관계 '되기'로서, 진정한 실체實體에 접근하려는 마음이고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미적美的 형상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創造 활동을 예술 행위라고 할 때, 그 창조 행위는 기존 혹은 다른 것과의 차이差異로부터 가능하고, 차이는 정체성Identity의 담론에서, 그리고 그 정체성은 다름 아닌 그 사람의 '태도'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태도는 '나는 누구인가?', '나를 이끄는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예술은 무엇인가?', '왜 이 작업을 하는가?', '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등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기검열식의 질문들에 대한 스스로의 해설과 신념의 설계 과정들로 이해된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예술이라는 것이 '태도' 자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준석은 관념을 실제처럼 취급하는 관계 '되기'의 행위로서 자신의 예술적 태도를 '별 없는 밤, 헤는 별'이라는 언어로 표상하고, 이곳 장소의 현재와 미래 정체성에 관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장준석의 관계 '되기'를 발견할 수 있는 .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 2층의 설계는 먼저, 이곳 '자갈마당'에 대한 작가의 첫인상이 담긴 작업, '유리의 방'부터이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방안과 복도 바닥에 'Welcome'이라는 영상 문자가 동시에 써지고 있다. 작가는 관객이 서 있는 복도에서 어둡고 불편해 보이는 방안 내부가 들여다보이도록 투명한 유리벽으로 방의 입구를 막고, 가까이 다가설 수는 있지만 들어갈 수 없는 단절의 구조를 장치하였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를 '환영한다.'라는 메시지가 연신 반복적으로 전달되지만, 관객이 접하는 것은 환영하는 마음으로서의 실체를 떠난, 반사되어 떠도는 가상의 이미지일 뿐이며, 가상과 실재가 뒤섞여있는 현실은 작가가 기억하는 인쇄된 '꽃' 글자와의 행위에서처럼 새로운 관계 '되기'의 상황일 것이다. 작가는 이곳 자갈마당이 도시 한 가운데에 고립된 '유리의 방'이며, 이런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자리를 잡은 .(닷)자갈마당아트스페이스 역시 또 다른 '유리의 방'을 닮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관계 '되기'를 수행하려는 것이다. ● '유리의 방' 우측에는 110x100x6cm 크기의 LED 불빛으로 조형한 '별'이 있다. 자음과 모음 'ㅂ, ㅕ, ㄹ'의 새로운 조합은 북두칠성 별자리처럼 빛나는 별빛의 모양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것은 관념으로서 기호인 '별'이 실제처럼 빛을 비추는 듯이 취급하는 작가의 또 다른 관계 '되기' 행위이다. 무엇인가에 눌리는 무거운 삶과 정체모를 어둠 속에서 밤길을 비추는 한줄기 빛을 헤아리는 마음, 그와 같은 별과의 관계 '되기'를 행하려는 작가는 현란한 네온 불빛 때문에 별을 볼 수 없는 도시의 밤이 슬프지만, 이때의 별은 희미하기에 더욱 신비로우며 호기심을 자아낸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 '별' 글자 조형 기호를 대하면서 별의 실체를 갈망하고 찾으려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더불어, 몇 십 광년의 시간 동안 그리움과 꿈의 기억에 관한 빛을 머금고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별의 감성을 관계 '되기'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와 관념의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별을 헤아리는 작가의 관계 '되기'를 바라보며, 새로운 현실로서의 글자 '별'을 헤아리는 경험을 상상하고 실천하게 된다. '별'의 우측 벽에 설치된 82.4x445cm 크기의 '붉은 밤'은 붉은 색을 배경으로 밤하늘의 별이 쏟아지는 상상을 담아낸 것이다. 별이 없는 밤에 별을 헤아리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작가의 관계 '되기'이다. 그 옆으로 보이는 30x24cm 크기의 '별 없는 밤, 헤는 별: 남연'은 꿈과 그리움을 담아 기원하듯이 별을 헤는 소녀의 얼굴에 내려앉은 별빛을 표현한 사진 작업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한 50.6x40.4cm 크기의 '별 없는 밤 헤는 별'은 도시의 밤을 수놓는 네온의 아름다운 색상 변화를 바탕으로 별을 찾아 헤아리는 작가의 태도를 시각화한 작업이다. 이 작업들은 모두 실제의 별을 대하듯이 '별' 기호를 보듬는 작가의 관계 '되기'이다.
