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8_0912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식_김현철_김형석_박순철_서용인 신하순_이은경_이정태_윤주_전성규 지원진_하태형_한상진_허진
후원 / (주)아트레온 주최 / 아트레온 문화예술부 기획 / 아트레온 갤러리 충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아트레온 갤러리 Artreon Gallery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 129 (창천동 20-25번지) 아트레온 B1, B2 Tel. +82.(0)2.364.8900 www.artreon.co.kr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지식을 소피아(Shopia)와 프로네시스(Phronesis)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소피아가 이론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프로네시스는 실천적 지식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네시스란 '진실을 포착하는 결정적인 마음의 습관(hexis)'이며 또한 '선한 것을 목표로 적절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의 사유는 그 생각의 지평을 넘어 무엇이 진실이며, 내 사유의 기착지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해 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석 최규명 선생은 프로네시스를 끊임없이 추구한 작가였다. 그가 남긴 전각 작품 450여과와 750여 점의 서예작품에는 평생에 걸친 학문적 연구를 통한 사유와 그것을 자신의 인성과 삶에서 구현해 내고자 한 성찰이 오롯이 담겨있다. 금번 기획전은 이러한 우석 선생의 정신을 기리며 신촌의 문화 허브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목표로 개관한 아트레온 갤러리 충의 개관기획전으로 준비되었다. 1부에서는 서예와 전각의 세계와 접목될 수 있는 동시대 한국 현대미술 화가, 13인을 초대하여 '선의 기세' (5.28~7.21) 전을 선보였고, 이번 2부에서는 전통회화의 특징인 사유와 성찰로서의 회화를 현대미술에서 구현해 내는 화가 14인의 작품을 선보인다. ● 오래전 극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은 독특한 문화양식을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 하나로써 그림은 재현 너머의 정신세계를 표출하는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고, 시서화의 삼절은 지식인 또는 지배계층의 수양 덕목으로 인식되며 한자문화권의 독특한 문화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기술이나 장식으로서의 회화를 넘어 인격 수양의 도구로 인식하게 된 화(畵)는 학자들에 의해 회화 담론으로 서술되기도 하였다. 그림과 시를 하나로 인식하는 사고가 팽배해지며 그림에 대한 소감, 동기, 이유와 더불어 평가가 회화 속에 함께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회화의 사회적 역할을 명료하게 인지하고 있었으며 회화를 인격 성장의 발판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회화의 다양한 방법론 가운데 전통회화의 특징인 '사유와 성찰의 회화(Pronesis)'를 구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보았다. 현대미술을 표방하며 작가정신과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우석 선생의 정신성의 고양과 웅혼한 기량을 기리고 전통회화의 정신을 추구하는 현대미술의 동향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최호준
인간과 자연의 매개체가 언어라면 그 언어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즉 자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언어의 상징체계로 유입되면서, 언어의 질서 체계 안에서 규정 분배되는 의미가 그 사물의 중심에 각인된다. 한번 언어적 질서에 편입되고 나면, 사물은 돌이킬 수 없는 경계선을 넘는 것과 같다. 자연적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사물은 오로지 언어적 질서가 허락하는 상징적 의미 속에 그 의미의 담지자로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헤겔은 '언어는 사물의 살해자'라고 말한다. 인간과 자연의 존재론적 차이는 언어가 없는 자연은 의미 없는 존재의 세계이며, 언어가 존재하는 인간의 세계는 존재 없는 의미의 세계이다. 이 존재론적 차이는 언어의 안과 밖의 이항대립이 생성하거나, 소멸하기 위해서 먼저 있어야 하는 차이이다. 그 차이는 언어구조 안의 사태가 아니라 언어 구조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접경적 사태이다. 이 접경적 사태는 언어구조 안에서 성립하는 안과 밖의 대립보다 선행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생성과 소멸의 힘이 작동하는 과격한 투쟁의 관계이며, 존재론적 개방성의 기조이기도 하다. 작품의 이미지는 언어구조의 경계인 접경 사태에서 일어나는 언어와 자연의 과격한 관계의 존재성에 대한 표현을 하고자 하였다. ■ 김식
