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명 Faceless

이정식展 / LEEJUNGSIK / 李正植 / photography.installation   2018_0901 ▶ 2018_0921 / 월요일 휴관

이정식_김무명4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28×4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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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1:00pm~07:00pm / 월요일 휴관

구석으로부터 FROM THE CORNER 대전 동구 중앙로203번길 88-1(정동 36-11번지) Tel. +82.(0)10.6412.2870 blog.naver.com/onthecorner2016

그의 두 번째 개인전 『김무명 faceless』(2018)에서 그는 2013년 수동연세요양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김무명씨 이야기를 모티프 삼는다. 열악한 환경과 차별적인 처우 속에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세상을 떠난 김무명씨는 죽어서도 이름을 드러낼 수 없는 감염인 희생자다. 죽음 이후 보수언론은 성적 단죄의 뉘앙스 가득한 내용으로 요양병원 에이즈 환자들을 다루기도 했다. 그를 두 번 죽인 것이다. ● 질병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구축되는 과정 속에서도 작가는 다시금 오랜 시간 고착되어온 바닥의 그늘을 바라본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감염인이 사각지대에 초점을 맞춘 시도는 일견 음지화된 질병이미지를 반복하는 퇴행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야는 인식 변화의 강박에 감춰진 근본적 문제를 재차 들여다봄으로써 질병당사자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한 시도에 가깝다. 김무명씨는 여전히 감염되었다는 이유로 의료차별 받는 상황을, 성소수자를 향한 부정적 인식을,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조차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삭제당하고 탈락당할 수 있는 불안을 가리킨다. 김무명은 개인이며 동시에 사회적 자본이 척박한 생애환경 속에 감염인들에게 닥친 위기상황 내지 노년의 불안을 가리킨다.

이정식_김무명1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29.7×21cm_2018

작업과정동안 이정식은 그를 응원했던 익명의 감염인과 더불어 감염인 자조모임을 통해 소개받은 이들을 포함한 8명의 질병당사자로부터 이야기를 채집한다. '이름 없는' 감염인이라고 하지만 감염사실을 드러내지 않을 뿐, 이들은 저마다 관계를 만들고 쾌락을 향유하며 삶의 지층을 만들고 있다. 20대부터 40대에 이르는 감염인들 중에는 이제 증언록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이도 있고, 사회생활을 하고 애인을 만나는 이들도 있다. 그는 이들의 감염 전후 생애를 채록하고, 이야기당 한 편의 줄글로 편집한다. 나아가 당사자들에게 감염된 몸을 표상할 수 있는 사물을 요청하고 선물 받아 사진으로 남기는가 하면, 줄글로 다듬어낸 이들의 이야기를 다른 비감염인 지인들에게 필사하도록 한다.

이정식_김무명2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29.7×21cm_2018

작업을 진행하며 작가는 타인과의 관계 뿐 아니라 그들의 언어를 총괄 편집하는 중추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작업을 하고 전시를 기획하지만, 당사자를 섭외해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네트워크를, 정확히는 낙차의 시공간을 조율하며 매체와 매체를 주관하는 메타 미디엄의 관리자를 자처한다. ● 그에게 HIV/AIDS는 감염인으로서 작업에 임하는 태도의 근간이자 작업의 해석가능성을 제한하는 소재이다. 분명한 한계 속에서도 그는 질병을 직접적인 소재로 삼는 정공법을 택해왔다. 그간의 작업들은 '감염인으로서' 그의 모습을 시각화하고 시각예술을 질병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에 가까웠다. 수잔 손탁은 질병에 은유를 붙이지 말자고 했지만, 작가는 질병당사자가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 은유와 우회의 언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감염의 메타포로부터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시각적 문법의 확장을 시도한다.

이정식_김무명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20×20cm_2018
이정식_김무명11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29.7×21cm_2018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시선은 더불어 살아가는 비/감염인으로 옮긴다. 감염인들의 이야기를 채집하고 가공하여 공유하는 작업은, 질병당사자를 둘러싼 인식과 제도, 지지와 낙인 사이 낙차의 조건을 드러내고 이를 활용한 것이기도 하다. ● 타인의 참여가 필요한 작업 속에서 그는 작가로서 공정상의 주도권을 놓지 않는 지점에서 나아가 타인의 언어가 드러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점을 투여하고 개입한다. 기존 작업에서 보인 '자기중심성'은 연출과정에 옮겨 수행된다. 타인의 이야기는 그의 관점 아래 썰리고 접합되고 가공된다. 이정식은 이들의 서사와 자신의 언어를 교차시켜 낙차의 시간성을 삶의 입체적인 관점으로 재조명한다. 그럼에도 질문은 남는다. 그의 작업은 소재를 착취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당사자들이 그의 요청을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의 작업을 지지하는 상황에 '착취'라는 표현은 정당한 것인가. 그가 감염인이라는 점은 자신과 같은 감염인을 소재삼았다는 비판에 어떤 의미를 작용할까. 설령 당사자들의 지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총괄 아래 편집된 얼굴들과 이를 필사한 다른 얼굴들은 결국 이정식과 다른 이정식을 조우시킴으로써 서사의 다양한 갈래들을 균질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정식_Faceless_음악소품(이영민)_2018
이정식_김무명 Faceless展_구석으로부터_2018
이정식_김무명 Faceless展_구석으로부터_2018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 가야트리 스피박의 여전히 유효한 질문은, 그의 전시에 이르면 조금 변형된 문장으로 필사된다. - '하위주체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번 전시는 감염인이 스스로를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 속에 자신의 언어를 만드는데 있어 관점들이 긴장을 유지하며 더러는 충돌하고 경합하는 논쟁지점을 벼려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름 없음'을 주제 삼는 그의 전시는 감염인 작가와 그를 통해 발화하는 질병당사자들, 그리고 그를 조력하는 감염인 자조모임과 인권단체 활동가들, 비감염인 동료 등 상이한 이름과 얼굴들이 해상도를 달리하며 교차한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동류집단 내부에 공통적으로 걸쳐있는 낙차의 구조이다. 그 속에서 질병의 언어는 어두울 수만도 없고, 빛과 희망만을 지향할 수만도 없다. 외려 읽어낼 것은 신뢰와 연대 속에서도 긴장을 놓지 않는 관점들의 협력과 경합의 엉킨 매듭이다. 단적으로 우리는 전시에 참여한 인터뷰이들이 자신들에게 작가가 호명한 '무명씨들'에 어떤 불만과 이견이 없었는가를 물을 수 있다. 설령 합의된 표현일지라도, 이들의 사물과 서사들은 강제된 익명성에 저항하는 모습을 취한다. 물론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고, 표백되고 균질화된 형태로 바깥에 나왔을지라도 말이다. 이는 질병당사자들의 삶이 특정 관점으로 수렴하지 않음을, 당사자성에 국한한 채 단순화할 수 없음을 항변한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을 관람하며 해석에 윤리성을 붙일 수 있다면, 관객들은 이정식의 스크린이 비추고 있는 타인의 서사를 읽어냄과 동시에, 스크린이 감추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음을 의식하고 필터링되지 않은 낯선 감각에 눈과 귀를 열어야할 것이다. ■ 남웅

Vol.20180902a | 이정식展 / LEEJUNGSIK / 李正植 / photography.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