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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51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02:00pm~06:00pm / 일요일 휴관
아터테인 스테이지 ARTERTAIN stage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717-14번지 Tel. +82.(0)2.6160.8445 www.artertain.com
그가 처음으로 하루를 살면서 만들어 내는 쓰레기들을 뒤졌을 때, 그것은 그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의 집합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과 안 맞았던 것들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아예 그의 일상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 버려지고 쓰레기가 되었다. 그 수집을 통해 그는 적어도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아니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적어도 어떤 방향성 정도는 찾을 수 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가 모았던 것들은 어쩌면 그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의 잉여였으니까.
수집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집착은 삶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면 삶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 수집이라는 건데. 과연 수집은 누가 하는 걸까. 또한, 수집은 그 어떤 창작을 위한 개념도, 수집 주체가 지니는 조형적 언어도 가질 수 없는 지극히 일반적인 기억이나 경험을 담보하고 있는 것들의 저장 행위다. 물론, 수집은 우리의 기억과 경험을 넘어 역사적인 순간까지 담고 있는 그 무엇들에 대해 의미와 가치를 두는 행위인 것도 사실이긴 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자신의 삶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완벽하게 기억해 낼 수 있는 매개가 될 수 도 있는 것들. 우린 그러한 것들을 수집하면서 우리 삶에 필요한 나름의 위안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박광선 작가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화면을 직접 만드는 작업을 한다. 캔버스와 같은 전통적인 재료는 그의 삶을 표현하기에는 좀 너무 매끄러웠다고 작가 스스로 이야기 하듯이, 그의 경험과 삶의 질곡을 담기에는 적어도 그의 삶만큼의 무언가는 지녀야 하지 않았을까 고민했던 것 같다. 그것이 거칠었던 유년의 경험이었든 작업에 대해 의지를 넘어 투지에 가깝게 고민했던 것들이었든 우선, 화면이 그 모든 것들을 받아 들일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야 했던 것 같다. 해서 그가 택한 것이 합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위에서 얘기한 수집 행위였다. 그 수집 행위를 통해 작가는 그의 일상의 기억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합판은 그에게 거칠지만 친근한 화면이다. 그의 의지대로 얼마든지 화면의 형태를 만들 수 있었다. 부수거나 찢거나 뜯어내면서 그의 주변 인물들을 표현했다. 여기서 그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조형언어는 부수거나 찢거나 뜯어내는 행위다. 어떠한 화면이 그에게 그러한 파괴의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파괴는 창작행위와는 전혀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현대 미니멀한 추상계열의 작품들은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화면 위에 보여지는 것들을 가장 최소화했다면 박광선 작가의 화면 파괴행위는 애초 주워진 틀 자체에 대한 비판과 재해석인 것이다. 지우는 것으로 그리는 행위를 최소화하여 회화의 순수성을 담보한 것이 현대회화의 중요한 이슈였다면, 애초에 재현될 것들을 위해 부숴지고 찢어진 그의 화면은 회화의 표현적 욕망을 더욱 더 강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현대 사회의 모순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한다. 현대 사회의 모순. 과연 그것이 거대 담론화 되어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사회는 작은 단위로 나, 개인의 의미로부터 더 구체화된다. 내가 보는 것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얻는 정보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직장, 학교, 회사, 등등에서 겪는 일상의 일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들에서 느끼는 모순은 어쩌면 지극히 나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나의 문제가 너의 문제와 연결되고 그 문제들이 담론화되어 사회적 문제로 확장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나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여러 다양한 모습의 사회적 모순과는 어쩌면 너무 거리가 먼 것 같다는 것이다.
작가의 이 사회의 모순은 개발중심 혹은 발전중심의 논리에서 망가져가는 우리의 인간적인 정서에서 찾는 듯 하다. 그가 지금의 작업실로 와서 처음 했던 것이 그의 유년에 늘 봐왔던 밭을 일구는 일이었다. 물론, 그 일을 업으로 삼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잠깐이나마 그 일로 인해 떠올랐던 유년의 기억들을 통해 그는 이 사회를 바라보는 나름의 잣대를 만들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유년은 한강 주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강 지역이 개발되면서 그 유년의 기억들은 개발 중심의 논리, 발전 중심의 논리로 이루어진 도시 생활 속에서 사라져갔다. 밭을 일구면서 그가 본 것은 생명이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비가 날고, 얼었던 땅을 헤집고 올라오는 싹들. 유년에는 늘 당연했던 것들이 갑자기 너무나 신비해진 것이었다. 생명이었다. 그리고 에너지였다.
일상을 살기 위해 소비하고 발전과 개발의 논리에 의해 생산되는 모든 것들이 생명에서 오고 있다는 것. 그는 그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해서 그는 자신이 살면서 쓰고 버리는 것들을 생명의 형태로 바꿔 채집본을 만들었다. 우리가 늘 쓰고 버리는 것들이 생명의 형태로, 에너지의 형태로 다시 수집되었다. 마치 곤충을 채집하듯. 어쩌면 우리로부터 버려진 것들은 우리의 생명과 에너지를 떼내어 가는 것은 아닐까. 그것들을 다시 잘 모아보면 우리가 버렸던 우리의 삶의 에너지, 인간적 정서의 근본인 생명에 대해 좀 더 진지해 질 수 있는 것 아닐까. ■ 임대식
Vol.20180513c | 박광선展 / PARKGWANGSUN / 朴光善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