두 개의 작은 방에 설치된 'Fantasiless'는 수행적인 퍼포먼스와 관련되어, 장준석의 관계 '되기'행위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작업일 것이다. Fantasiless' 시리즈는 'Fantasy'와 'Less'를 합성하여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의 환상을 부정하며 진정한 실체의 인지認知를 질문해왔던 작업이다. 첫 번째 방에 전시된 작업은 무채색의 스테인리스 '꽃' 글자 입체조형을 바닥에 놓고, 그 '꽃' 글자에 물을 줄 때 사용하는 퍼포먼스용 물 조리개를 함께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한쪽 벽에는 이곳 .(닷)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를 비롯해서 특정 장소에서 꽃 입체조형에 물을 주는 퍼포먼스 기록 사진들을 선보인다. 꽃 덩어리와 꽃에 물을 주는 퍼포먼스는 꽃이 피고 지는 생명의 순환이라는 실체적 생태를 은유하며, 그 관념 기호를 실제처럼 취급하는 관계 '되기'의 대표적인 작업이다. 두 번째 방에는 작가의 관계 '되기'를 확장하여 관객의 관계 '되기'를 권유하는 작업이 선보인다. 테이블 위에 인조 잔디가 깔려있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문자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다. 이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상징으로서 인간의 환상과 욕망이 관념화된 우리 마음속의 또 다른 꽃밭일지 모른다. 작가는 .(닷)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를 방문하는 관객들에게 "꽃을 꺾어가세요.", "꽃을 가져가세요."라며 테이블 위의 꽃을 직접 가져가라고 비디오 영상으로 지시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념 속에 자리 잡은 각자의 관념화된 꽃을 아끼고 보살피는 관계 '되기' 행위가 또 다른 이야기로 발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또 다른 방에 설치된 '꽃길을 걷다, 꽃을 밟다.' 작업도 관객에게 관계 '되기'를 권유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길이가 긴 방의 바닥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수천 개의 '꽃' 글자 블록을 이어 붙여 길을 만들고, "과거, 자신의 가장 꽃다운 시절을 떠올리며 걸어보세요."라고 말한다. 관객은 맨발의 살갗에 전해지는 미묘한 자극과 함께 화려한 색채의 꽃길을 만끽하는 상상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웠던 기억과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작가는 "당신이 밟고 있는 것은 꽃입니다."라고 말한다. 작가는 관객이 바닥에 설치되어있는 '꽃'을 밟고 지나가며, 그 순간을 아무런 저항 없이 무기력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사회가 형성되면서 만들어지는 규율이나 법칙은 전체를 위해 존재하며, 종종 개인의 삶은 소외되어 공공이라는 틀에 갇힌다. "길을 걸었다. 무심코 스친 우리의 발에 가냘픈 어느 식물이 꺾이고 밟힌다."라며, 작가는 플라스틱으로 된 가상의 꽃밭을 실제처럼 취급하는 관계 '되기'를 통하여 두 가지 극단적인 해석의 경험을 유도하고, 어떻게 변화할지 모를 이곳 자갈마당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긴 복도 끝에 설치된 94x101cm 크기의 '볕'은 관계 '되기'의 또 다른 작업이다. .(닷)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 2층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안과 밖을 직·간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매개체이다. 