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더트리니티 갤러리 THE TRINITY GALLERY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7길 18(옥인동 19-53번지) 1층 Tel. +82.(0)2.721.9870 www.trinityseoul.com
THE TRINITY GALLERY는 허욱, 조나라 작가의 2인전 『겹침: They overlap each other』展을 갖습니다. 미켈란젤로, 로댕, 밀로와 같은 전대 작가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가들은 예술의 범주 안에서 에로틱한 주제를 다뤄왔습니다. 이번 『겹침: They overlap each other』展은 모든 인간 생활의 근원과 함께하는 에로티시즘을 '겹침'이라는 작업 방식으로 각자 다른 조형적 전개를 모색하는 두 작가의 전시입니다. 작가 허욱은 하나 하나 도려낸 캔버스를 겹쳐 쌓아 올려 다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온 첨첨(添添)작업의 누드 연작 12점을 선보입니다. 들어가고 나감이 연속되는 실과 바늘 작업으로, 교차되고 겹쳐지는 색실을 통해 교감하는 남녀의 에로틱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조나라 작가는 Anomalisa작업의 남녀시리즈 9점을 선보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허욱 작가의 작업들은 그간의 " 연결하기- 연결되기, 이루기- 이루어지기, 되기-되어지기, 놓기-놓이기, 쌓기-쌓이기, 겹치기 - 겹쳐지기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Support-Supported'에 기조하고 있으면서 작업 과정에서 형성되는 관계항의 문제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겹침 - 겹쳐지기이다. 또한 완결된 이미지가 아닌 작업 과정인 '첨첨(添添)'을 관조하는 것이고 이것은 변화의 한 단계로서 대중에게 다가간다. ● 섬유공장을 40년 넘게 하고 계신 아버지 아래서 자라온 작가 조나라에게 실이란 익숙하고 친근한 재료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사용되는 실은 단순히 실이 가지는 재료적 사용을 넘어 관계와 관계를 꼬매어 하나로 엮어내는 일련의 결합과정을 의미한다. 작가는 인간이 가지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과 인간관계에서 마주하는 내면성, 다면성, 이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두 남녀의 형상이 등장한다. 캔버스의 앞뒷면을 종횡하듯 어지럽게 수놓아지는 바느질의 흔적들이 겹겹이 쌓여 실의 흔적너머로 두 남녀가 하나의 결합체처럼 얽혀있는 형상은 관능적인 에로티시즘(eroticism)을 만들어낸다. ■ 더 트리니티 갤러리
허욱-오브제가 된 캔버스 ● 외관상 허욱의 작업은 내용미학보다는 형식미학에 가깝다. 주지하다시피 형식미학은 장르적 특수성에 천착한 모더니즘 서사의 산물이며, 회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여타의 형식적인 요소들에서 회화의 특수성을 찾는다.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형식주의적 환원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서사와 통한다. 그런가하면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 그리고 심지어는 건축적인 구조와 설치의 경향마저 아우름으로써 모더니즘 서사를 넘어서고 있다. 이처럼 모더니즘 서사를 공고히 하면서 동시에 이를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거나, 모더니즘 서사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끌어안으면서 그 변형과 확장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서사에 대한 일종의 종합적인 인식이 발견되고 있다. 모더니즘의 기획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한 하버마스의 전언이나, 이성의 간계에 대한 헤겔의 전언이 물적 형식을 덧입고 표상된 것이라고나 할까. 이성(순수형식)에 대한 긍정은 물론이거니와 그 부정마저도 모더니즘 기획의 한 측면으로 싸안고자 하는 것이다. 허욱의 작업은 이처럼 모더니즘 서사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에 의해 지지된다. 형식주의적 환원과 확장이 공존하고, 단위구조 내지는 단위원소의 집합과 해체가 동시성을 얻는 것에서 특유의 긴장감이 감지된다. ● 허욱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캔버스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에게 있어서 캔버스는 더 이상 어떤 이미지를 덧그리기 위한 지지대 내지는 부수적인 장치가 아니다. 캔버스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캔버스 자체의 자족적인 존재성을 되돌려준다. 이를테면 그 자체 독자적인 낱낱의 작은 캔버스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 화면을 재구성해내는 식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과 과정을 통해 서너 개의 양식화된 패턴을 그리고, 그 패턴에 맞춰 캔버스를 짠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원형이나 반원, 그리고 퍼즐조각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틀을 만든 후, 천 조각으로 그 틀들을 일일이 씌워 여러 크고 작은 비정형의 캔버스를 만든다. 그리고 그 작은 캔버스들을 모자이크처럼 조합해 하나의 큰 그림을 축조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축조된 최종 화면에서는 크고 작은 틀들이 중첩된 입체적인(엄밀하게는 부조적인) 효과와 함께 그 위에 덧그려진 추상적인 색면이나 패턴(대개는 줄무늬가 반복된)이 어우러져 리드미컬한 내적울림을 자아낸다.
