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료 / 4,000원(서울관 통합관람권) / 야간개장(06:00pm~09:00pm) 무료관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금,토요일_10:00am~09:00pm 관람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가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Seoul 서울 종로구 삼청로 30 제3,4,8 전시실 Tel. +82.(0)2.3701.9500 www.mmca.go.kr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은 한국 단색화의 거목(巨木)으로 알려진 윤형근(1928~2007)의 회고전을 8월 4일(토)부터 12월 16일(일)까지 MMCA 서울에서 개최한다. ● 윤형근은 1928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참혹했던 역사적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1947년 서울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류 조치 후 제적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학창시절 시위 전력(前歷)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다. 전쟁 중 피란 가지 않고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1956년에는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바 있으며, 유신체제가 한창이던 1973년에는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중앙정보부장의 지원으로 부정 입학했던 학생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총 3번의 복역과 1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그는 이른바 '인생공부'를 하게 되고, 극도의 분노와 울분을 경험한 연후인 1973년, 그의 나이 만 45세에 비로소 본격적인 작품 제작을 시작했다. ● 이후 그는 스스로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했던 자신만의 작품 세계에 곧바로 진입했다. 이 작품들은 면포나 마포 그대로의 표면 위에 하늘을 뜻하는 청색(Blue)과 땅의 색인 암갈색(Umber)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정색'을 큰 붓으로 푹 찍어 내려 그은 것들이다. 제작 방법에서부터 그 결과까지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이 작품들은 오랜 시간 세파를 견뎌낸 고목(古木), 한국 전통 가옥의 서까래,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흙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는 이렇게 '무심(無心)한' 작품들을 통해 한국 전통 미학이 추구했던 수수하고 겸손하고 푸근하고 듬직한 '미덕'을 세계적으로 통용될만한 현대적 회화 언어로 풀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전시 구성은 작가의 삶의 여정에 따른 작품의 변화를 총 4부로 나누어 소개한다. 1부에서는 작가의 작업 초기,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1916-1974)의 영향을 보여주는 1960년대의 드로잉과 작품들이 전시된다. 윤형근의 조형언어가 발전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1부의 드로잉들은 상당부분 처음 공개된다. 2부와 3부에서는 다양한 색채에서 출발했던 그의 작업이 역사와 부딪혀 순수한 검정에 도달한 상태를 보여준다. 작가 특유의 색채인 청색과 암갈색이 섞인 '오묘한 검정색'이 담긴 「청다색」 연작을 시작으로, 2000년대 말년 작에 이르기까지의 대표작이 엄선되었다. 무엇보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울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작된 작품과 같이 시대의 아픔을 담담히 담아낸 슬프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 1980년 6월 제작된 작품 「다색」(1980)은 피와 땀을 흘리며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에 대한 헌사로서, 제작 이후 단 한 번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다가 이번 전시에 최초 공개된다. ● 또 8 전시실은 서교동 작가의 아틀리에에 소장되어 있던 관련 작가의 작품(김환기, 최종태, 도널드 저드 등)과 한국 전통 유물(고가구, 토기, 도자기 등)을 그대로 옮겨, 작가의 정신세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작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와 노트가 처음 공개되고, 많은 양의 사진 자료도 선보인다. 아울러, 김환기가 작고 15일전 윤형근에게 남긴 엽서를 포함, 김환기가 윤형근과 김영숙 부부에게 보낸 편지도 공개되어, 작가와 그 주변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한층 풍성한 연구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 한편 배우 지진희씨가 이번 『윤형근』전시 특별 홍보대사를 맡았다. 부드러우면서 울림이 깊은 목소리의 지씨는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윤형근 작가의 극적인 삶과 작품의 여정을 들려준다. 관람객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전할 지씨의 오디오 가이드는 국립현대미술관 모바일 앱(App)을 통해 만날 수 있다. ●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가 "단색화의 범주에서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윤형근의 진면모를 총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1부. 프롤로그: 윤형근의 초기 작품 ● 제 1부에서는 1960년대부터 1973년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의 작품이 소개된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4.19를 겪은 이후, 윤형근은 숙명여고 재직 시절(1961~73년) 상대적으로 나아진 작업환경 속에서 다수의 드로잉과 소품을 남겼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밝은 색채의 추상화로,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의 영향을 짙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1973년 이른바 '숙명여고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밝은 색채가 사라지고 전형적인 '검은'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섹션에서는 작가가 인생 역경을 거치면서, 색채와 형태, 작업 과정과 결과가 모두 점차 단순해지고 '순수해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 "순수한 그림일수록 어렵다" (윤형근, 1977년의 일기 중에서) 윤형근은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1966년, 첫 개인전을 서울 신문회관 화랑에서 열었다. 당시 출품작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사진 자료를 통해 볼 때 이와 매우 유사한 작품들이 전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그의 작품에는 대부분 「섬 풍경」, 「호수」, 「매화와 달」 등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적인 제목이 붙여졌으나, 이 작품의 경우에는 제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반적으로 푸른색이 지배적인 화면에 다양한 색채의 점들이 보석처럼 빛나며 그들의 존재를 알린다. 매우 서정적이고 풍부한 감성을 지닌 이 작품은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수화 김환기(1913-1974)의 영향을 깊이 반영하고 있다.