작가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볕'이라는 문자를 창문에 설치하여 자연광이 투과되도록 설정하였다. 빛이 내리쬐는 내부엔 관객이 '볕' 글자를 바라보고 있고, 관객이 응시하는 스테인드글라스 '볕'은 '볕'을 응시하는 관객의 얼굴을 또 다른 타자처럼 비추고 있다. 작가는 어둠을 밝혀주고 우리를 따뜻한 기운으로 감싸주는 '볕'과의 관계 '되기'를 행위하고 있는 것이다. '볕'의 오른쪽 방에는 360x110x134.5cm 크기의 '244번 텃밭'이 설치되어있다. 작가는 이번 겨울을 잘 지낼 수 있을까싶을 정도로 난방이 자유롭지 못한 이곳에 작은 실내비닐하우스 정원을 가꾸면서, 고희가 넘은 작가의 어머니가 일구던 도시텃밭에 관한 관계 '되기'를 행하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아파트단지 근처의 비어있는 국유지 서너 평을 임대받아 도시텃밭을 일구는 작가의 어머니는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는 용감한 전사처럼 화려한 꽃무늬 옷 유니폼을 입고 한손엔 꽃삽이나 호미를 들고 비장하게 텃밭을 가꾸셨다고 한다. 삭막한 콘크리트 건축물 사이의 도시 텃밭이 작가의 어머니에게는 마음을 달랠 수 있었던 관계 '되기'의 쉼터였을 것이다. 작가는 .(닷)자갈마당의 아트스페이스를 통하여 바라만 보았던 어머니의 244번 텃밭과 관계 '되기'를 수행한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따뜻한 온기와 관심으로 모진 바람과 병충해로부터 244번 텃밭의 작물들을 보살피고 가꾸었듯이, 이곳 실내정원에서 관념의 상징을 실제처럼 취급하는 관계 '되기'로서 진정한 실체에 접근하려는 행위를 한다. '별 없는 밤'이란, 본질은 존재하지만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음에 관한 의미이고, '헤는 별'은 본질을 추구하는 작가의 행위를 말한다. 기억이나 상상, 생각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기호로 그리는 시각화, 그것처럼 예술은 관념을 실제처럼 다루는 일이 아닐까? 장준석은 관념을 시각화하고 그것을 실재인 것처럼 취급하는 행위를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실체의 본질을 가늠하고 헤아리는 관계 '되기' 행위를 통하여, '사랑'을 가꾸고 '희망'을 꿈꾸려는 과정일 것이다. 작가는 이곳 자갈마당을 대하는 우리들 인간의 태도에서, 관념을 실제처럼 취급하는 인간 행위를 떠올리게 되고, 이러한 인간 행위의 상징을 '별 없는 밤, 헤는 별'로 언어화하며, 그것과 관계 '되기'를 행하는 것이다. 장준석이 제안하는 미술의 사회적 역할로서 공공미술은 관념을 실제처럼 취급하는 관계 '되기'의 태도로서 신체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치유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변화와 성장의 시작이며, 자신이 감지한 치유의 힘을 드러내는 과정으로서 의식儀式 이다. 장준석의 '별 없는 밤, 헤는 별'에서 행위와 그 치유의 성장 에너지는 이곳의 공공을 위한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 지난 시대의 삶을 기억하고 창조적으로 공유하려는 이 전시는 우리 자신의 내재적인 반성과 성찰을 근간으로 스스로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기대를 상정하고 있다. ■ 정종구
장준석, 별 없는 밤, 헤는 별 ● 1 ● 이번 전시의 범상치 않은 장소적 맥락 때문이었을까, 작가 작업 역시도 무언가 남다른 느낌들로 다가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형적인 오브제들의 시각효과들만이 아닌 세상, 타자를 향한 작가의 각별한 배려, 태도, 관계, 마음 같은 것들이 유독 긴 여운들로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변화의 느낌들이 단순히 이번 전시가 드리운 특별한 공간, 장소적 상황에 맞춘 어떤 결과만은 아닌 듯 하고 이미 작가의 작업 자체가 혹은 그 바탕에 이미 이런 요소들, 징후들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번 전시의 자갈마당이라는 모순적이고 이질적인 공간, 장소적 상황이 작가의 이런 점들을 자연스럽게 더욱 증폭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지 않았나 싶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한, 그리고 금기와 위반, 역설로 가득한 자갈마당의 모순적인 장소성은 물론 작가 작업의 본연의 ('역설적인') 의미들을 새삼, 반추하게 한다는 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 전작들이 갖고 있는 강한 시각적이고 의미론적인 조형성 이미지들로 인해 그동안 작가 작업들은 이에 따르는 일정한 해석들과 함께 해야 했다. 