김현철 김현철의 그림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청명하다. 진경의 세계를 오랜 시간 탐구하고 상대해온 작가의 붓으로 구현되는 풍경은 격조 있는 정신성의 향유를 가능하게 한다. 섬과 바다의 풍경을 한 땀 한 땀 재현하거나 표현하려 하지 않는 그의 그림들은 시야가 끝없이 옆으로 확장된다. 그림 속에서 과감하게 그은 수평선은 단순하다. 그러나 깊고 넓은 자연의 독자성을 드러내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김현철의 화면에 올라온 자연은 그 자체로 '전체'다. 파편이 아닌 전체의 이미지로 하나의 시공간을 경험하기 위해, 김현철은 여백과 집중을 적절히 선택한다. 홀연히 비어진 화면과 색을 입은 사각형의 면은 군더더기 없이 구성된 획들의 집합체다. 작가의 그림이 꼿꼿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동양화가 김현철의 화업에 깃든 매우 중요한 감각이다. 오늘날 어떤 대상을 천천히 오래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 '본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 사이에 있는 수많은 오해와 잡념들을 덜어내고, 금릉 김현철이 바라보는 풍경은 실제 시공간을 곱씹어 보고 천착하여 하나의 독자적인 시공간으로 평면 위에 올라붙은 점선면의 유영(游泳)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시원하게 치는 그리기의 유영은 옛 그림에 대한 철저한 공부에서 기인한 것이다. 동양화에 관한 오랜 연구와 이 땅에서 구축된 '보는 방식'에 대한 작가의 끈질긴 탐구심에서 오는 동양회화의 탐구라는 것을 관람자는 알게 된다. ■ 현시원
고대의 사람들은 무생물에도 생명과 의미를 부여하고 세계와 조화로운 관계를 맺었는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물화(物化) 하는 사회에 살며 살아 있는 것까지 사물로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제 모습을 감추어버리고 '타자'로 남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예술은 어떤 사유와 표현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는 의미의 작업이다. ■ 김형석
인간의 욕망은 쓸고 쓸어도 솟아난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으로 욕망을 규제하거나 스스로 절제하지만, 삶을 영위하는 내내 성찰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 박순철
표면연구; 감각물질 ● 나의 작업은 '표면'에 대한 사유와 그것을 회화를 통해 표현하는 것으로 미술사적 의미에서 미디어 설치예술과 추상표현주의의 미적인 관점과 연결되어있다. 미디어 설치예술과 추상표현주의의 미적인 관심은 모더니즘의 매체 특정성의 평면성(재현의 원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벗어나 비재현적 영역을 탐구하는 것과 탈 중심적이고 우발적으로 작동하는 힘의 운동과 그러한 차이의 배경(내재면, 잠재된 영역)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표면'은 비재현적인 순수한 차이가 시각화되는 꼭짓점들로 이러한 꼭짓점들이 상호 작동하는 사건의 계열이다. 비재현적인 순수한 차이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인이 필요하며 그것은 반복과 감각(힘의 운동짓 차이) 그리고 관점(주시하는 대상)이다. 이 세 가지 요인은 동시적으로 작동하여 표면이라는 사건의 계열을 이룬다. 반복은 차이와 맞물려 서로가 서로의 원인으로 작동되며 감각이라는 힘의 운동을 발생시킨다. 관점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표면의 틈 속에서 작동하며 그러한 시선의 개입은 운동의 성질이라는 감각적 차이, 즉 사건의 계열화를 이루는 작용체가 된다. 또한 이러한 관점의 개입은 표면이 고정되지 않는 성질, 즉 잠재적 의미를 갖게 한다. 작업의 구체적 접근과 실행은 이러한 '표면'에 대한 해석을 기반하여 구체화된다. 화면은 표면이 형성되는 과정을 일관되게 이행한다. 일차적으로 반복과 차이가 원인으로 발생시키는 감각의 힘과 그 차이가 화면에 탈 중심적으로 드러난다. 이차적으로 이 형상은 평평하게 조정된다. 이때 색은 탈 중심적 의미를 두드러지게 한다. 삼차에 형상은 외부적 시선에 노출되며 유동적 성질의 내재성을 갖게 된다. 결과적으로 작업은 감각적 층위라는 잠재된 불확정의 물질로 회유하게 된다. ■ 서용인
"그림을 그리면서 생활의 리듬을 찾고, 호흡을 이어주는 생명의 연장과도 같은 유희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오늘 하루, 그림일기, 기억의 수평, 기억의 유람기, 기억의 유희… 하루에 대한 기록으로서 오늘을 그린다는 것, 나의 주변 환경과 가족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그것을 화면에 기록한다. 하루의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은 이제 매우 자연스러운 일과가 되었다. 하루 중에는 많은 일이 전개된다. 그중에서 선택을 한다. 무엇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을까 ? 의미가 없는 작은 화분, 아이들에게 버려진 장난감들, 새롭게 전개되는 일상들, 수많은 표정과 감성의 오묘한 의미들, 작은 어항에서 노니는 노란 물고기, 눈에 비친 모든 것들은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순간이다. 모니터에서 보는 새로운 정보, 항상 엄청난 사건과 새로운 소식을 접하는 나날 속에서도 우리는 선택 되어진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쉽게 잊지 않고 일상을 살아간다. 보이는 세상의 작은 일들이 선택되어 진다. 기억의 공간에서 새롭고 정겨운 의미로… 회화적 의미로… 창의적 모색의 장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그것은 단순한 한 개인의 현실을 살아가는 작은 이야기로 보여지게 될 것이다. ■ 신하순
울산 대왕암공원과 강원도 고성에서 드로잉 한 소나무들을 모티브로 재구성하고 근경에 소나무 수피의 붉은색, 솔잎의 초록색을 좌우로, 원경으로는 수직의 소나무를 배치하여 표현하였다. ■ 이은경
