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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912_수요일_06:00pm
송은 아트큐브는 젊고 유능한 작가들의 전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재)송은문화재단에서 설립한 비영리 전시공간입니다.
주최 / 재단법인 송은문화재단
관람시간 / 09:00am~06:30pm / 일,공휴일 휴관
송은 아트큐브 SongEun ArtCube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 421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0)2.3448.0100 www.songeunartspace.org
쇠퇴와 구원 사이에서 ● 미술사가 그려왔던 유구한 궤적을 다시 되돌아보자. 그 기원과 약속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으므로 예술이 처음에 주술이었고 유희였으며 모방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말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할 것이다. 대신 이미지가 다시 부흥의 순간을 맞이했던 16세기의 어느 시기, 그러니까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예술가들을 위한 위대한 연대기를 써내려간 시점부터 미술사는 순수한 계보를 그리는 배제의 내러티브를 작동시켜왔다. "좋은 것에서 더 좋은 것, 그리고 최고로 좋은 것"을 향한 이 기나긴 여정에서 빈켈만(John J. Winchelmann)은 오직 그리스 소년 상을 끝없이 찬미했으며, 리글(Alois Riegl)과 뵈플린(Heinrich Woeflin)은 이질적인 것들이 틈입할 수 없는 순수 시각형식으로서 '양식'이 보편적 범주로 수렴되리라 믿었고,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는 지향(intentio)의 특수성을 담지한 물질화된 정신들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이를 아이코놀로지(iconology)로 성문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색채를 강조한 일련의 미적 판단으로부터 매체의 특권적 속성으로 이어지는 '그린버그 에피소드'가 불순한 것들로부터 미술사를 수호하는 가장 견고한 서사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미술사는 무한한 이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나 입구가 될 수 없다. 차라리 그것은 언제나 이미지와 경합해 왔으며 오직 이미지를 통제하고 제약함으로써만 스스로를 보존해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가장 탁월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들이 서로를 참조하고 때로는 극복하면서 아방가르드의 이념을 계승하는 빛나는 역사 뒤편에 수많은 이미지의 잔해들이 흩어진 황량한 풍경을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조각이, 그다음에는 회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술의 특정성을 지지하던 거대 서사가 내부로부터 무너졌을 때, 미술사가는 그의 눈에 비친 대상이 예술과 사물 사이에서 더 이상 지각적인 차원으로는 식별되지 않으며 유효한 비평의 전거들마저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미적인 것의 인식 불가능성, 역사서술의 파산, 그리고 이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모더니즘 미술(사)의 죽음이 선언된 것이다.
죽음과 종말에 관한 몇 가지 가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죽음이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을 예비하고 있으므로 이후 새롭게 출현한 체계 안으로 아직 이름이 없는 것들이 의미와 해석을 통해 흘러들어와 끝없이 확장하는 광활한 영토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와 관습, 담론으로 구성된 '예술계(art world)'를 최종심급으로 상정하는 이 가설은 여전히 권력의 역학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심과 함께 경계 없는 투명성이 종국에 예술 자체를 무화시키리라는 불안을 내재하고 있다. 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예술의 영역 밖에서 발흥한 새로운 매체의 출현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로부터 혹은 다게르(Louis-Jacques Mand Daguerre)에게서 태어난 사진이 미술과 조응하고 또한 반목하면서 빚어낸 이질적인 서사와 관련된다. 렌즈 기반의 예술(Lens based art)에서 가장 앞에 놓인 사진은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는 최초의 장르이자 수공에서 이미지를 해방시킨 계기이며 명징한 지표성(Index)으로 현실과 가상을 이중-매개하면서 미술사의 순혈주의를 문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최초의 사진은 불분명하고 흐릿하며 마치 여명의 순간을 포착한 듯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이것이 새로운 매체의 분기를 알리는 역사적 형상인지, 시간공포증(chronophobia)에서 우리를 지켜 줄 원시적인 토템인지, 아니면 단지 기술적 성취의 표상이거나 19세기 풍경의 파편인지는 알 수 없다. 대신 백랍에 역청을 섞은 감광판이 장노출(long exposure)에 그을리면서 만들어낸 창밖의 풍광에는 건물 지붕, 탑, 배나무, 비둘기 집만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진이 원본성과 아우라, 저자성과 같은 순수 예술의 유산들을 와해시키고 전통적인 형식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복수의 특수성(differential specificity)으로 분투하면서 종국에 미술사의 일부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최초의 사진에 담긴 대상들은 광학적 예술을 위한 첫 번째 피사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하찮은, 차라리 등가교환의 순환 속에서 이미 가치를 소진한 사물들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들이다. 어쩌면 원래부터 사진은 전시가치나 교환가치에서 탈각되어 이제는 희미해진 존재들을 잊지 않겠다는 소명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스러져 가는 구식의 사물들이 빛나는 강줄기를 이루며 이미지의 세계로 유입되는 다성의 미술사를 사진은 최초의 순간부터 열망해 왔던 것은 아닌가.
오랫동안 회화를 욕망해왔고 리얼리즘의 적자였으며 20세기 미술을 보존하는 기억의 대리자로서 공고했던 사진은 이제 최초의 피사체들처럼 쇠락해가는 매체가 되었다. 디지털로의 전환 이후 사진의 위상이 얼마나 급진적으로 해체되었는지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초의 사진들은 여전히 인화되고 있다. 사물의 운명과 관계 맺으며 그 마술적 가치를 드러내는 사진들이 구성과 배치를 조율하고 조형성을 실험하면서, 수행성이라는 확장된 차원과 접속하면서, 그리고 미술사로 들어서는 사물들을 빛의 형상으로 주조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는 사진을 과거의 매체로 확증하지 않으면서 그 지난 시간들을 회고적으로 소환하고 동시에 나아갈 미래를 개방하는 예언적 차원을 예비하고 있기도 하다. 최초의 사진들로부터 해방된 이미지의 세계로 이행하는 찬란한 노정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오직 쇠퇴에 순간에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작은 환희로 안착하게 될 것이다. ■ 이양헌
이번 전시의 키워드는 예술과 생산의 경계, 그리고 창작의 유희이다. 지난 작업 「Art School Project」를 진행하면서, 그리고 이후 다른 작업들을 지속하면서 창작의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것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년간 나는 그것이 가진 의미, 가치, (비)선택, 효율의 정도를 매기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가치를 잃은 무엇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면 그거 그것이 되는가를 고민해왔다. ● 즉 이번 작업은 창작, 또는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창작과 생산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기록하고, 그곳에서의 나의 창작을 시도하기로 한다. 산업현장에서의 생산물과 그곳에서 반응하는 나의 생산물, 이 과정을 통해 예술과 산업의 구분과 경계를 고민하는 동시에 동시에 창작 과정에서의 유희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 이번 전시는 만드는 것, 혹은 창작과 생산의 경계에 대해 고민을 보이는 자리이다. 전시되는 이미지는 국내 모든 제조업이 모여있는 을지로 일대 특히 대림상가와 세운청계상가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이미지의 대상들은 창작물이기도 하고, 창작자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때론 창작물처럼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보여주기의 방식에서 다시 한번 창작된다.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되는 이미지들을 변형되는 창작의 순환을 경험토록 하고자 한다. ■ 박희자
Vol.20180916e | 박희자展 / BAHCHEEZA / 朴喜子 / photography.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