이를테면, 시각적 오브제 중심의 기호학적 의미들, 차갑고 정제된 미니멀 한 조형성을 전후로 한 것들 말이다. 물론 이런 읽기들이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작가 작업을 단순히 기호, 이미지의 논리학으로 풀어내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마음에 묘한 여운을 남겼던 것들이 단지 인공, 기계적으로 성형, 복제된 글자의 조형성만은 아닐 것이다. 차가운 기호학적 의미들로는 온전히 읽혀지지 않은 것들, 이를테면 우리의 삶의 경험, 기억들과 연관된 솔직하고 따뜻한 감성과 태도들, 세상을 향한 모순적이고 다층적인 사유들이 은연중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이 작가가 그동안 꾸준히 펼쳐왔지만 상대적으로 덜한 주목을 받았던, 수행적인 퍼포먼스 작업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미디어, 설치를 포함하여 오브제 작업 이외의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스스로의 작업을 변주, 심화, 확장시켜온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익히 알려진 '꽃', '볕', '숲', '별' 작업들조차 그저 대상화된 오브제만이 아니라 이들 다층적인 의미들을 둘러싼 작가의 모순적이고 복잡한 태도, 관계들을 응축한다. 예를 들어 작가의 주요 작업이라 할 수 있는 '꽃' 작업만 해도 아름다운 꽃의 조형성만이 아닌, 꽃이라는 (모순적인) 의미가 함축하고 있는 세상의 다양한 관계, 태도들을 함축시켜왔기에 작가에게 있어 꽃은 단순히 아름다운 조형성에 대한 시각적 관조의 대상만이 아닌 개인적인 기억들과 연관된 독특한 경험을 갖고 있는 것들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의미 맥락을 심화, 확장될 수 있는 다층적인 의미의 산물로 자리한다. 작가의 의미심장한 작품명이자 조어인 'Fantasiless'처럼, 우리에게 꽃은 그저 우리를 매혹하게 하는 아름다운 환상(Fantasy)만이 아닌(Less) 것이다. 긍정인 동시에 부정인 그렇게 극단의 것들이 서로 이질적으로 공존한다. 이러한 면모는 검은 꽃 시리즈에서도 볼 수 있는데, 화려한 욕망의 상징으로서의 꽃만이 아닌 그 반대의 극에 자리하는 죽음, 부정의 개념 또한 동시에 내포한다. 이는 작가가 사회적 현실의 다양한 층위로 확장하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의 매개체로 꽃(글자 개념)을 전유했기 때문인 듯싶다.
그렇게 작가는 그동안 꾸준히 지속해온 퍼포먼스처럼 한낱 사물에 불과한 꽃 조형물을 소중히 여기고 정성껏 돌보는 행위를 통해 그 꽃이 자리하는 공간의 희망을 드리우기도 하고('Fantasiless Ⅰ'), 비록 살아있는 것이 아닌 인공적인 오브제임도 불구하고 이를 현실의 꽃을 대하듯 심고 꺾고, 보듬고, 가져가게 하는 다양한 행위, 관계들을 품게 하거나('Fantasiless Ⅱ'), 관객들의 참여 행위, 촉각 등의 신체적 감각작용을 유도하여 우리의 마음속 아름다운 기억을 상기시키는 미디어이자 동시에 이 아름다운 기억들조차 알게 모르게 짓밟아야하는 모순적인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 대상들로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꽃길을 걷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들은 꽃이 가진 다양한 의미의 망들 못지않게 꽃이라는 이들 다층적인 의미가 갖고 있는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면모들이다. 피고 질 수 밖에 없는 꽃은 그런 면에서 생의 가장 화려한 순간을 함축하고 있지만 동시에 영원한 죽음을 내재하는 서로 다른 극단의 의미들이 맞물려 있다. 