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8_0511_금요일_06:00pm
신혜정展 / 제1전시장 나딘 헨젤展 / 제2,3전시장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몸미술관 SPACEMOM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흥덕구 풍년로 162 제1전시장 충북 청주시 흥덕구 서부로1205번길 183 제2,3전시장 Tel. +82.(0)43.236.6622 www.spacemom.org
스페이스몸의 2018년 상반기 기획전 <이주의 기억-원과 형>에 초대된 신혜정과 나딘 헨젤(Nadine Hensel)의 전시장에서는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풍부하고 복합적인 차원에서 펼쳐진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어떤 출발점이 있는데 다소 우연찮게도 공통적으로 어떤 기원에 대한 이야기다. ● 유희(遊戱, play and joy), 억압과 자율을 넘어서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저장된 기억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원이라는 것은 찾아가자면 끝이 없거나 아니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실함만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 이 여행은 이제 불안하거나 트라우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경쾌한 것이 되고 있다. 신혜정의 형태들이 기원을 찾아가는 여행을 떠난다. 그들의 호기심, 놀이, 경험, 노동, 협업, 그리고 매개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사실상 놀이와 즐거움에 빠져 이 과정을 탐색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놀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유희로써, 신혜정의 형태들은 유희를 통하고, 겪는다. ● 신혜정의 작업을 보면서 '유희'를 어렵싸리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흔히 생각하는 안전한 테두리에서의 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혜정의 작업이 그렇기도 하거니와 '유희'라는 것 자체가 안전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유희는 필요에 의해서만 행하는 어떤 행위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작심하고 행하는 왁자지껄하고 거창하며 목적의식적인 놀이를 말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경계를 살짝 넘는 과장을 말한다. 슬쩍 쓸쩍 아슬아슬하게 경계지점을 넘나드는 과정으로써의 유희는 사실상 인간 혹은 생명체와 세계 혹은 사회화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 결정적 과정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상계>, <가상과 사건>등의 번역서로 알려진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는 생성으로써 정동의 발생과 역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왔다. 그의 다른 저서
'되기'로써의 "소용돌이" ● 신혜정은 스페이스몸미술관 기획에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다』란 타이틀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전시장에서는 우선 기본 형태(삼각형, 원형, 사각형)들이 제시된다. 형태들은 (비디오에서 나타나듯이) 제각각 서로 다른 개성과 정서의 존재들이다. 이들은 제멋대로의 작은 형태들로 주물된다. (전시장에 펼쳐진) 주물된 형태들은 불현듯 자신의 기원(갑자기 툭 던져진 모호한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초에 알려지지 않았고 결국엔 알 수 없는 것으로서의 또 다른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궁금해 하게 된다. 그리고 여행을 떠난다. 이들의 여행지는 어딘지 아슬아슬하기도 한 제목들 "마다스의 강", "혼자만의 벼랑"에서 보듯 어떤 불안을 암시함과 동시에 모험과 스릴을 연상시킨다. "야성의 숲"에 이르면 여행은 한층 스펙타클 해진다. 마치 이 여행이 다소 즉흥적인 것이라고 하듯이 전시장에 놓여 있는 형태들도 가만 보면 뭔가 제멋대로이며 즉흥적이다. 어떤 형태들로부터는 마술사처럼 주물하는 손이나 근육질의 발이 파생되어 나오고 있거나, 아니면 형태들 스스로 악기와 같은 연주 도구로 파생되고 있다. 형태들은 가상의 혹은 시간성 속에서 생명성을 획득하는 존재로 가정되고 있다. 애초의 비디오에서처럼 조물 주물 만들어진 작은 형태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시장의 그 어떤 형태도 비슷하지 않고 제각각이다. 이들이 펼쳐진 양태 또한 자유롭다. 형태들을 인간 혹은 생명들의 여타의 활동에 비유해보면, 아마도 때로 강박적으로 열심히 무엇을 했던, 장난처럼 무엇인가를 끄적였던, 유희적인 공동의 놀이 등 복합적인 경험과 체험의 과정을 공유하는 매개물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제각각의 파생된 형태들과 그들이 이루는 작은 공간은 관객들을 그 무대의 한 가운데 서게 한다. 관객들 또한 여기서 즉흥적으로 또 다른 자신만의 에피소드들을 파생시킬 수 있고, 제 각각 다른 상상과 경험들을 예상해보는 등의 상호 유희성의 매개체가 되고 있다.
