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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욱 홈페이지_www.choiyoungwook.com
초대일시 / 2018_1025_목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주말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소울아트스페이스 SOUL ART SPACE 부산시 해운대구 해운대 해변로 30 Tel. +82.(0)51.731.5878 www.soulartspace.com blog.naver.com/soulartspace
최영욱의 '빙렬의 미학'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조선백자를 '겸허의 미덕에 대한 최상의 오마주'라고 극찬하기 훨씬 전에, 한국의 예술가들은 그 가치를 이미 알고 있었다. 상허(尙虛) 이태준은 일찍이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수집 또는 소장 대상에 그치지 말고 현대적 해석을 통해 '고완(古翫)'의 생활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와 교유하였던 수화 김환기는 '내 항아리 취미는 아편중독에 지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로 열광적이었는데 그의 성북동 스튜디오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조선 백자로 가득했다고 한다. 김환기는 도자기를 자신의 조형의 원천으로 삼았고 그것을 근간으로 한국미를 구현하는 데 앞장섰다.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종래에 '백자대호'로 부르는 것을 '달항아리'로 기술하여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렸다. 이와 함께 일군의 화가들, 즉 김환기를 비롯하여 손응성, 김인승 등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항아리의 매력을 화폭에 실어냈다. 보름달처럼 흰 바탕에다 둥근 형태를 지닌 항아리는 한국 화가들에게 꾸준히 '구애'를 받아온 셈이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조선백자의 사랑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최영욱도 바로 그런 작가 중에 한명이다. 최영욱의 화폭에는 달항아리만이 등장할 뿐인데 이것은 마치 과거 초상화에서 인물이 등장하듯이 정물이 그만큼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로 읽힌다. 그릇에 불과한 정물을 인간의 모습을 닮은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물처럼 촘촘하게 패인 흔적을 인간의 관계로 해석하는 시각이 흥미롭다. ● 그가 달항아리에 눈을 뜬 것은 우연히 박물관에서 항아리를 만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작가는 도자기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작업에 일대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무늬나 색깔도 없는, 정답고 소박한 도자기의 자태를 보면서 그는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 "도자기는 내 삶의 기억들의 이미지이고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달항아리를 그리는 작가로 안다. 하지만 나는 달항아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은 내 얘기를 하고 있다. 도자기의 선은 빙렬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길이다. 갈라지면서 이어지듯 만났다 헤어지고 비슷한 듯하며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하나로 아우러진다."
사람들은 그를 보통 '달항아리를 그리는 화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은 내 얘기를 하고 있다'. 달항아리는 선량하고 소박하며 좀처럼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미덕을 지닌다. 기교와 허식을 일체 버리고 자연스런 곡선과 리듬감, 어지간한 것은 모두 감싸 안는 포용력, 잡다한 것에 연연하지 않는 초연함이 달항아리가 지닌 특성이다. 시인 서정주가 「기도」에서 항아리에 빗대어 비우면서 충만해진 달항아리를 닮고 싶은 심정을 피력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런 시각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텐데 최영욱은 달항아리처럼 아무 욕심도 품지 않고, 평정심과 넉넉함을 잃지 않는 성정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 같다. ● 항아리 그림 표면에는 잔금이 무수히 그어져 있다. 최영욱은 이것을 '빙렬(氷裂)'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그림을 해독하는 실마리가 된다. '빙렬'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생긴 것이지만 실제로는 삶 자체 또는 우리네 인생살이와 결부되어 있다. 모든 항아리는 균열이 가지 않은 곳이 없으며 다시 말하면 빙렬이 그의 작품에 있어선 매우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결국 내가 표현한 이미지는 내 삶의 기억, 내 삶의 이야기들이다. 나는 내 그림 속에 내 삶의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달항아리 위에 '빙렬'을 그으면서 오랜 세월 만났다 헤어지고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는 우리의 인생길을 나타냈다.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그 관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그가 '카르마'라는 타이틀을 사용하는 배경이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시작되어 최종적으로 관계 속에서 끝나는 존재로 운명 지어졌는지도 모른다. 관계의 역사가 우리 자신을 만들고 기억과 추억을 만들며 자아를 형성한다. ● 여기에 '빙렬의 의미'가 놓여 있다. '빙렬'이 주는 분위기는 마냥 순조롭거나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이 평탄치 않고 어떤 난관에 봉착해 있거나 그것을 극복한 그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곧 시련을 통과중이거나 그것을 함축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삶의 그늘을 숨김없이 화면에 노출한다. 우리는 성공과 행복을 꿈꾸지만 우리의 나날이 늘 행복하거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매번 시련과 역경으로 얼룩지어있다. 좌절과 패배, 실의의 연속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예술이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공감을 낳고 이해력을 높인다. 그런데 그의 작품을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어둠의 부분을 방치해두지 않는다. 그런 난관과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삶이 위치해 있는 곳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전체(항아리)이다. 즉 달항아리를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는 것으로 여기고,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은 심경을 담아낸 것이다. ● 그러나 그의 작품을 단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작품의 성격을 제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달항아리이고, 기본적으로 이 이미지는 푸근하고 넉넉한 감정과 직결되어 있다. "달항아리와 조용히 만나본 적이 있는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많은 것을 품고 있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지만 극도로 세련된 그 피조물을 보고 있노라면 그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내가 되어 버렸다." 작가에게 달항아리는 가닿고 싶은 곳, 곧 그가 동경하는 세계의 한 자락으로 다가온 것 같다. 작가는 항아리에서 보금자리를 찾은 듯한 안온함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첨단적인 것에 열광하는 현대작가들에게 달항아리란 그다지 참신한 모티브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달항아리를 소재로 삼은 것은 그만의 확신 때문이리라. 이것은 달항아리 속에서 삶의 궤적을 읽고, 그것을 삶의 표현기제로 인식함으로써 가능해졌다고 본다. '빙렬'의 흔적은 삶속에 자리한 '질곡과 애환, 웃음과 울음, 그리고 결국에 그런 것들마저 다 아우르는 어떤 기운'을 연상시키는데 온갖 감정의 교차와 경험들로 직조되는 삶과 삶의 관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이런 발견은 통상적인 것은 아니며, 최영욱에 의해 해석이 한층 풍부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 끝으로 이태준과 김환기, 최순우가 경탄해 마지않았던 항아리가 최영욱에 와서 재조명되고 그것의 현대적 의미를 부각시킨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그의 달항아리 작품은 고전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더 이상 빛바랜 골동품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생활 가까이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서성록
Vol.20181028d | 최영욱展 / CHOIYOUNGWOOK / 崔永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