작가 역시도 꽃이 가지고 있는 이런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의미의 가변적인 동학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그동안 그 모습을 달리하며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 심화, 확장된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오지 않았나 싶다. ● 그 바탕이 되는 일말의 단서들을 우리는 작가가 이들 꽃 작업을 처음 하게 된 사뭇 의미심장한 계기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친구가 사온 화분의 꽃을 시들게 한 것이 미안하여 화분이 있던 창에 꽃 글자를 프린트하여 붙여놓고 이를 아끼고 보살폈던 기억들, 그렇게 작가의 마음속에서 현실의 꽃보다 더 소중한 의미로 자라난 꽃 글자의 이미지들도 그렇고, 예전 허름한 꽃가게에 피처럼 흘러내리는 붉은 페인트로 써진 버내큘러한 꽃 글자의 공포감과 미지의 알 수 없는 느낌들도 처음 작가의 관심을 끌었던 꽃(글자)에 대한 인상들이 남다르고, 묘한 의미의 여운을 남기는 것들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기억과 행위, 이미지와 태도, 개념과 정성, 보살핌, 현실과 환상, 실재와 관념, 아름다움과 금기, 위반 같은 서로 다른 모순적인 의미들이 맞물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의미들로 인해 작가의 작업 역시도 단순한 조형적 의미로만 환원되지 않은 다층적인 의미들을 내밀하게 품을 수 있었던 것이고, 이들 모순적인 의미들을 둘러싼 다양한 행위, 관계들을 애초부터 함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꽃 작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볕', '숲', '별'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펼쳐진다. 글자(오브제)에 단순 대당되는 기호학적 의미를 넘어 모순적이면서도 다층적인 작가의 세상에 대한 전언들, 태도, 관계, 소망을 매개하는 살아있는 관념들로 심화,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죽어있는 오브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것들처럼 작가의 세상과 타자들에 대한 어떤 희망을, 휴식과 치유의 온기들마저 불어넣으면서 말이다. 기계적으로 반복된 인공적인 조형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상들과 호흡하듯 숱한 관계들을 겹치면서, 때로는 이들을 매개로 한 다양한 수행적인 태도들과 정성어린 마음들을 더하면서 작가의 세상을 향한 어떤 발언들을 드리웠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가의 입장들은 단선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모순적이고 다의적인, 그렇게 좀처럼 알 수 없는 세상의 근원들, 미지의 것들로 확장되면서 꽃이 피고 지듯, 숲이 자라듯, 명멸하는 별들이 무한, 유한하게 반짝이듯 작가 작업 역시 넓고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 ● 작업을 둘러싼 이런 저간의 사연들, 이유들로 인해 여러 가지 면에서 이번 전시는 작가 작업의 간단치 않은 의미, 맥락들과 은근한 궁합을 이루지 않았나 싶다. 물론 작가 역시도 이번 전시의 다층적이고 모순적인 공간, 장소성에 대한 쉽지 않은 여러 현실적인 고민들을 더하면서 그간의 작가 작업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고 펼쳐내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의 나의 작업은 '꽃'이나 '숲'이라는 문자를 인공의 재료와 패턴으로 역설적으로 표현하며 생성과 소멸, 사회와 개인의 관계, 규제와 자율의 문제를 우리 삶의 생태적 의미로 확장했었는데, 이 공간에 스며있는 다층적인 문제들과 맞닿는 지점이 있었다.(작가 발언 중에서)" ● 전시의 공간적 바탕인 자갈마당 아트 스페이스는 도심 한 복판 속의 섬처럼 남다른 사연들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이면이라 할 수 있는 욕망과 금기, 위반의 공간이자, 우리의 근대화의 다양한 켜들이 적층된 장소로 이러한 뒤틀린 역사의 기억들로 지금, 여기 우리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하는 공간이다. 숱한 호기심과 두려움의 시선이 교차하는 이질적이고 중층적인 장소로 계속적인 변모로 망각과 기억을 되풀이하면서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모순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는 면에서 그간의 작가 작업과의 일정한 연동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장소였을 것이다. ● 작가 역시도 신중한 시선과 접근들을 드리운다. 