전시 장소는 스페이스몸의 제 1전시장으로, 청주 시내의 한 복판에 있는 한 상가 건물의 지하이다. 서로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상가들이 어떤 필요, 혹은 어떤 기원을 갖고 즐비하게 군집해있다. 애초에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젠 기억나지 않거나 무의미해진 원인들이다. 빠른 개발을 거친 한국 어디나, 아니면 아시아의 어느 대도시나 이런 도시 거리가 있고, 이런 건물들은 마치 익명인 듯 무심하게 이웃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익명 속에서 건물들은 제각각의 말도 안 되는 측면들을 간직해 옴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버티고 있었던 시간동안 어이없는 개성의 표현들로 가득 차서는 실로 키득거릴 수 있는 일상성은 지속되었고, 때로 거대 부가 몰려드는 등 대단한 성취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거리를 조성하면서 지탱하고 있는 이 현장이란 시간에는 생명-인간의 고된 노고들과 노동들, 강박적 억압과 피로한 나눔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거리와 건물, 그리고 전시장조차도 싸늘하면서도 농후한 시간성을 담고 있다. 언제 어떻게 이런 건물들이, 이 도시 거리에 형성되었는지 보다는 이 농후한 느낌들과 제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우지끈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파편적 조우들을 양산시킨다. ● 마치 이러한 농후한 시간성은 '기원'을 찾아 떠나는 신혜정이 만든 형태들의 기억 속에도 깃들어 있다. 도시의 어딘가, 아니면 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의 언제부터인가 이들 형태들은 생겨났고, 환경 혹은 사회화의 관계 속에서 변화해왔다. 그리고 그들은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흔히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강박적 근대화의 잔재로써의 정체성의 혼란이라든가, 성공과 가족중심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한 배제의 메카니즘 속에서 어떤 트라우마를 경험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뭔가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 듯 하다. 경계 넘기는, 아슬아슬한 유희성 속에서 드러난다. 결코 힘을 들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딘지 노력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보다 자유롭고자 하며, 홀로가 아닌 채로 군집하여 파생해 나가고 있다.
한국사회에서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과연 다양한 각기 다른 삶의 모양새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마치 사회적 성을 '여성', '남성'으로만 이분화시키는게 익숙하듯이 여전히 획일적으로 다양성을 억압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게다가 아직도 한국사회 특유의 속도는 개인의 어떤 가치나 믿음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 윤리적 무게를 순식간에 치환시키고 소거해버리라고 내몬다. 그 와중에, 개인은 가분체화된(dividual) 체험들 속에서의 분열된 정서에 시달리며, 강박과 불안의 변주 속에서 삶을 지탱하고 있다고 할까. ● 강박적 근대화를 겪어온 한국에서 세대간 문화적 상이함과 충돌의 예만 보아도 아직까지도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측면들이 남아있음을 알 수는 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발생하는 어떤 유희-과장의 제스쳐들이 있다. 이 과장의 제스쳐들은 한때 '충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의 증상이다. 이제는 그것의 발현과 발생으로써의 즉흥이란 과정이 주목된다. 결코 단순치 않은 유희와 즉흥의 과정을 경유하면서 실시간적으로 접속, 조우하면서 파생되어 나가는 가분체화된 개체들의 상을 새롭게 상상해볼 수 있을까. ● 작가 신혜정만 하더라도 이러한 쉽지 않은 가분체적 조우 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시각예술 뿐 만 아니라 연극, 희곡, 매개자 활동 등 각종 매체들을 섭렵하면서 크고 작은 콜렉티브 예술 문화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매개를 해나가며 경계들을 슬쩍 슬쩍 넘어다니는 신혜정의 손길은 전시장의 그 어느 형태들도 똑같은 것으로 두지 않는다. 약간씩 삐뚤빼뚤한 바느질, 자유롭게 뻗어 나온 각기 다른 팔의 기럭지 또한 곧 뭔가가 지속적으로 '되기'로서의 과정이다. 이 오브제은 다른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서' 쭉쭉 늘리고, 경쾌하고 씩씩하게 발을 구르며, 굴러다니면서 다른 오브제들과 결합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면서 지속_파생을 알리고 있다.
