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8_0124_수요일_06:00pm
후원 / 메이크샵아트스페이스_스페이스K
관람시간 / 11:00am~06:00pm
리각미술관 LIGAK MUSEUM OF ART 충남 천안시 동남구 태조산길 245 Tel. +82.(0)41.566.3463 ligak.co.kr
STUDIO M17의 입주작가 유현경(6기)과 이윤성(3기)이 천안의 리각미술관에서 조우(遭遇)한다. 언뜻 드러나는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들의 조합은 서로 상이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한 공간에 펼쳐진 모습을 상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뭐라 정의 내릴 수 없는, 그래서 해결되지 않는 남녀 간의 관계처럼 말이다. 실재로 두 작가의 작품들은 끊임 없이 충돌과 화해의 과정을 반복하며 공존하고 있다. ● 이번 전시 'h/er'는 타이틀에서 연상되듯 다수의 여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림에 여성이 등장한다는 이유 만으로 전시의 타이틀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빗장(빗금/slash)을 품은 그녀(her)는 이들의 대상이자 그녀들의 여러 감각-시각, 지각, 취향 등-을 소유한 주체이고, 빗장(빗금/slash)를 품었을 때 분리된 'er'는 독일어에서 '그(he/영)'로서 단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별(sex)의 문제가 아닌 서로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모든 성별, 즉 인간 전체를 바라보는 포괄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렇듯 전시의 타이틀로 서로 상반된 단어를 빗장으로 연결하여 보는 것은 회화의 장르 안에서 서로 상이한 접근 방식을 보이는 이들의 작품을 통해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으로 신∙구 간의 충돌 상황과 그 안에서 직∙간접적 영향을 받고 있는 동시대 한국회화의 흥미로운 현 상황을 다양한 측면으로 들춰내기 위함이다. ● 남과 여, 계획과 무계획, 이성과 감성, 순간과 지속성, 도상과 모델, 디지털과 아날로그 등 서로 대조적인 유현경과 이윤성의 회화가 조응(照應)하는 이 전시 'h/er'에서 회화(painting)에 대한 진지하고 흥미로운 고민의 시간이 될 것이다. ■ 김동섭
충분치 않은 시간 - 환경 ● 최근의 '포스트 휴먼(post human)' 혹은 '뉴 휴먼(new human)'에 얽힌 담화에서 볼 수 있듯 '휴먼'은 현재 역사적인 기로에 있는 것 같다. 결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성중심주의의 훈육을 통해 통합과 발전에 매진해온 근대적 인간인 듯 하다. 근대를 통해 사실상 한편으로는 전쟁이나 파시즘, 차별과 같은 폭력이 초래되어 왔고, 그 핵심 기제가 억압적인 통제와 규율 장치였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아가 근대적 인간을 일종의 '주체'로 구축해온 것은 언어와 시각성었다는 점을 떠올려 볼때, '포스트' 혹은 '뉴'라는 접두어는 이러한 근대적 인간의 주요 속성이자 구축물인 언어와 시각성과의 결별 혹은 해체, 나아가 그 속성들의 확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휴먼'은 억압이 아닌 자율, 폭력과 배제가 아닌 공존을 실천하는 새로운 양상 속에서 어떤 지각과 감각으로,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반문하게 된다. 나아가 새롭게 인지되는 유기 생명체의 존재성, 그것이 처한 디지털 문화환경, 그리고 기술 진화와 함께 형성되는 새로운 생태계에서는 과연 어떻게 윤리적, 미학적 공존을 이룰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전시에 참여하는 두 작가 이윤성과 유현경의 작업도 이러한 디지털 사회 문화 환경에서 매개되고 재정의되는 생명체의 확장과 상호성이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어떤 것을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정서를 교감하는 객체들(작가와 관객 모두)은 사실상 여러 매체들과 시청각적 정보에 접속하고 있으면서도 개별적이고 고유한 정서들의 혼합체이다. 산만 속에서 찰나적으로만 집중하는 가분체(Dividual)는 여러 매체들에 동시에 노출되어 있으며, 여기서의 생명은 정보와 기억, 감각과 정서들의 혼합으로 존재한다.