대상화된 세상의 타자들로 이들 공간의 맥락들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감 있는 고민들을 통해 오히려 스스로(의 작업들)를 되묻고, 근대, 동시대를 관통하면서 도심 속의 폐허처럼 척박한 이들 공간, 장소의 맥락에 작가로서 그리고 그렇게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스스로의 작업들로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의미들을 조심스럽게 덧붙이려 한 것이다. 설령 그것이 현실적인 파급, 효과를 가지는 것이 아닐지라도 작가로서의 할 수 있는, 작지만 의미심장한 본연의 역할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꽃으로, 볕으로, 숲으로, 별로 모순적인 세상에 대한 나름의 전언들을 담아온 작가였기에 이들 공간, 장소성과 연동된 작가의 이러한 면모들이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특히나 작가 특유의 응시의 시선, 반성적인 접근들이 주목을 요한다. 글자 작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상, 오브제를 향한 단순하고 일방적인 시선의 투시만이 아니라 그러한 시선들을 통해 지금, 여기의 우리의 존재, 맥락들을 역으로 되묻고 사유하게 하여, 이들 상호간의 다양한 관계의 망들을 드러내려 하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대상화되고 재현된 이미지 작업이 아니라 이들 상호 교차된 관계 속에 담겨진 어떤 태도, 마음, 지향 같은 것들을 은연중에 담아내려 했고, 이들 장소적 맥락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일체의 언급들을 조심스럽게 피하지 않았나 싶다.
3 ● 이러한 작가의 심경, 면모들을 잘 보여주는 작업이 '유리방'이다. 이번 전시의 공간, 장소성에 대한 작가의 신중한 접근, 태도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볼 수 있는 사물, 대상에 대한 작가의 복합적인 관계들을 생각하게 한다. 이 작업은 유리벽으로 단절된 현실적인 거리감, 간극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어긋난 욕망들로 마주하는 묘한 관계들, 보여 지지만 보여 지지 않아야 하는 대상들을 보면서 역으로 그 대상을 바라보는 스스로를 응시하게 되는, 복합적인 시선의 관계들을 드러낸다. 환히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지만 결국은 텅 비어 있는 공간 속에 비쳐진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고 안팎을 교차하며 서로 엇갈린 마음들을 담은 'Welcome' 글자만이 깜박거리면서 대상과의 긴장감 있는 심리적인 느낌들, 태도들을 함축한다. 적어도 이들 대상 공간의 맥락, 대상에 대한 (자칫 실수할 수도 있는) 일방적이고 타자화 된 시선이 아니라 서로 교차하는 응시의 시선으로 모호하고 애매할 지라도 다중적인 주체들, 그 복합적인 관계들을 담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게 생각해봐야 할 점이다. 어쩌면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의 관계들은 비단 이 작업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작가 작업에서 꾸준히 지속되어온 면모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모순적인) 응시의 논리는 이번 전시의 장소적 맥락과 연관하여 새롭게 시도된 작업인 '볕'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하지만 좀 더 다른 결들을 더한다. 여러 빛깔의 스테인드글라스의 모자이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인 화려함만은 아니다. 반 투과된 빛의 움직임의 응시 속에서 대상 밖 타자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자리하는 우리 스스로를 비추게 되고 서로를 관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볕이라는 글자의 의미처럼 따뜻한 기운으로 이들 대칭적인 관계들을 온화하게 감싸게 된다. 