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8_0901_토요일_06:00pm
오프닝 퍼포먼스 / 최별 「다시 걸린 그림」
기획 / 홍태림
관람시간 / 금,토,일요일_01:00pm~06:00pm / 월~목요일 휴관
위켄드 2/W WEEKEND 2/W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823-2 1층 weekend-seoul.com
박정원, 이희욱 작가님께 ● 이번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서 두 작가님의 그림들을 살펴보며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은 두 작가님의 시기별 그림들에서 드러나는 형식과 내용이 어떤 궤적을 그렸으며 그 궤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생각들 속에서 몇 주 동안 허우적거렸는데요. 그러던 중 중 불현듯 두 분의 그림들이 마주치는 접점에서 일상이라는 단어가 점멸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경험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어 계속 머릿속을 더듬거리다 보니, 결국 두 가지 일상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일상의 양쪽에 놓인 낯설게 응축된 일상과 파열된 일상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막연히 두 개의 일상을 꺼내 들었을 때, 두 작가님이 "아, 저 일상이 나의 그림들과 관계된 것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두 작가님의 그림들에서 경험한 일상들은 무를 자르듯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이 두 가지 일상은 비율의 차이가 있을 뿐, 박정원, 이희욱 작가님의 그림들 속에 동시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한 두 가지 일상이 워낙 주관적이고 모호한 것인지라 두 작가님에게 어떻게 저의 경험을 전달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이 막막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낼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떠올리게 된 것이 뜬금없게도 지구(地球)입니다. 우선 낯설게 응축된 일상과 파열된 일상 사이에 있는 일상은 지구의 가장 바깥쪽인 지각(地殼)으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낯설게 응축된 일상은 바로 이 지각과 마주하는 태도에 대한 저의 기대와 관련이 있고요. 지각 위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의 면면이 낯설게 응축될 때 우리의 사유와 경험은 서서히 맨틀 속의 마그마나 지구로 불어오는 태양풍을 차단하는 자기장을 만드는 외핵의 대류에까지 가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사유와 경험이 지각의 내외를 아우르게 될 때, 우리는 복잡성과 난해함을 기꺼이 무릅쓰고 나와 우리 혹은 나와 세상이 애정을 바탕으로 마주하는 과정에 한 걸음씩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낯설게 응축된 일상에 대한 저의 기대인 것이지요.
한편 파열된 일상은 맨틀에 고였던 마그마가 지각을 뚫고 나오는 과정과 관련지어 볼 수 있습니다. 지각의 아래는 일상의 토대가 되는 사회구조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구조 안에 고인 마그마가 외부로 분출될 때 우리의 일상은 파괴되거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익숙함 속에 머무를 때가 많지만, 사회구조로부터 발생한 억압과 잔인함으로 뒤덮여 버릴 때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파열된 일상은 이 지난한 순간들에 대한 끈덕진 반응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뒤덮는 억압이나 잔인함에 반응하는 일은 불안 혹은 체념과의 길고 힘겨운 씨름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이 나선형을 그리며 차곡차곡 쌓여갈 때 우리는 새로운 국면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니 제가 의외로 알게 모르게 일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고민이나 기대를 가졌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앞선 이야기들을 되뇌어 보면 저는 우리의 일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흔들림과 무너짐 그리고 균형 잡기의 연쇄가 긍정되는 어떤 일상들로 남아야 그 속에서 삶의 의미도 피어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어떤 일상들은 고정된 일상들 위에 삶을 호출하는 파동들을 만들 수 있을 것인데요. 그래서 제가 두 작가님의 그림들이 마주치는 접점에서 느낀 무엇도 결국 이러한 파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두 분의 그림들 속에는 낯설게 응축되거나 파열된 일상이 녹아있고, 이것은 예술과 일상 혹은 삶 사이에 있는 공간이 텅 빈 상태로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작가로서의 반응이자 개입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허한 벌어짐은 마그마가 지각 밖으로 분출되는 원인이기도 할 텐데요. 그런데 무엇이 이러한 벌어짐을 만드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일 수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결국 경제와 소비가 진리로 추앙되는 세태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제와 소비가 진리가 된 현대사회에서 예술과 삶의 사이는 계속 텅 빈 상태로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경제와 소비는 삶과 예술의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의미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앞서 이야기한 벌어짐은 예술과 삶의 의미가 오직 경제와 소비에 있다는 현실을 계속 고착화하겠죠. 이 벌어짐 속에서 저 역시 시간이 갈수록 현재와 미래에 불안과 체념만을 자꾸 채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불안과 체념 대신에 분노, 이해, 실천, 사랑이 채워질 수 있는 어떤 일상. 그리고 그러한 어떤 일상을 바탕으로 계속 선언될 삶의 의미들. 저는 이런 것들을 저의 시간 위에, 그리고 우리들의 시간 위에 올려놓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저의 바람 때문에 두 분의 그림들 속에서 두 가지 일상이 점멸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기도 하겠죠.
낯설게 응축되고 파열된 어떤 일상들이 만들어내는 힘. 그리고 그 힘이 우리에게 주는 가능성들. 저는 그 가능성을 두 분의 마음, 호흡, 붓질, 색, 구성이 어우러진 그림들을 통해서 더 경험하고 싶습니다. 하여 두 분이 각자 이 편지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자신의 그림들을 전시장에 갖고 와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 편지에 대한 응답으로써 가지고 와주신 그림들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면 더없는 기쁨으로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 7월 15일 홍태림 드림. ■ 홍태림
Vol.20180902h | 두개의 오늘-박정원_이희욱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