윤형근은 초기 수많은 드로잉 작업을 통해, 그가 이후 줄곧 관심을 가졌던 다양한 조형적 실험들을 이미 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한지'의 특수한 재질감과 번짐의 효과가 실험되고 있다. 마치 한국 전통의 '먹'으로 글씨를 쓸 때와 같이, 물감의 농담에 따라 그것이 종이에 흡수되는 강도와 번짐의 정도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후에 그가 마포 위에다 오일로 농담을 조절해가며 검은 물감을 내리긋는 작업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이때는 아직 원색을 포함한 다양한 밝은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가 1973년 '반공법 위반'의 누명을 쓰고 서대문형무소를 다녀온 후 색채를 잃게 된다. ● 1972년 명동화랑에서 열린, 윤형근의 제 2회 개인전에 출품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시원스러운 청색의 선들이 화면을 지배하면서, 수채화를 보는 것 같은 청신한 느낌을 전달한다. 작가는 짙은 청색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그었으나, 묽은 성질의 물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으로 넓고 자연스럽게 번져나가게 된다. 작가가 인위적으로 한 행위와, 물감과 천이 스스로 만든 효과가 합쳐져서 이와 같은 작품이 탄생되는 것이다. 윤형근의 작품은 언제나 이러한 인위성과 '자연 그대로'의 섬세한 경계 위에 서있다.
2부. 천지문 (天地門) ● 제 2부에서는 1973년 반공법 위반 협의로 서대문형무소를 갔다 온 이후 뚜렷한 직업 없이 요시찰인물로 등록된 채 오로지 작업에만 매진하던 10여년의 시기 제작된 작품을 보여준다. 이 시기 작품에 대해서 작가는 스스로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하늘의 색인 블루(Blue)와 땅의 색인 엄버(Umber)를 섞어 검정에 가까운 색채가 탄생하는데, 거기에 오일을 타서 면포나 마포에 내려 그으면'문(門)'과 같은 형태의 작품이 나오게 된다. 이 작품들은 검정색의 우뚝 선 구조들 사이로 무언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형태도 작업과정도 매우 단순한 이 작품들은 서툰 듯하면서도 수수하고 듬직한 멋을 지닌다. 1980년 광주항쟁의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쓰러지는 인간 군상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러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운다. ● "진실로 서러움은 진실로 아름다움 하고 통한다." (윤형근, 1988년 8월 17일 일기 중에서) 윤형근은 1977년 1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 그림의 명제(命題)를 천지문(天地門)이라 해본다. 블루(Blue)는 하늘이요 엄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天地)라 했고, (이러한) 구도(構圖)는 문(門)이다." 그는 1973년 숙명여고 사건으로 교사직을 그만둔 후 약 10년간 자신의 화실에서 작품 제작에만 매달렸다. 그 때 제작된 일련의 작품들은, 블루와 엄버 물감을 섞은 후 테레빈유와 린시드유를 적당히 타서 농담을 조절하고, 이를 큰 붓에 푹 찍어 면포나 마포 위에 내려 그은 것들이다. 두 가지 색채는 합쳐져서 깊은 깊이감을 지닌 '검은 색'이 되고, 오일의 번지는 효과는 물감의 경계선을 자연스럽게 모호하게 만들어준다. 결국 여백으로 남겨진 공간이야말로 작품의 '핵심'이 되는데, 바로 이 텅빈 공간은 저 멀리 또 다른 차원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초기 작품에서 특히 '면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마포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이얀 면포의 느낌은 검은 물감과의 극적인 대비를 더욱 강조한다.
