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와 무게

엄민희展 / EOMMINHEE / 嚴敏姬 / painting   2018_0501 ▶ 2018_0512 / 월요일 휴관

엄민희_유리조각_캔버스에 유채_60×145cm_201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갤러리175_한국예술종합학교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175 Gallery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0)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관계의 껍질 ● 그리는 자에게 대상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어떠한 대상이 소재로 선택되는 것은 온전히 그리는 자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당신이 골목길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주워본 적이 있다면 한 번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봐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이나 꿈, 혹은 먼 기억으로부터 어떤 신호를 받아서일 수도 있고 그 나뭇가지의 색이나 질감, 그것을 감싸고 있는 공간이 당신의 감각을 자극해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날씨가 좋아서, 뭐가 되었든 빈 화병에 꽂을만한 것이 필요해서, 그날따라 유난히 연민의 감정이 섬세하게 작동해서, 같은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한 대상이 충분히 당신의 관심을 끌었다면 이미 그것과의 관계는 시작된 것이다.

엄민희_나무껍질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7
엄민희_나무껍질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18

엄민희의 작업은 그녀가 어떤 대상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죽은 새, 석류, 나뭇가지 같은 정물일 수도 있고 항상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이나 산책 중에 우연히 마주친 한 장면일 수도 있다. 그녀는 어떤 감정적, 경험적, 감각적 끌림에 의해 대상을 선택하고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그녀는 이 공들인 시간 속에서 그리는 대상의 상태를 주로 촉각적으로 인식한다. 마치 섬세한 손끝으로 표면을 쓰다듬듯이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와 대상은 손끝과 만져진 표면과의 관계처럼 보다 직접적인 것이 되고 이러한 부딪힘이 그녀에게 모종의 감정들을 발생시키면서 이들은 한 단계 더 밀접해진다. 이러한 관계 변화는 그녀의 작품에서 섬세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한 가지 대상을 반복적으로 그려나가는데, 그것은 언어로는 명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것들을 순간순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리는 것이 항상 같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려지는 것과 그리는 자를 포함한 모든 것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은 점점 시들어가거나 성장하고 그리는 자의 상태와 조건 또한 하루하루 다르다. 심지어 그 변화의 방향과 속도마저 수시로 변한다. 이러한 차이는 그림과 그림 사이에 불규칙적이며 불연속적인 공백을 생성한다. 이로 인해 나열된 그림들의 움직임은 예측할 수 없이 진행된다. 그러나 이 동시다발적인 변화들이 혼란스럽거나 어지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대상에게 다가가고 순간을 포착하는 그녀의 태도가 굉장히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머뭇거림은 캔버스를 마주한 순간 확고함으로 전환된다. 그것은 어떤 부분을 감추거나 드러내고자 하는 명확한 의지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화면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이 돌연한 전환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물감의 색과 농도, 붓질의 속도와 압력을 조절하며 이 겹겹의 변화들과 그 변화가 생성시킨 시공간의 공기를 예민한 감각으로 담아낸다. 또한, 시간과 공간, 광량, 몰입도, 행위의 궤적과 그에 따른 우연들, 날씨와 습도, 분위기, 소리 등 그리는 순간의 모든 조건이 화면에 순식간에 개입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 대상과 그것을 둘러싼 모든 관계의 순간적 풍경이 된다. 여기서 순간이란 대상에게 서서히 다가갔던 시간이 그리는 행위로 압축되고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현재의 시간대와 다시 충돌하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시간 단위이다. 이 새로운 차원 안에서 그리는 자의 신경을 건드는 미약한 신호로서만 존재했던 것들이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고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만남들은 그리는 자의 확실한 몸짓으로 인해 충돌한 상태로 박제되는 것이다. 박제는 표면을 제외한 모든 것이 제거된 상태를 말한다. 이 만남에 있어서도 묵직한 것들은 배제되고 한없이 가벼워진 표면만이 남겨진다. 말하자면 그것은 무수한 관계들이 맞닿아 생성된 얇은 껍질이다.

엄민희_참새_캔버스에 유채_16×22cm_2016
엄민희_참새_캔버스에 유채_16×22cm_2017

이 포착으로 인해 변화는 일시적으로 정지된 듯 보인다. 변화의 정지는 말하자면 죽음이다. 기록은 대상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그림을 사물을 마주한 순간의 장례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죽음의 의례는 모든 단계가 신중하고 사려 깊게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 시간을 갖고 그녀의 그림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차가운 공기 안에 숨겨진 어떤 다정함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사물을 발견하는 단계부터 이미 죽음은 이 관계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쳐왔다. 죽어 있거나 죽어가는 것과의 관계 맺기는 애도의 방식으로써만 진행된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서늘하고 아린 감정들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림으로 옮겨진 사물이 반응하는 존재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사물을 드러내는 방식, 즉 과감한 생략과 강조 그리고 압력과 속도, 방향이 모두 다른 붓질 간의 마찰이 화면의 질감과 무게에 굴곡을 주면서 보는 이의 촉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 촉각을 타고 화면 안의 사건은 그대로 넘어온다. 그러므로 그림을 보는 이는 그림 속 대상과 신경이 연결된 것처럼 즉각적으로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말하자면 온기를 건네주게 되는 것이다.

엄민희_손가락_캔버스에 유채_32×40cm_2017
엄민희_손가락_캔버스에 유채_32×40cm_2017

한없이 가벼운 것이 약간의 온기를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영혼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무지개라고 부르고 싶다. 관계의 얇은 표면에 머무는 잠깐의 무지개라고. ■ 김소영

Vol.20180502f | 엄민희展 / EOMMINHEE / 嚴敏姬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