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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크래프트베이스
관람시간 / 11:00am~11:00pm / 일,월요일_11:00am~06:00pm
시대여관 SIDAEYEOGWAN 서울 종로구 종로46가길 13(창신동 461-2번지) Tel. 070.4239.0713
육효진의 '쪽방프로젝트'-자본주의 시대 '삶의 값'을 묻다 - #집+자본주의+새로운 계급사회 ●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했던가.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 만물의 창조자인 조물주가 아니라 건물주이다. 더 이상 사회적 사다리가 존재하지 않는 구조에서 '건물'은 동아줄과 진배없다. 번듯한 건물 한 채를 소유하면 무위도식(無爲徒食)할 수 있고, 직장에 처박혀 온갖 굴욕을 감내하는 노예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 성공과 물질이란 키워드가 삶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우리 사회에서 '건물 한 채'의 의미는 이처럼 남다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는 분명 풍자적 표현임에도 자본주의 색 짙은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그 자체로 '수단'의 지위에서 '목적' 자체가 되어 버린 돈을 가리키며, 한국 상위 1%가 전체 토지의 46%를 보유하고 국민의 절반 가까운 44%가 무주택자인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만큼 대한민국에서 건물이란 땅과 함께 부의 상징이면서 계층화가 심화되고 있는 동시대를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는 기호이다. 1) ● 작가 육효진의 작업은 물질의 환대를 직시한다. '시대여관' 2) 이라는 옛 흔적 고스란히 밴 기억과 쟁점의 공간에서 건물과 자본의 관계를 살핀다. 조타와 방향이 다른 듯 크게 구분되지 않는 현재의 모더니티와 혼란한 삶을 들춰낸다는 것도 눈에 띄는 지점이다. 특히 전시공간이 된 '시대여관'은 실재라는 반공상성과 그 실재를 좆느라 참됨과 진리를 희생시키는 헛헛한 삶의 무대이고, 구석구석 똬리 튼 작품들은 개념적, 물리적 시공을 잇는 매개이자 오늘을 돌아보게 만드는 반사체이다.
육효진은 세워진지 반세기도 넘은 이 낡고 허름한 공간에 흡사 창문처럼 생긴 오브제를 들여 놓음으로써 현재와 과거를 잇는다. 오래 전 절박한 심정으로 머물다 간 사람들과 역시 생존의 기로에서 붙박이처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을 아우르지만 스쳐가거나 머무르는 원인은 다르다. '시대여관'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엔 대개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들이 거주했다면, 지금의 '시대여관'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계급주의에 밀려난 이들이다. ● 육효진은 '시대여관'을 하나의 시대적 표상 3) 으로 보고 그 내부에 심각하나 내가 아니기에 무관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공간에 비해 말끔히 정돈된 채 우아하게 자릴 잡은 작품들은 매우 이질적이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그것들은 감춰져 있으나 필시 존재했던 역사를 대리하며, 자연채광과 소금, 금빛 작품을 이용해 멈추고 사라질 환경에 생기와 희망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은 시공의 거리감을 없앤 채 근사하게 호흡한다. 그야말로 공간은 받아들이고 작품은 내뱉는다. 4) ● 육효진이 이처럼 자본주의와 계층의 심화,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해 되묻는 주제를 선택한 건 작가 자신이 겪은 경험이 '시대여관'을 통해 적절히 반응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시원에 거주한 경험이 있던 작가는 창문을 통해 과거의 쪽방과 현재 대한민국의 쪽방인 고시원의 물리적 간극을 확인한다. 5) ● 그것은 창의 유무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는 것이었고, 그 가격에 의해 삶의 질도 다를 수 있음을 말한다. 돈이 없으면 살아감에 있어 최소한의 조건조차 갖출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을 화려한 금빛으로 은유하지만, 제 기능을 잃어버린 공간처럼 상실과 허망함이 동시에 녹아 있음 역시 엿볼 수 있다. 허나 '시대여관'의 방마다 들어찬 그 많은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자본주의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삶의 값'과 다름 아니다. 즉 사람은 없고 오로지 '값'으로 매겨지는 사회구조의 문제화라는 것이다. 이것이 '쪽방프로젝트'의 주요 개념이다. 6)