윤형근은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잔소리를 싹 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고 표현했다. 색채도 형태도 작업 방식도 매우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을 꼼짝없이 붙잡아 놓는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작가의 인위적인 행위'와 '물감이 스스로 만들어낸 효과'가 절묘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의 작품은 한국의 전통 미학이 지닌 자연스러운 멋과, '구수한 큰 맛'을 현대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서툰 듯하면서도 멋이 있고, 순박하고 소탈하며, 듬직하고 푸근한 미감을 지닌 이 작품들은 제작 당시 (한국 보다) 일본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 또한 1978년 일본 동경화랑에서 전시된 바 있다. ● 윤형근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1960년 4.19 혁명 때에 청년기를 보냈다. 이후 유신 시대를 거쳐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또다시 비극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그는 광주의 소식을 전해 듣고 더할 수 없는 분노를 주체할 길 없어 마당으로 나가 몇 점의 대작을 그려 내었다. 땅을 딛고 하늘을 받치며 바로 서 있으려 해도, 도저히 그러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인간 군상들이, 서로가 서로를 기댄 채 비스듬히 쓰러져 간다. 피와 땀을 흘리며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에 대한 절절한 헌사인 이 작품은, 작가의 일평생 작업 중 가장 감정적 노출이 심한 편에 속한다. 제작 이후 한 번도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다가 이번 전시를 위해 수복을 마치고 처음 전시되었다.
3부. 심간 (深簡) : 깊고 간결한 아름다움 ● 제 3부에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제작된 윤형근의 후기 작품으로 구성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한마디로 말해 한층 더 간결해진다. 색채는 검은색의 미묘한 변주가 사라진 채 '순수한 검정'에 더욱 가깝고, 물감과 함께 섞었던 오일의 비율도 줄어들면서 화면은 한층 건조해진다. 형태와 색채, 과정과 결과가 더욱 엄격해지고 간결해지지만, 그 거대하고 순수한 검정색 앞에 서면 관객은 왠지 모를 '심연(深淵)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그의 후기 작업은 어떤 '확신에 찬 통찰'을 보여주며, 존재와 존재 간의 '관계', 그리고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윤형근, 1990년 우에다 갤러리 개인전 작가노트 중에서) 윤형근은 1980년대 후반 최고 완성도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여전히 울트라마린과 번트엄버를 섞어 사용하고 있지만, '문(門)'의 구조를 대신하여 '전면화'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화면을 완전히 덮고 있는 이 물감층은 한번 바른 후 시간을 두고 지켜보다가 또 한번 바르기를 반복하여 제작된다. 물감 배합의 원리나 천의 성질을 완전히 이해한 바탕 위에, 조심스럽게 겹겹이 쌓아올려진 화면은 더할 수 없는 깊이감을 지니며, 일종의 신비감마저 자아낸다. 땅 속 깊이, 마치 '무덤'과 같이 침잠해 들어가는 그의 작품 앞에서, 관객들은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라(memento mori)'는 경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 1990년대 들어 윤형근의 작품은 이전에 비해 작업 방식이 한층 더 단순해진다.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천을 나무틀에 매고 이를 작업실 바닥에 놓은 다음, 긴 자를 대고 연필로 간략한 선을 긋는다. 그 연필선 위치에 종이테이프를 붙인 후, 그 테이프들 사이의 반듯한 사각형 틀 안에 블루와 엄버가 섞인 검은 물감을 커다란 붓으로 쓱쓱 문지른다. 그리고는 테이프를 때어내면 작업은 끝난다. 종이테이프가 붙어있던 자리는 뚜렷한 경계선을 만들지만, 물감이 스스로 천의 올과 올 사이를 비집고 파고들어 생겨난 자연스러운 효과는 남아있게 된다. 작업 방식이 한층 간단해질 뿐 아니라, 형태는 더욱 엄격해지고, 색채도 미묘한 차이들이 사라진 채 '순수한 검정'으로 귀결해간다. 그러나 바로 이런 '단순한' 그림 앞에서 관람자는 어떤 '크기'라든가 '시간'이라든가, '숭엄함'의 의미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2007년, 그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해에, 그는 20여 점의 연작을 남겼다. 1970년대 작업 초기에 즐겨 썼던 하얀 면포를 다시 꺼내들어, 그는 단 두 개의 검은 사각형을 때로는 나란히, 때로는 이렇게 비스듬히, 때로는 저렇게 비스듬히 세워 놓았다. 그리고 때로는 더욱 지친 듯, 쓰러질 듯 기대어 놓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관계'라는 작가 일생의 화두를 정리하는 작업임과 동시에, 진정한 노경(老境)에 이른 작가의 '고독'과 '죽음'에 관한, 지극히 담담한 이야기이다.