서로 극단에 자리하는 모순적인 것들의 시각적인 공존뿐만 아니라 이를 서로 응시하면서 다시 엮어내는 상호 관계들, 그리고 이들 관계에서 자리하는 태도, 심리, 마음 같은 것들마저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기호적인 의미의 작용만이 아니라 상호 간에 정서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동의 동학이라 할 만한 것들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 작업은 이렇듯 (삶의 어떤 계기, 흐름들도 있었겠지만) 단순한 의미의 논리학에서 발전하여 대상과의 복합적인 관계들, 대상에 대한 작가의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태도들마저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그저 인공적 조형물에 불과한 글자 작업들이 작가의 마음은 물론 세상에 대한 어떤 소망들마저 담아낼 수 있는, 살아있는 것들로 전화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전술한 것처럼 작가는 글자 작업의 첫 출발부터 이러한 맹아들은 가지고 있었다. 다만, 싹으로 자라나 더욱 무성한 꽃으로 개화되고 있는 중이고, 이번 전시의 특별한 장소성이 작가의 이러한 면모를 적절하게 발아될 수 있도록 했던 것 같다. ● 이를 재차, 그리고 좀 더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이 '244번 텃밭'이다. 이전 작업들에서 이미 가상적인 기호의 의미들과 실재 현실간의 상호 교차, 관계들이 얽혀있었지만 이번 작업은 보다 직접적인 현실로 향한다. 자갈마당이라는 장소성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배려도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도심 속 텃밭을 정성껏 가꾸시는 어머니의 세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 돌봄, 애정으로 빚어진 온기처럼 작가 역시도 모순적인 의미들로 착종된 금단의 땅에 작은 비닐하우스 정원을 만들어 직접 식물들을 가꾸는 퍼포먼스를 수행함으로써 솔직한 작가의 마음을 더한다. 시기적으로 겨울을 나고 봄을 맞이할 때까지 이들 실천들이 지속되는 것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작업으로 수행된 것들이기에 단지 관심어린 애정만을 덧붙였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머니라는 저 너른 마음처럼 이 시대의 척박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두를 향한 전언들로 의미들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꽃무늬 옷과 삽, 호미로 무장한 어머니는 작가의 꽃 작업들이 단조로운 기호적인 조형성과 의미의 차원만이 아닌 복잡다단한 현실 속을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보다 나은 삶으로 전화시키려는 희망의 논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금 상기 시킨다. 무미한 회색빛 도심 속에서도 화려한 소망들로 개화하는 꽃들처럼 작가는 스스로의 작업이 함의하고 있는 세상을 향한 작가의 이러한 마음의 동학들을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고 이번 전시에서 이를 직접적인 현실과 연관하여 더 분명한 어조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이러한 면모들은 계열화 된 퍼포먼스 연작들로 지속, 확장되고 있는 이번 전시의 'Fantasiless I'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회색 빛 꽃 덩어리 글자에 물을 주는 퍼포먼스는 그런 면에서 현실의 지고 피어나는 생명의 순환처럼 세상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마음, 태도들을 드러낸다. ● 하지만 작가의 세상에 대한 이러한 바람은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244번 텃밭' 작업도 분명 세상을 향한 작가의 온정, 각별한 마음들을 드러내고 있지만 정육점 불빛처럼 묘한 뉘앙스를 자아내는 인공의 LED 불빛 이미지로 인해 다시금 모순된 현실을 상기시키고 있고, '꽃길을 걷다, 꽃을 밟다' 작업도 작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상황이 그렇게 녹녹치 않음을 보여준다. 꽃길을 걷는다는 것은 마음 속 기억, 혹은 미래의 희망의 전언들을 담을 수도 있지만 본의 아니게 이를 짓밟아야 하는 양의적인 의미 또한 내포하기 때문이다. 