#공간+시간+기호+관계 ●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공간이다. 육효진이 의도적으로 염두에 둔 이 공간은 크게 실제의 공간과 기호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진다. 실제의 공간은 '시대여관'을 포함해 창신동마을과 그 내부에서 살아가는, 움직이는 유무형의 것들까지 포함한다. 기호의 공간은 '금빛 문', '판도라의 상자' 등에서 읽히는 텍스트 혹은 문맥으로써의 공간이다. 가시적인 것보단 행간에 방점이 있는 공간이 기호의 공간인 셈이다. ● 실제의 공간은 작품으로 인해 일종의 매트릭스 내에서 기호로 해석되고, 해석된 기호는 다른 기호로 대치된다. 기호는 실제를 대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실제와 동일성을 나누지는 못한다. 앞서 말한 '이질감'이 배어나오는 것도 같은 연유다. 그럼에도 작품과 공간이 수평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시간 때문이다. ● 실제의 공간과 기호의 공간을 연결하는 건 시간이다. 시간은 '시대여관'의 물리적 역사를 담보하지만 실상은 텍스트 혹은 문맥으로써의 기호가 확대 재생산되거나 자기 증식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기호의 연쇄확장-자가 증식이라 불러도 된다. 그러나 실제와 기호의 공간은 시간이라는 저울에 놓이는 순간 어둡고 탁한 현재를 반추함과 더불어 황금빛 프레임으로 역전을 꾀하는 동시성을 잉태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또한 공간과 작품 사이에 놓인 시간이 관여한 결과다. ● 작가는 공간과 작품 내에서의 시간을 짙은 기억의 잔류-보존의 메타포인 '소금'으로 증거 한다. 소금은 환경에 의해 얼마 후 증발될지라도 공간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 잔상을 남길 소재다. 그건 곧 눈에서 사라질 처지지만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마치 거대한 도시가 오늘의 인간 삶의 전부인 냥 비춰지나 그 이면에는 기억해야할 것들, 살펴야할 것들, 눈여겨봐야할 것들, 공유해야할 것들이 적지 않음과 같다.
작품 일부에 유리를 깔아 단절된 역사를 소환하도록 한 것도 공간과 작품을 일체화하는 시간을 끌어들이기 위함이다. 몇몇 작품은 거대하거나 적절히 작고 또 어느 것은 다분히 추상적인 반면 일부 작품은 집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데 이 역시 동일한 논리 아래 설치되었다. 작가는 이에 대해 공간의 기억유지와 빛을 넣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선택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의미를 점령하는 명사는 시간이다. 물론 그 시간을 이용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건 공간자체가 아니라 집과 사회적 구조 간 관계성에 대한 질문이다. 값의 경계, 구조의 경계, 계층의 경계 등과 같은 질문 말이다. ● 재밌는 건 작가의 의도가 어찌되었든 관람객들은 복잡한 전시공간을 거닐며 자연스럽게 시공간을 넘나드는 탈영역화를 체감하고, 질서를 발견한다는 점이다.(질서는 작품들의 패턴에서도 읽힌다) 궁극적으론 현존성에 관한 자문을 비롯해, 시대를 관통하는 이미지들과 마주하고, 운이 좋다면('관계의 변태'를 다룬 그의 퍼포먼스까지 관람했을 경우) 경계와 구분과 차이와 다름과 간극을 지정하고 있는 육효진의 내레이션을 들을 수도 있다. ● 그렇다면 스스로 말하고 있는 일부 작품을 살펴보자. 우선 「금빛 문」(2017~) 연작은 크기가 제 각각인데다 입체, 부조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작가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내면의식과 외부와의 소통, 주체와 타자 간 상호성의 문제를 거론한다. 역사와 상황, 현상, 사건들이 들어있고 현재와 미래, 절망과 희망이 뒤범벅되어 있다. ● 근작 가운데 「판도라의 상자」(2017~)는 문명적 삶과 그 삶들의 조합, 공간성과 더불어 '공소(空所)'의 배경, 상자 맨 밑바닥에 있던 '희망'을 공유한다. 