다채로움이란 전체 ● 나딘 헨젤의 『무한 레이어 : 다양성에 대한 학습』은 '다양성'이 화두다. 그런데 여기서의 다양성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시간성 속에서 발현되고 드러나며 연속되는 것으로써의 다양성이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우선 스페이스몸의 제 2, 3전시장 중 '집' 공간에서는 식물을 소재로 한 다양한 드로잉들이 전시된다. 마치 식물도감을 보듯 여러 식물들이 기후대별 서식지별로 분류되어 있다. 드로잉은 주로 우연한 효과를 의도한 반투명한 실루엣 위주로 되어있다. 다른 전시장에는 레이스들로 만든 저고리 다섯 벌이 천정으로부터 대나무에 걸려 공중에 띄어져 있다. 이 저고리들은 작은 레이스 조각들을 이어 붙인 것으로 그것을 이루는 색과 채도가 다층적인 그라데이션(gradation)을 형성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비록 '레이스'라는 재료의 얇은 투과성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느낌을 준다.
이번 스페이스몸 개인전 직전까지도 한 인터내셔널 의류 회사에서 디자인을 했던 나딘 헨젤이 청주에서 개인전을 하게 된 계기는 바로 작년 청주 시립미술관의 국제 레지던시였다. 작가는 당시 레지던시 기간에 이뤄진 한국에서의 경험과 더불어 동료 작가들의 격려를 계기로 이번 전시를 준비할 수 있었다. 주로 그래픽으로 패턴작업을 해오던 그녀는 이번 전시에서는 보다 자유롭게 그리고 보다 직접적으로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원재료들을 갖고 수작업으로써 섬세하고 우연한 효과를 내게된다. 그래서 그래픽의 평면성과 추상성으로부터 탈피한 다층적인 드로잉과 오브제를 만들어내고, 나아가 생생한 느낌과 풍부한 시간성을 전달하게 된다. ● 작년 레지던시 후 발표한 전시에서 나딘 헨젤은 사진 작업과 그에 바탕한 패턴-해먹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도 물론 색-조각들의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되는데, 이때 작용한 미적 실현은 한국에 거주하고 계신 이모댁 방문이 계기였다. 이모댁 방문 당시 나딘은 이모의 옷장에 있던 이불을 보았는데, 그 이불보는 사실 그간 이모가 모아온 형형색색의 보자기들을 직조한 것이었다. 나딘이 본 색들은 짐작컨데 오방색의 강렬한 것에서부터 현대적인 파스텔톤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변화들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모가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짜오신 이불보들의 패턴은 다양한 색채들의 강렬한 대조와 그라데이션으로 역동하고 있었기에, 이미 패턴작업에 익숙하였던 작가에게 이 시각적 매료됨은 생동감과 역동감이라는 미적 충격이 된 것이다. ● 한국 방문으로부터 받은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이번 전시를 준비한 나딘 헨젤은 우선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보다 다양한 색채들의 패브릭에 관심을 두었다. 작가는 주로 동대문에서 다양한 색들의 여러 종류의 레이스 조각들을 모았고, 이것으로 다섯 벌의 저고리를 직조하였다. 조각보가 남는 천 조각들을 모아 붙여놓은 다양한 색깔들의 패턴이듯이, 크게는 다섯 색깔의 패턴으로 하나의 군집으로써의 저고리를 만들었다. 하나씩 색의 계열을 이루는 저고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매 조각들마다 각기 다른 문양임을, 또한 이것이 섬세하게 배치되어 점진적인 색의 변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미묘한 색의 변화들이 실로 변화무쌍한 풍부함을 양산해낸다.