영화 '문라이트'에서 흑인 후안은 말한다. "달빛 아래서는 모두 푸른색으로 보인다," 달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공평하다. 고유색이 배제되었을 때 어떤 편견과 선입견도 사라진다. 모든 살아 있는 것과 사물, 자연은 오직 푸른색채 하나로 보인다. 시간은 존재의 영원성을 부정하며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흐름은 유기체적 작동 원리이자 특성이다. 흐름이 멈출 때 부패하거나 탈 유기화해서 존재는 멈추게 된다. 존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음을 말한다. 존재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흐름이자 형성적이며 다른 것과 접속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으로 규정되어가는 것이다. 존재는 무수한 변화를 내재화하고 있다. 존재는 시간의 흐름과 리듬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흐르는 시간의 정지된 한순간을 포착하여 시간에 대한 은유를 생성한다. ■ 이정태
견고하게 짜인 하얀 사각형의 캔버스 대신 하늘하늘거리며 언제라도 형태가 변할 수 있는 천(布)이 있다. 매끈한 캔버스 면과 달리 완벽한 회화 행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천은 그 속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정교한 선이나 묘사보다는 그 위에 떨어지는 재료의 물성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다. 작가는 거기에 물성을 한결 더 강조하여 색실을 올리거나 다른 물질들을 붙여가며 회화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어떤 경우는 다른 형태와 성질을 가진 천을 덧대어 바느질을 해서 화면 위에 또 다른 레이어 또는 그 이상의 복수의 레이어들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천이 갖는 속성을 더욱 살려 화면에 주름이 잡히게 하거나 어느 한쪽 면을 들어 올려 공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작업에 있어 공간과 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높아지며 평면으로서의 회화적 속성은 점점 줄어든다. 공간 안에서 사각이라는 또 하나의 공간에 갇히지 않고 잘하면 회화는 비정형적으로 증식을 할 수도 설치의 특성을 가질 수도 있다. 그래도 작가는 절대로 회화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단지, 회화의 서사(敍事)가 존재하는 공간과 환경에 그리고 그 관계성에 주목할 뿐이다. ■ 윤주
생명성을 상징하는 심장의 이미지와 이를 둘러싼 비가시적 환경으로서의 옷의 이미지가 가능태와 현실태 사이에서 존재성을 획득해 나가는 과정을 시각화하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시공을 초월한 물질과 비물질 입자들이 파동적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는 수렴과 발산을 하는 생명현상을 담고자 하였다. ■ 전성규
한 번 그음은 모든 시작의 근원이다. 안과 밖으로 나뉘고 위아래가 결정되며, 질서를 이룬다. 그림과 글씨가 나뉘기 이전의 선험적 형상이며, 구상과 추상의 너머에 홀로 존재하고 있다.한 번 그음은 가능성을 내포한 의미의 함축으로 만물의 움직임이며 존재 이전의 본질이다.한 번 그음과 씨앗 그리고 풀로 대변되는 생명은 모두 하나이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공간이 물질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공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삶도 여백으로 온전해 진다. ■ 지원진
예술은 이중성, 즉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초개인적, 자연에 가까우면서 멀리 벗어나 있고, 친사회적이면서 반사회적이고, 유익하면서 무익한 것으로 항상 상반된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두 얼굴을 지닌 덕택으로 예술의 자율성이 그 존재를 인정받기도 한다. ■ 하태형
본인의 작품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언어는 실재를 온전히 재현하지 못하며 재현 불가능한 나머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삶 속에 흔적으로 남아서 현재의 나를 교란시키고 흔들어 놓는 것은 기억이며 상처입니다. 나의 그림 속에 흐르는 풍경들은 그러한 흔적과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에 대한 애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한상진
이번 작품은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시리즈'라고 부르는 작품 연작 중의 하나이다. 2011년 초에 새로 모색한 이 작품은 유전자 조작 및 가공, 유전자 재조합기술, 생명복제, 세포융합 등의 유전공학 기술과 생명공학 기술이 자연 생태계의 오묘한 균형을 교란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다. 서로 다른 동물을 합체하여 탄생된 기이한 이종융합동물을 묘사하여 이러한 생물학적 오염과 생태적 재앙을 부각하고 지속 가능한 생태사회를 지향하고자 했다. 최근에 일어났던 일본 동북 대지진으로 파괴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건은 핵 발전 논쟁을 재점화하여 과학에의 지나친 맹신이 팽배해 있는 상황을 다시 한 번 경고하게 되었다. 일부 과학자들에게 인류를 파멸할 권리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과학 윤리의식이 스스로 마비될 수 있는 경향을 보인다면 끔찍한 일인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평등하게 공존할 공동체를 상징할 대상을 섬으로 표현하였다. 섬은 어린 시절에 각인되었던 다도해 풍경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이나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아틀란티스 같은 유토피아로 상상하였다. ■ 허진
Vol.20180913f | Phronesis - 사유, 성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