작가는 이처럼 캔버스의 정형화된 구조와 틀을 해체해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캔버스 자체를 일종의 자족적인 오브제로 간주하는「쉬포르쉬르파스」(지지대와 지지체)와도 통한다. 주지하다시피 쉬포르쉬르파스는 캔버스를 재현회화(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구상적이고 추상적인 재현 일체를 아우르는)의 부수적인 장치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 자체를 독자적인 오브제의 일종으로 간주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이후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연 것으로까지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허욱의 작업은 하나의 단위원소를 모듈삼아 이를 반복적으로 중첩 나열한다. 이를 위해 대략 서너 가지 정도의 기본 모형이 선택되는데, 그 모형을 반복 중첩시켜 정형이나 비정형의 패턴을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이처럼 기본 모형이 있지만, 그러나 그 기본형으로부터 반복 재생산된 모형들 모두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외관상 그 크기나 형태가 엇비슷한 모형들이 사실은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 직접 제작한 것으로서 약간씩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이처럼 최소한의 모형을 단위원소삼아 이를 반복 중첩시킨 작가의 작업은 일견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총체성의 인식)에 의해 견인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일종의 차이를 내포한(혹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의 실천논리(차이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 형식을 오브제(군소모형)가 제작되는 과정도 그러하지만, 특히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에서 이러한 차이의 논리는 극대화된다. 예외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오브제 뒷면에 자석이 부착돼 있어서 관객이 마치 레고처럼 그 모형들을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심지어 작가가 구획해 놓은 프레임을 벗어난 벽면 위에다 모형을 부착할 수도 있다. 결국 작가가 제시한 최초의 구성은 관객의 참여와 간섭으로 인해 재구성되고, 나아가 프레임으로 설정해 놓은 경계마저도 그 의미를 잃고 만다. 이러한 사실은 작가의 작업이 결정적이기보다는 비결정적이며, 최종적이기보다는 임시적인 논리와 현재진행형의 시제에 의해 견인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언제든 수정과 첨삭이 가능한 열려진 구조를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사실상 공간을 점유하며 작품의 표현영역을 무한정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그 자체 설치미술의 경향성을 아우르는)마저 열려있게 된다. 이런 열려진 구조나 비결정적인 성질은 작가가 일관되게 심화시켜온 주제인「첨첨 사이 (添添 사이)」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형식이나 의미가 계속해서 쌓이거나 덧붙여지는 과정을 암시하는 이 주제처럼 허욱의 작업은 완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계기로서 관객의 참여는 결정적이다. 이처럼 최종적이기보다는 어떤 임의적인 지점에다가 정체성을 세운다든가, 나아가 관객의 참여와 간섭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 고유의 미덕과 포용력이 읽혀진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종전의 평면이나 입체 어디에도 범주화되지 않는 독특한 지점을 예시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는 최소 단위원소로 제작된 모형들을 중첩시켜 대개는 전체적으로 사각의 틀(프레임) 모양이 되도록 재구성하는데, 이렇게 재구성된 화면은 전체적으론 평면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평면 위로 돌출돼 보이는 화면이 평면의 경계를 넘어선다. 평면과 입체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모두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평면과 입체의 경계 위에 위치한다고나 할까. 그 이면에선 일종의 변형 캔버스에 대한 인식이 발견되는데, 이는 캔버스 자체의 자족적인 존재성을 인정하는 태도와도 통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최소 단위원소가 반복 재생산된 것이란 점에서 양식화와 패턴화의 경향성에 의해 지지되며, 동시에 그 경향성은 패턴을 해체하는 또 다른 계기에 의해 견제되고 조정을 받는다. 패턴을 지향하는 운동성과 패턴을 해체하는 운동성이 부닥치고, 정적인 계기와 동적인 울림이 삼투되며, 환원(구심력으로 작용하는 힘)과 확장(원심력으로 작용하는 힘)의 대립되는 두 계기가 서로 스며들면서 특유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작업은 외관상 형식적인 측면이 강하면서도 내용적인 성질을 결여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군소모형들 하나하나는 관계의 계기로서 작용하고 있다. 모형들이 모여 전체 화면을 일궈내는 것은 그대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에 의해 지지되며, 이는 또한 익명의 주체들이 서로 어우러져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암시한다. 아마도 관객의 참여를 통해 이렇듯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체험하게끔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의 숨은 뜻이 아닐까 싶다. ■ 고충환
조나라-사회적 신체와 피부, 경계의 확장에 대하여 ● 작가는 최근 색실을 가지고 회화적 표현의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작업은 천의 앞뒤를 종횡하는 바느질로 어떤 인물들과 형상을 그려내기도 하고 뭉개기도 하면서 다시 앞과 뒤를 수 없이 교차한다. 모세 혈관, 근육 세포와 같이 켜켜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실들은 주로 끊어내어 정리되기 보다는 흘러내리는 물감처럼 천 위를 벗어나 화면 아래로 어지러이 늘어뜨려진다. 새, 꽃, 개 등, 그 소재가 전통적인 화조화(花鳥畵)의 공예 형식에 가깝게 진행된 전작들은 '실'이라는 매체의 도구적인 실험, 훈련으로 보인다. 이 도구적인 실험이 그리 매력적이지만은 않아 보였던 것은 매체의 기술적인 발견에 앞서 제기 되어야 할 현대미술에 대한 물음이 그다지 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나라는 본인의 예술적 도구의 현상적인 외연보다는 실을 선택하게 된 본질적인 당위 (어릴 적 부모의 직업적 환경으로부터 작가에게 남은 잔상)를 찾는 과정, 그리고 실로 풀어내는 현재의 경험, 내부와 외부의 사회를 인식하는 기제로써 작업의 가능성, 작업을 마주하는 본인의 태도에 한걸음 다가가는 것으로 보인다.