자갈마당이라는 이번 전시의 장소성자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서로 어긋난 관계들이 기묘하게 맞물려 있는 역설의 공간들이고, 작가 역시 이러한 모순된 현실을 인지하고 이를 향한 각별한 배려의 시선, 마음을 담아내려 하지만 어쩌면 이 조차도 압도하는 어긋난 현실의 맥락 또한 이에 못지않은 크고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울 테니 말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작가가 이러한 서로 다른 모순된 의미들을 모두 인정하고 있고 이들 양자의 긴장감 있는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의 작업들이 그런 것처럼 모순적인 의미의 논리들과 결부되어 있는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감각들, 태도와 관계들, 그리고 이를 매개로 확장되는 현실성이 읽혀졌던 이유도 이런 점에 있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작가의 글자 작업들이 다시 살아있는 현실들로 기묘하게 거듭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동명의 작품)인, '별 없는 밤, 헤는 별'도 작가의 이러한 면모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희망 없는 현실 속에서 이를 다시 헤아리며 감싸 안으려 하는, 세상을 향한 작가의 감각적 사유와 몸짓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상호 교차된 관계의 시선들, 모순적인 현실을 가로지른 것은 볕이고 빛이었다. 별 또한 이러한 의미의 망을 공유하면서 더 근원적인 것들로 향한다. 도심 속 가녀린 빛으로 명멸하는 별들의 존재는 미지의 무한함을 향한 동경인 동시에 호기심이고 그리움이며 희망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별이 없는 밤은 인공의 논리로 드리운 모순적인 현실 자체이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별을 헤아린 다는 것은 이러한 어둑하기만 한 현실을 가로지르는 어떤 희망을 품고, 전한다는 것일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 모두들 조곤조곤 담아낸다. 별빛마저 감추게 하는 화려한 도시의 네온들이 전하는 서글픈 현실과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오롯이 자리하는 별들의 존재가 전하는 어떤 희망 모두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듯이 이들 별(빛)들은 먼 과거의 시공 속에 이미 존재했었던 것들이며 시공의 긴 간극들조차 가로지르는 것들이다. 한없이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이내 마음속 소중한 존재들로 전화되면서 다시 머나먼 미래를 향한 희망으로 거듭나는, 그렇게 무한, 유한을 관통하고 순환하여 지금 여기를 비추고 있는 존재들인 셈인데 이러한 가로지름과 순환의 논리를 이를 닮은 글자의 조형성으로 풀어낸 점이 인상적이다. 사실 이러한 면모들은 이전 꽃 글자 작업인 'Landscape-Scale' 연작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작가의 심중에는 이렇게 유한, 무한을 반복하는 순환을 통해 생성으로 거듭나는 생각들을 은연중에 품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글자 작업의 첫 계기가 되었던 비밀의 화원 느낌도 비슷한 맥락에서 풀이된다. 허름한 꽃가게에 핏 자국처럼 마주한 꽃 글자를 보며 그 느낌 의미 너머의 미지의 세계를 연상했던 것처럼 작가 작업의 기저 혹은 그 이면에는 이처럼 단순한 의미의 논리, 조형적 감각들로 환원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무한함에 대한 어떤 동경들이 가로놓여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모순적이고 다층적인 현실의 의미, 관계의 동학을 담으려 하고, 여기에 작가의 세상을 향한 어떤 전언과 태도를 펼쳐내면서, 그리고 다시 이마저도 넘어 무한한 미지의 세상을 향하려 하는 어떤 지향성들마저 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낱 인공의 조형적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업이 이러한 다층적인 의미의 겹들을 접고 펼치면서 마치 살아있는 것들처럼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문득, 작업들 모두가 꽃이고 볕이며 숲이고 별일 수 있다는 생각이 지속되는 여운처럼 길게 드리우는 것만 같다. 작가의 세상을 향한 희망들, 그 건강하고 온기어린 마음이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민병직
Vol.20181031i | 장준석展 / JANGJUNSEOK / 張峻奭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