여기서 희망은 관람자마다 개별적일 수밖에 없고, 저마다 가치도 다르지만, 시간의 얼개에 따라 현재의 시간에서 파편화된다는 공통점은 있다. 그건 작가에 의해 선택되어진 여러 기호들로부터 빚어진 최종의 메시지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때부터 인간이 온갖 불행을 겪으며 살게 되었다면, 이젠 멈춰도 되지 않느냐는 주문-절망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인위적으로라도 채우거나 투사하고픈 작가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예술의 역할+사회적 담론 ● 하늘이 뻥 뚫린 공간에 놓인 거울과 창문형태로 매달린 오브제, 공동세면장에 설치된 LED,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로 명명된 육중한 철판 등, 육효진의 작품들은 공간과 시간을 연계한 작업으로, 체계적-즉흥적-임시적 상황을 연출해 우리 사회에 놓인 구조와 이면, 관계를 짚어낸다. 7) ● 이 작품들은 저마다 결이 다르지만 공간과 시간에 관한 작가 사고의 복제 또는 자가 분열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한편으론 시공의 변주와 맞물려 끊임없이 침묵의 사유를 찾아내려는 작가의 노력을 담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실상 관계(역사적, 인간적, 사회적 조건 내에서의 다양한 관계, 그리고 외적으로 비춰지는 작가 자신과 또 다른 실제로써의 작가 자신과의 조우까지 포박한다)의 밑그림이면서도 실존에 관한 자문이다. 싫든 좋든 실존이란 결국 타자에 의해 증명되지 않던가. ● 따라서 금빛 프레임과 「판도라의 상자」 등은 시각 외, 다양하게 수용되어야 하는 '열린 가능성'을 시사 한 장치이며, 우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건물과 작품을 통해 일상 속 잊혔던 부분을 탐색하는 작품들이다. 8)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보는 이들은 평소와 다른 관념과 인지, 개념에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간과 작품, 그리고 시간이 개입된 상태를 효과적으로 숙지한다면 그 안에 담긴 사회적 의미들을 일깨울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 한편 육효진의 작업은 하나의 공간 속에서 병렬-중첩됨으로써 기존 시각적 체계는 약해지는 대신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는 얽기 설기 뼈대만 남은 건물이 특정 짓는 구분, 제지, 차단이라는 시간의 법칙이 작동한 탓도 있지만 작품이 선사하는 양립불가능성(이질적이면서 조화로운 상태)이 만든 결과다. 이 양립불가능성을 확장하면 바로 우리네 삶에서 익히 마주하는, 다시 말해 상치되고 대립하며 조화로운 성격을 지닌 자웅동체와 같은 의미론적 시스템과 결이 같다.
육효진 작업의 또 다른 특징은 개인의 카테고리를 벗어나 사회적 담론으로써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필자는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예술이 자기 안위적 읍소와 사적 소회에 머문다면 예술의 역할을 스스로 축소하는 꼴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즉 그의 작품이 자기 완결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자신만의 독립된 공간에서 이탈해 일상, 나와 우리라는 공동체, 그 삶 속으로 들어섰고 미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예술이 우리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예술가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하는지를 읽도록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 이제 그의 작업은 아무도 듣지 않을 소모적 영역에서 벗어나 당대의 우리 삶에 주목한 채 장소에 따른 대상의 지위와 감각이 달라지는 공간의 맥락성 9) 을 다룬다. '나'라는 자아의식이 탈각된 건 아니겠지만, 작품이 생활 장소로 '위치'를 옮겼을 때 그 성격과 의미가 달라진다는 공공의식의 확산을 엿보게 한다는 점은 과거 작품 대비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 그래서일까, 이번 '시대여관'에서의 작품전은 작품이 놓이는 장소와 사물에 대한 자각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 미술의 사회적 기능 10) 이 돋보인다는 것에서 주목할 만하다. 11) 특히 자신의 경험과 문화적, 물리적 측면으로의 소통과 함께 장소 특정성과 무형의 시간성마저 표현의 범주에 넣고 있음은 확실히 진일보 했다. 시간, 공간, 관계성을 함유한 여러 종류의 표상체와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삶, 공통의 공간에서의 불현 듯 깨닫는 인지각적 관점에서의 서술 등은 '관계'자체에 관한 고민에 치중하거나 조형화한 작업 대비 명징한 족적을 보여준다. 12) ■ 홍경한