천에 새겨진 남녀의 뒤엉킨 신체를 모티브로 수놓은 작업은 가족 이후의 다른 친밀한 관계가 에로스의 반대편에 놓인 타나토스의 잠복된 파국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그가 만지고 사용하는 촉감적인 소재의 관능성은 비로서 차이를 가지기 시작한다. 이 작업은 다시 영원 속에 놓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지만 결코 완전히 대면하고 싶지는 않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이중적인 심리를 자수의 '뒷'면으로 드러낸다. 가는 실이 동반해야만 하는 엄청난 양의 연속적이고 무작위적인 육체노동은 그것을 수행하는 동안, 눈 앞의 이미지를 무력하게 휘발시켜 버리지 않았을까. ● "나는 교육이라는 제도 안에서 너무나도 옳고 그름과 같은 정답을 배우며 관념적인 인간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입니다" 라는 작가의 진술은 실상 그것들 너머로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학적 고백의 흔적으로 읽힌다. 작가들 대부분이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작업의 동기를 찾고, 그러한 배경은 진정성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아쉽게도 자기 반영의 특이성에 도달할 만큼 사적인 경험에 몰입하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일상적인 소재가 가지는 소통의 용이함만 남아 표면으로 부유하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문제로 작가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개인과 작가의 경계에서 사적인 경험을 발언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 오고가는 서로의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아 밖의 타인에 대한 윤리와 도덕적 괴리에 대한 인식을 작업으로 풀어내는 일은 사건과는 별개로 작가의 설정된 성찰의 공간 안에서, 하지만 감금된 자폐인에서 벗어나 공적이고 역사적인, 집합적인 문제를 사유하는 일이다. 다만 작업은 현재의 경험을 여러 부분으로 단편화 시키고 경계를 설정하는 시간의 유보 과정이 된다. 노동하는 작가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외부 세계로부터 (심지어는 개인으로의 본인과 작가로써의 자신으로부터) 어떻게 끊임없이 탈주할 수 있는지, 삶과 삶이 서로 투쟁하도록 분열을 만든다. 물리적으로 나와 인간을 구분하는 경계가 간단히 피부의 안과 밖의 이야기라면 끊임없이 경계를 뚫어 생채기를 내야하는 바느질은 수행으로써의 카타르시스가 되지 않았을까? ● 역사학자인 앨론 콘피노(Alon Confino)도 지적했듯이, 기억이란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의식을 구축하는 방식"이며, 따라서 지나간 과거를 발굴하고 이에 대한 의식을 재구성해내는 방식과 이를 위한 노력은 생물학적 시간, 물리적 시간의 비가역성(非可逆性)에 맞서려는 인간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스 브루주아나 트레이시 에민과 같은 여성작가들이 그들의 개인사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세계에 대한 시선을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기억은 현재의 매 순간 매 순간이 과거가 되어버리는 끝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기에,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저항의 행위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 이단지
첨첨(添添)은 '계속 더하고 더하다'는 뜻이다. 경계에서 또 다른 경계까지 선으로 그어 분할, 해체하고 다시 결합, 조합, 그리고 첨첨 하는 것이다.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순간순간에 형성하고 순환하는 과정이 나의 작업이고, '첨첨(添添)'으로 대변된다. 나의 작품은 다만 그림이 아니라, 건축적인 회화 - 회화적인 건축, 즉 오브제적인 회화 - 회화적인 오브제라고 일컫고 싶다. (작업노트 中) ■ 허욱
"기억은 없고 감정만 있을 뿐"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이 없지만, 무가치한 질문도 절대 아닌 본질적인 의문에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이며, 앞으로도 직, 간접적 경험과 학문적 연구를 통해 회화작업으로 표현할 것이다. (작업노트 中) ■ 조나라
Vol.20180815g | 겹침: They overlap each other-허욱_조나라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