4부. 윤형근의 세계 ● 제 4부에서는 윤형근의 세계관을 들여다보는 공간으로 구성된다. 그는 1983년 서교동에 스스로 설계한 집을 짓고 2007년 작고할 때까지 거주하였는데, 그렇게 24년간 함께 했던 그의 생활공간과 작업실을 전시장에 옮겨왔다. 거기에는 그가 사랑했던 목가구와 목기, 도자기와 토기 등 조선의 공예품들이 가득하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 김환기의 그림, 최종태의 조각, 그리고 도널드 저드의 작품 등이 함께 했다. 그와 관계 맺었던 인물들, 사물들, 그리고 윤형근 자신의 일기, 노트, 사진, 드로잉 등 각종 아카이브를 통해, 윤형근이 추구했던 정신세계, 그리고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 ● "골동은 돈이 아니다. 조상의 얼이요 세월을 담은 기물이다. 골동을 보고 있노라면 옛 어른을 보는 것 같다. 점잖고 넉넉한 그 옛 어른을 보는 것 같다. 어리숙하고 인정어린 옛 어른을 보는 것 같다." (윤형근, 1990년 7월 5일 일기 중에서) 윤형근의 거실 공간을 옮겨온 것이다. 전통 목가구, 도자기, 토기, 고서 등이 작가 자신의 작품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했던 과제는 한국 전통 공예품의 '멋'을 현대적 언어로 변환하는 일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의 공예품은 흙과 나무 같은 자연 재료에서 출발하여, 그 소박한 성질을 해치지 않은 채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함으로써, '쓸모'의 본질을 살려낸 것들이다. '자연을 따라', '자연과 함께', 무심(無心)한 듯 생겨난 작품들이 오래 두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 미감을 가진 것이라고 설파한다. 벽 가운데에는 도널드 저드의 작품이 걸려 있는데, 저드는 1991년 인공화랑에서의 개인전을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가 윤형근을 만나 단번에 친구가 되었다. 저드는 즉석에서 윤형근의 작품 3점을 구입했고, 그를 뉴욕과 텍사스 마파의 전시에 초대했다. 윤형근도 저드의 이 작품을 사서 평생 애장하였다. ● 이번 전시를 위해 방대한 양의 윤형근 아카이브가 조사, 연구되었다. 이 중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1975년부터 쓰기 시작한 윤형근의 일기이다. 몇 개의 작은 수첩에 빼곡하게 써내려간 그의 일기는, 작가의 삶과 인격, 품성과 예술에 대한 태도 등을 읽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작품을 하는 것이 "매일매일 일기는 쓰는 일과 같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예술이 어떤 대단하고 특별한 일을 한다는 의식을 완전히 내려놓은 채, 작가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단조롭고 평범한, 그러나 '성실한' 일상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임을 일깨운다. ● 김환기와 윤형근은 특별한 인연을 지녔다. 윤형근이 처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입학시험을 보러 간 날 시험감독관이었던 김환기와 처음 조우했다. 그 후 윤형근이 제적당하고 홍익대학교로 편입할 때에도 김환기가 그를 이끌었다. 그러다가 1960년 윤형근이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함으로써, 두 사람은 장인-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윤형근은 평생 김환기를 '장인'이 아닌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김환기 또한 윤형근을 신뢰와 존중으로 대했다. 1974년 7월 10일, 김환기가 뉴욕에서 작고하기 15일 전에 윤형근에게 붙여진 엽서가 남아있다. 한 3년 아픈데도 견뎌오던 것이 이제 병원에 오게 되어, 하는 수없이 쉬게 되었다는 내용과, 걱정 말라는 당부가 적혀있다. 이 외에도 김환기가 윤형근과 김영숙에게 보낸 그리움의 편지들 일부가 전시에 함께 공개된다. ■ 국립현대미술관
Vol.20180804d | 윤형근展 / YUNHYONGKEUN / 尹亨根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