다른 전시장에서는 세계의 여러 기후대별로 서식하는 식물들의 그 각기 다른 모양을 실루엣으로 드로잉하고, 그 학명들을 각각 독일어, 스웨덴 어, 한국어로 기입하여 배치하였다. 맞춤법이 틀린 한국어를 보는 재미도 있지만, 왜 이 세 지역이 같이 묶였는지를 듣다보면, 나딘 개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버지는 독일인이고 어머니는 일찍이 재독간호사로 이주해 가신 한국인이다. 독일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나딘에게 한국의 경험은 바로 어머니 덕택에 비롯된 것이다. 현재는 스웨덴에 거주하고 있는 나딘은 모국어인 독일어와, 어머니의 고향의 언어인 한국어, 그리고 일을 하며 거주하고 있는 스웨덴어를 사용한다. 전시장에서의 교차시킴 배치법은 이러한 작가 자신의 사용언어와 기원과 출생, 이주의 과정을 서식지별 식물들의 일대기와 상호적으로 교차시켜서 배치한 것이다.
꽃잎과 잎사귀들의 레이어들 또한 얇은 그라데이션과 번짐 효과가 눈에 띈다. 저고리 작업에서 보았던, 섬세하게 직조된 레이스들이 전체적으로 효과로 양산해낸 다양하고 풍부한 색채들, 그것이 군집하여 '저고리'라는 계열들의 총체성을 띄게 됨을 상기해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서식지별 식물들을 상호 교차 배치한 이 전시장에서는 우선 하나하나의 꽃잎과 잎들, 가느다란 줄기들을 차분히 보게 되고 그것이 서로 각기 다른 서식지로부터 자라나면서 다양한 형태들과 미묘한 색감들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자세히 보면 볼수록 매우 다른 개성들의 존재이면서도 생명력을 획득해온 그 생명 전체로써 복합적인 레이어들과 '식물'-'언어'라는 하나의 집합-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생명의 특성과 현대의 빈번한 이주의 삶을 반영한다. 생명은 물론 제각각 다른 지역, 다른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소멸한다. 그러나 어떤 전체-세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공유한다. 인간이건, 식물이건 각기 서로 다른 색깔과 성격, 스타일, 심지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면서도 전체 세계의 진화의 과정 한 가운데 공존한다.
상호성이라는 운동 속에서 변형되는 생명체 ● 생물학자인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애초의 생명의 발단인 미생물의 광합성과 산화과정을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다윈식의 진화설을 보완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미생물이란 미시 존재로부터 실로 놀라운 차원의 진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진화를 담당하는 생명체의 기본 세포인 미토콘드리아만 하여도 얼마나 대단한 생명체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다른 박테리아들을 잡아먹는 박테리오파지는 유전물질을 저장할 수 있기에 기억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 저장소들을 전이받고 공유해온 우리 몸은 전 지구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고 하기까지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확장된 이야기 속에서 우리 몸, 나아가 생명체와 생명현상을 생각하다보면 광범위하여 다소 신비하게 들리기 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실상 매우 구체적인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세포차원의 구체성이 계산불가능한 시간성과 공간성으로 확장되어간다는 점이다.
