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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예술공간 수애뇨339 SUEÑO 339 서울 종로구 평창길 339 Tel. +82.(0)2.379.2970 sueno339.com
임창민의 미동하는 시적 시공간 ● 임창민은 이질적인 동영상과 정지화상의 이미지를 합성하여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로운 리얼리티를 통합해 내었다. 세상에는 가상현실이나 위조된 리얼리티에 대한 걱정도 많지만, 그의 작품에 대해 "미동(微動)하는 시(詩)적 시공간"이라는 말은 매우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임창민은 정지화상(=사진)과 동영상을 결합하여 정적인 실내공간을 연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사진 속 공간은 로비, 호텔 스위트룸, 기차, 오래된 대학의 복도 등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과 시선이 머물렀던 장소들이고, 여기에 창문을 통해 주로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끌어들인다. 그 풍경은 모니터를 정교하게 삽입시켜 보여주는 동영상이지만 마치 벽에 걸린 그림이거나 시간이 정지된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 장면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각문화적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회화는 자연을 향해 열려진 창문'이라 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화가 L. B. 알베르티 식의 이해도 그러하지만, 중국식 정원에서 즐겨 구사하였던 차경(借景, appropriative landscape), 지중해 양식의 건축물의 창문, 문인(文人)의 방에 걸린 도원경(桃源境)의 그림 같은 문맥이다. 그리고 그 장소가 도서관이든 로비이든 호텔이든 여행지이든 그 문맥의 본질적인 속성은 별로 다르지 않을 성 싶다. 실내=방은 자아(自我)의 성(城)과 같은 곳이다. 그곳은 인간의 생존을 온전히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든 물리적, 심리적 장치이다. 그러니까 이 작가의 카메라가 서 있는 곳은 바로 자신의 방이자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실내는 바로 자신이 담겨있고 존재하는 (자신의) 신체의 은유이고, 창문은 눈의 은유이다.
'미디어는 인간을 외적으로 확장한 결과'라는 마샬 맥루한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방은 신체의 외적 투영이고, 인간이 외부와의 접촉을 끝내고 돌아와 쉬거나 잠자거나 은거하는 자신의 껍질이다. 마치 우리의 의식이 신체내부에서 눈 혹은 다른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와 만나듯, 이 작품에서는 이 마음의 주인이 창문을 통해 풍경을 받아들인다. ● 비오는 창밖을 현실저편의 풍경으로 객관화할 수 있는 안온한 실내, 외부의 풍경을 안으로 끌여들여 경관을 조합하는 차경(差境), 그리고 이 작품들 중에 "서운만정(瑞雲滿庭 : 집안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함), 수시처중(隨時處中 : 중용을 지킴)하고 견지아조(堅持雅操 : 바른 지조를 견지하라)"는 좌우명을 쓴 편액이 걸려있는, (아마도) 사대부가의 실내라고 짐작되는 그 곳이 그 장소의 정체성을 가장 대표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 사실, 이와 같은 인식의 틀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많은 비유가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꽁꽁 묶인 채, 지하동굴에서 벽만 보고 사는 죄수가 자신의 등 뒤 위쪽에서 타오르는 횃불에 비추인 그림자만 보고, 그 그림자를 사물의 실재로 착각하며 산다는 동굴의 우화(플라톤)는 이제는 다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플라톤은 그 동굴의 죄수가 '사물의 그림자를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고집'한다고 한탄하였지만 우리는 늘 그 어두운 방을 통해서 그 방으로 들어온 이미지로부터 세상을 읽어나가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으로, 그리고 각종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고 느낀다. 흔히 육안으로 보는 세계상을 '원본'이라고 치고, 미디어를 통해 보는 세상을 가짜현실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어떤 때는 그 반대가 진실일 때도 있다. 미디어를 통해서 보는 '매개된 현실'은 원래의 '리얼리티'가 미디어 특유의 속성에 의해, 또는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태도에 의해 매개된 결과일 것이기 때문이다. ● 사진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가 우리 신체의 안구(眼球)와 같은 '어두운 방'이라는 사실도 참으로 반추해 볼만하지만, 그 어두운 방(=안구)인 눈의 수정체를 통해, 역시 어두운 방인 카메라의 렌즈를 경과하고, 그 끝이 다시 (어두운) 방에서 창을 통해 바깥에서 오는 빛으로 세상을 본다는 시각의 리얼리티, 또 다른 식으로 보자면 '눈'에서 '신체'를 거쳐 '방'으로 이어지는 3중의 껍질을 연결하는 창(窓), 이 모든 장치의 연쇄에 의해 풍경과 마음이 만난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일깨워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들에서 창밖의 풍경은 한마디로 성소(聖所)라고 할 수 있다. 서방정토(西方淨土)나 에덴동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늘 가꾸는 내 집의 정원도 아니고, 특별히 좋은 경관이나 바다, 설경(雪景), 삼림(森林)와 같이 작가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경관이며, 그것을 담을 가장 적절한 시간과 조우하기 위해 작가는 같은 장소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찾기도 한다. ● 그러나 이 '창밖의 풍경'이 이 작품에서 오묘한 동력을 얻게 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안과 밖의 심리적 경계가 애매해 지면서 인식의 역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칸트를 인용하였지만 '시간이 내적으로, 공간은 외적으로 지각'된다. 그런데 임창민의 작품에선 밖에 있는 풍경이 동영상 즉 현재진행형인 시간으로, 안에 있는 실내가 정지화상 즉 고정된 공간으로 처리되어 있고, 둘 사이는 매우 정교하게 봉합되어 있으며, 동영상은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가장(假裝)하거나 최소한의 움직임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창밖 풍경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변화는 실내풍경의 고정공간에 동결된 시간에 미세한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계무너뜨리기에 의해 이 풍경은 현실의 것도 기억도 아닌, 아니 둘 모두의 통합상(統合像)으로 변형된다.
기본적으로 사진을 출발점으로 하는 임창민의 작업에서, 시간은 실내풍경에 삽입된 모니터=창문에서, 즉 주로 외적(外的)으로 연출된다. 여기서 창문의 프레임은 실내의 시간이 동결(凍結)된 실내공간과 반대로 시간이 살아있는 실외공간의 경계선이 되고, 이 대비는 관객의 뇌(腦)에 미묘한 인식의 놀이를 제공한다. '시간이 외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것은 공간이 내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던 I. 칸트의 통찰과 대비시켜보면 조금 더 재미있게 보일 것이다. ■ 이원곤
Vol.20180502h | 임창민展 / LIMCHANGMIN / 林昌敏 / photography.vid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