* 각주 1) 청소년들의 장래 꿈이 건물주라고 할 만큼 한국에서 건물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단순히 추위와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공간이 아닌 것이다. 아파트라면 그것의 평수가 얼마나 되고 어떤 브랜드인지, 자기 소유인지 임대인지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 자본주의 시대가 만든 새로운 신분에 가깝다. 2) 창신동 쪽방촌 중심에 자리 잡은 '시대여관'은 일제 강점기 이후인 1940년대 세워져 50년대 동란을 피해 피난을 왔던 이들의 숙소로 활용된 과거사를 갖고 있다. 곧 허물어질 듯한 외관과 벽을 이탈한 벽지의 두께가 세월의 깊이를 보여준다. 3) 다 쓰러져가는 공간은 주변의 위용에 찬 건축물들과 대비되면서 작가의 메시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육효진은 건물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시대여관이란 공간에서의 작품전은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역사, 사람, 오늘의 시간과 환경자체를 연결하기 위한 몸짓이다. 4) 일례로 2층에 설치된 작품 중 일부는 천공과 거울의 반사로 실재를 재현한다. 이 공간에서의 작품은 다양하고 복잡한 현세에서 스스로조차 세상의 일부가 되어 갈등하고 경계 지으며 혼란을 덧대는 장치로 기능한다. 5)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거주의 열람을 허락하려 한 「Correspondence」(2010~) 시리즈도 그 일부이다. 6) 이에 대해 작가 또한 동일한 생각을 하는 듯싶다. 그는 자신의 작가노트에 "겨우 몸을 뉘일 수 있는 한 평 남짓한 곳에서의 작은 창은 거주하는 이의 숨구멍이자 바깥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최소한의 연결고리이다. 하지만 그 좁쌀만 한 창에 매겨지는 값은 자본주의 사회의 '값'에 대한 상징과 다름 아니다. 그것은 곧 신분이고 위치이며 자리이다."고 적고 있다. 매우 명확한 시선이고, 그 시선은 엄연한 현재를 반영한다. 그래서 금빛 화려함을 뒤로 물리고 나면 왠지 마음이 아프고 쓰리다. 7) 작가는 과거에도 「외로운 현대인의 자화상」(2015) 시리즈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탐욕」(2009) 연작으로 유사한 주제의식을 내보여 왔다. 8) 기존 화이트큐브가 아닌 '시대여관'이라는 공간과 썩 조화롭게 호흡하기에 여운도 크다. 9)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사회 구성원의 기억과 쟁점, 삶의 맥락을 말한다. 물론 육효진의 작업은 특정 프로젝트를 수용한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감상하는 간접 경험을 대중에게 제공하는 범주에 있기에 향후엔 대중이 작품의 주체로써 직접적인 참여가 가능한 방향으로의 전환도 생각해볼 만하다. 10) 미술의 사회적 기능이 부각되고 있다는 건 미술 혹은 미술적인 것들이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직간접적 관계를 통해 사회적 혹은 물리적 환경의 개선을 넘어 '더 나은 삶, 가치 있는 공동체'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11) 육효진의 작업은 과거 대비 훨씬 넓은 확장성을 지닌다. 이번 '시대여관' 전시에 출품된 작품에서 알 수 있듯 공간을 한층 더 새롭게 구조화하는 방향에서 설정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 육효진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텍스트화하며 적극적으로 탈분야화 한다는 점이다. 그는 장소특정적, 역사적, 문화적 표상으로 경계를 구체화하고, 교차시키며 탈영토화, 위반, 초월, 탈주 등의 개념을 공존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의 무게를 덧대고 있다.
Vol.20180504j | 육효진展 / YOOKHYOJIN / 陸孝眞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