현대의 이주는 한편으로는 정치적, 문화적 문제와 충돌, 갈등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주의 과정이란 저마다 다른 서식지로부터 배태된 서로 다른 풍토성이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진화해나가는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나딘 헨젤은 아마도 이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풍부함과 그 생동감이라는 특질을 전해주고 있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생명과 공존, 생명들의 다양한 삶과 그것의 이주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작가들의 미학적 태도가 휴머니즘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는 어떤 지점에 있게 되는 것일까. 일단은 포용적이면서도 지속성이 강조된다는 점을 주목해볼 수 있다. ● 가령 이성적, 논리적 판단 속에서는 흔히 직감이라든가 무의식의 차원에서의 판단과 행위들을 불완전한 것이라 하여 잘 주목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생명의 고유한 활동들이기도 한 어리석거나 아니면 망상적이라고 불리기도 한 판단들, 혹은 미신적인 것, 예외적인 것, 병리적인 것, 불가사이한 것으로 여겨진 영역은 고집스럽게도 생명의 중요 특질이 되어왔다. 그리고 이들은 때로 어떠한 문제가 없어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발생하는 여러 중요한 현상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즉 이러한 직관적 차원, 무의식과 비언어적인 차원은 '시간' 속에서 분명한 무엇인가로, 즉 명확한 근거 없이도 확실성을 주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가치 판단을 하게 하고, 나아가 사회적, 정치적 차원의 정서적 행위를 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흔히 포스트 휴머니즘의 시대라고 하는 지금의 현대 과학 또한 그 '계산 불가능성', '불확정성'에 대해서 미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과학과 미학들은 생명체들의 기원과 역사, 생명체 자체의 의미나 규정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재고하고 있다. 그래서 생명 자체를 확장된 장, 확장된 역사인식과 환경에서 재정의하기를 요청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근대기 분리적이고 인간중심적이었던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까지도 촉구하기까지 한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개별 생명체들의 자율성과 다양성에 다시 주목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업들에 대해서도 좀 더 확장된 시각을 가져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근대적 인간, 즉 억압되고 다양성에 대한 상호 존중을 배제해온 '인간'이란 존재는 그간 이에 맞서, 특히 예술에서 개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을 증진시키자는 차원을 역설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거기에서 나아가 인간을 비롯한 여타의 생명체들의 의도치 않은 조우들이 돌출되는 측면을 포용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나딘 헨젤의 조우 속에서 무한하게 증식하는 것으로서의 패턴의 그라디에이션 또한 일종의 의도라는 영역에서 벗어난, 의식의 영역 바깥으로 확장된 차원에서 생명들의 운동과 상호성의 측면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 생명체의 공생과정은 어쩌면 폭력을 핵심에 두는 적자생존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상호 존중에 바탕한 지속적인 운동과 그 환경에 비유할 수 있다. 작가이자 현재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상호성에 바탕한 콜렉티브 성격의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에린 매닝(Erin Manning)은 저서 『politics of touch:sense, movement, sovereignty』 (Minesota university press, 2007)에서 탱고에 비유하여 접촉(touch)로 인해 상호적으로 발생하는 움직임 혹은 운동을 설명한다. 생명체의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발생의 측면에서 볼 때, 에린 매닝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상호성이란 것은 운동의 연속과 지속이란 점이다. 끊임없이 어떤 것이 되어가는 것으로써의 세계는 형성해나가는 과정자체로 설명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생명체의 변화 혹은 진화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세계는 환경 혹은 타자와의 상호 터치로부터 즉흥적으로 야기되는 발생을 통해 다른 차원을 매개해내게 된다. 즉 이러한 발생이란 양태는 미리 규정하고 미리 매개해 버리는 것으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움직이는 생명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는 호흡과 작용 속에서 이뤄지는 교환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환경이란 이러한 공동체로서의 생명 현상과 그 운동의 전체임을 추측케 한다. ■ 이병희
Vol.20180513d | 이주(移駐)의 기억-원과 형-신혜정_나딘 헨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