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모스 Marcel Moth

홍기성展 / HONGKISUNG / 洪起盛 / mixed media   2018_0912 ▶ 2018_0918

홍기성_Im not ready_혼합재료_15×13×9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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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91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최근 결과물에 관한 진술을 위해서는 시간을 거슬러 2016년을 다시 바라 볼 여유가 필요하다. 버몬트 살던 늙은 사내는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고, 인간과 AI는 10의 171제곱 경우의 수를 놓고 마주 앉았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진 싱거운 싸움이라는 점에서 나 역시도 다를 것은 없었다. 당시 나는 몇 사람들과 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인간의 원초적 입장과 허위의식 그리고 그에 따른 가치-목적 합리성에 대해 고민하고 선물이란 매개체를 통해 일상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행동양식을 창작으로 옮기는 중에 있었다. 그 중 꽃을 선물하는 실험은 인간개인의 태도를 결정짓는데 축척된 지식과 경험, 감정 등이 주요이유라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선물했던 꽃들은 맨 처음 약속대로 상자에 담겨 하나 둘씩 작업실로 돌아왔고 색과 향은 모두 사라져 초라한 모습이었다. 마치 눈이 멀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상자만 기다리던 나처럼 말이다.

홍기성_7 Mile House_캔버스에 플라워 애쉬, 대리석 파우더, 천연 피그먼트_100×100cm_2017
홍기성_3 Mile House_캔버스에 플라워 애쉬, 대리석 파우더_100×140cm_2017

그 뒤로 한 동안 집과 작업실보다 어린 시절 동네 뒷산을 찾아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인적이 드물어 걷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져도,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러도 상관없었다. 그러다 이제는 얼굴도 희미해져 기억나지 않는 옛 동무들과 자주 간 곳에 오르면 나무 밑 바위에 걸터앉아 나무그림자의 아른거림과 함께 졸음을 즐기거나 바위를 어루만지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작업실로 걸음을 옮긴 날이었다. 시뻘겋게 녹이 슨 자물쇠를 달래며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에 주인은 이제 내가 아니었다. 벽과 천정은 물론 꽃이 담긴 상자까지 그 어느 곳에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방과 애벌레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땅거미 질 무렵까지 나방들의 바쁜 날갯짓을 감상하고 그 길로 나와 다음날 또 다시 숲속 나무그늘과 바위로 향했다.

홍기성_4 Mile House_캔버스에 플라워 애쉬, 대리석 파우더_140×180cm_2017
홍기성_6 Mile House_캔버스에 플라워 애쉬, 대리석 파우더_60×120cm_2017

이와 같은 나의 태도를 놓고 무기력한 체념과 도피의식으로 얼룩져 있다며 성자의 목소리를 빌려 문자를 뽐내기 위해 사람들은 떼를 지어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모두 공허한 소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꽃잎과 나방처럼 정해진 시간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사회-경제적 변수를 차단하여 영속성을 곳곳에 부여하는 집단 망각상태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처럼 모순된 현실에서 단지 나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자연의 불규칙성에 경의를 표하고 권위와 경쟁에 매몰된 사회구조의 결과로 우리에게 타자화되어 상실한 자연의 부름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또한 뜻하지 않게 찾아온 작은 비극에서 흩어져 있던 자아의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그들의 성자를 자처한 짖음에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이었다. "당신은 나비와 나방을 구별 할 수 있나요?"

홍기성_10 Mile House_대리석에 플라워 애쉬_21×21×21cm_2018
홍기성_11 Mile House_대리석에 플라워 애쉬_23×23×25cm_2018
홍기성_15 Mile House_대리석에 플라워 애쉬_30×25×8cm_2018

첫 서리가 내릴 때쯤 나방들이 궁금하여 작업실을 찾았다. 하지만 차가운 바람 탓인지 나방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고 서늘한 기운 속 내 뽀얀 입김만이 피어올랐다. 작업실을 둘러보며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시간을 쓸어 담던 중 이제는 멋진 날갯짓을 다하고 편안하게 잠든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모습이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작은 손길, 숨소리에도 쉽사리 가루가 되어버리는 것도 있었다. 그들과 그들이 먹다 남긴 꽃잎을 날이 새도록 모아놓고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그의 이름을 따 마르셀 모스(Marcel Moth)라 불렀다. 그 뒤로 마르셀 모스는 내가 가본 적이 없는 미지의 삼도내를 향해 다시 날갯짓을 시작했고, 나는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이듬해 찾아 올 마르셀 모스를 기다리고 있다. "나비의 화려한색과 우아한 몸짓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방의 초라한 색과 방정맞은 몸짓이 존재해야 합니다. 마치 하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둘이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뿐만 아니에요. 안타깝게도 우리의 택사노미에서도 그 둘을 구별하지 않고 있어요. 단지 편이를 위해 구별해왔고 그것을 사실이라 믿어왔던 것이죠."

홍기성_17 Mile House_대리석에 플라워 애쉬_47×47×9cm_2018
홍기성_Astronaut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8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 찾아오는 예기치 못한 경험과 기억은 실존의 밑바탕이 되며 때에 따라 이념적 본질에 저장되어 작동되곤 한다. 어느 누군가는 이러한 구성요소를 절망, 고통, 극복, 저항, 치유 등 세상이 원하는 방식대로 묘사할지 모르나, 이는 15살 소년에 외침으로 귀결되기 일쑤다. 그렇기에 우리를 언제 어디든 따라 다니며 상념으로 안내하는 삶에서 자아를 마주하고 여백을 마련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만일 이 고단한 여정을 거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죽음이라는 분기점에 도착하는 것뿐인데, 나방의 귀용과 날개돋이 그리고 죽음에 비추어 볼 때 자연의 불규칙성 앞에서 모든 실재는 의존과 연속 그리고 상대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점에서 죽음은 영혼의 영역이 아닌 여전히 현실의 문제로 남게 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사건들에서 나의 뇌 속 시냅스 구조와 신호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면 지금 이 글조차 작성 될 필요가 사라진다. 뿐만 아니라 나는 숲속 바위가 아닌 살충제를 구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인간은 매일 반복되는 선택의 순간을 단순작용으로 판단 할 것이 아니라 에픽테토스윤리학의 영역까지 확장 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알코올램프 위에서 연소를 마친 나방과 꽃잎은 하나의 물질이 되어 본래 이름은 상실하게 되지만 기억의 공간으로 이동하여 연속성을 마련한다. 다시 말해 재는 칼륨-탄소 단순화합물이지만 동시에 한 인간에게는 꽃잎과 나방으로 기억되는 중의적 위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렇게 발생된 재는 또 다른 물질과 어우러져 전이를 거쳐 상으로 진화되어 이내 예술의 영역에 닿게 된다. 그곳은 마르셀 모스를 노리는 새도 인간을 노리는 잠재된 괴물성도 찾아오지 못하는 어느 숲속 나무 밑 바위이다. ● "당신은 아직도 나비와 나방을 구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나요?" ■ 홍기성

Vol.20180912b | 홍기성展 / HONGKISUNG / 洪起盛 / mixed media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