읽고 있는 책의 구절들이 맴도는 와중에 인터넷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팝업되는 포르노 광고에서의 여성의 표정이 중첩되고, 휴대폰의 SNS상에 올라오는 음식 사진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애완동물 사진 혹은 동영상이 뒤섞인다. 친구들과 메신저로 주고 받는 시시콜콜한 수다와 이모티콘들은 동일한 기호처럼 떠돈다. 평소 즐겨보던 만화나 애니메이션(animation)의 귀엽고도 가증스런 목소리의 캐릭터들과 얼마전 극장에 가서 본 영화에서 나온 '판타스틱' 한 특수 효과의 스펙터클(spectacle)이 동시에 조우한다. 고전 누와르(noir) 같은 격투장면에 이어 실시간 인터넷 기사에서의 사건 사고 장면들이 겹쳐진다. 매 순간 어떤 특정 정서들과 느낌이 교차하고 와중에 기억과 잠재된 것들이 출몰한다. ● 생명과 매체환경은 이처럼 가분체(dividual)적인 인터페이스이자 다차원-혼성체로서 조우한다. 전시장에서 발생하는 것 또한 이러한 중첩과 혼성으로써의 '관람'일 것이다. 여기서 감각적, 지각적인 정보들과 기억,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자극과 잠재된 것들이 어떻게든 통합될 수 있을까. 문화적으로 반복-변주(variation)된 도상과 관습적으로 읽혀지는 형상들도 있으며, 작가별 각기 다른 스타일의 개별적이고 단독적이며 순간적인 표현들도 있다. 과연 기존의 그 어떤 서열과 가치의 경중을 떠나서, 배제나 억압이 아닌, 뭔가 새로운 감각과 정서의 덩어리들이 이미지로 발생할 것인가. ● 새롭게 발생할 수도 있는 그 어떤 것에의 향유, 그것이 예술의 장에서 본격적으로 이뤄진다고 해보자. 그를 위해 예술에서는 산만함의 가운데 집중과 몰입을 권장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여기에는 당연히 강요가 수반된다. 이제는 미적 체험이란 것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정정도 요청되는 '시간'에의 배려라는 것은 통상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향유하는 시간, 예외성과 소수성의 형태로 출몰하는 특정 순간들과의 우발적 마주침일 것이다.
h/er 를 무대에 올린 그/녀들 ● 두 작가 모두 1985년 생이며, 한명은 남자이고 다른 한명은 여자이다. 이 글에서는 작가들을 때로 '그/녀'라고 하여 두 명 모두를 지칭해 본다. 우선 전시 제목 "h/er"부터 보자. 이것은 작가들과 더불어 몇몇이 논의하다가 제시된 제목이다. 'her'라는 단어는 영어 표현으로 보면 '그녀의'라는 소유격이기도 하고 '그녀를'이라는 목적격, 즉 대상성과 주체가 되기도 한다. 물론 처음 언뜻 두 작가의 작품을 보면 '여자(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 두 작가들이 사실상 '여성' 자체에 주목한 것은 아니기에 her에 빗금을 쳐서 h/er라고 하였다. (빗금 뒤의 'er'은 독어에서는 '그'를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림에선 남자들도 그려져 있다.) 빗금이라 지칭한 '/'는 '빗장'이라고 불리면서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적 주체를 표현할 때 사용된 기호이기도 하지만 이 둘이 회화 구성을 할 때 활용한 요소로 볼 수도 있기에 두 작가 모두에게 적절해 보였다. 즉 '/'은 '아니오'를 말하기도 하고, 분열이나 분리, 해체 등의 '통합 불가능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불가능성은 형상들을 단일한 여성 혹은 남성 이미지로 통합해내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체로 독립된 사선이기도 하고 디자인적 요소를 갖는 상용구이기도 하다. ● 여러모로 이 전시에 참여하는 두 작가를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우선 작가의 태도부터 대조된다. 한 작가는 비교적 체계적으로 근거를 대면서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설명하고 다른 작가는 먼저 설명하기보단 기다린다. 그리는 방식 또한 매우 다르다. 한 작가는 비슷한 도상들을 섬세한 변주속에서 구축해 나가고 있으며 다른 작가는 한 작품에 여러 요소를 서로 이질적으로 공존시키기도 하고, 여러 작품이 같이 모여서 공통된 하나의 정서적 복합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어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형상들 또한 전시장 전체를 아우르며 지속적으로 호응하며 서로 변주하면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첫번째 그/녀는 10대때인 1998년에 개방된 일본문화 중에 소위 하위 문화라고 일컬어진 망가(manga)와 애니메이션 등에 매료되어 동호회 활동을 하다가 2004년에 미대를 들어갔다. 졸업 즈음에 본인 만의 스타일로 '나도 멋진 작업이란 것을 해 보자'고 결심했을 때 잘 알고 있었던 망가 스타일을 스스로의 표현 형식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는 '멋있는' 작품 중에서, 서양 미술사에 있어서 고전이자 걸작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컴퓨터 디지털 이미지로 변형, 재구축하여 작업을 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 중반은 마침 디지털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뉴 미디어' 붐이 한창이었고 복제, 패러디(parody), 디지털 인터페이스 등 다양한 미디어 개념들과 더불어 다양한 실험들이 이뤄졌던 시기였기에 이러한 디지털 패러디와 변형은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었다. ● 그/녀는 적극적으로 '모에萌え화'1)로 자신의 작업을 일컬으면서 오타쿠-화가를 자처한다. 2012년부터 지속해온 「torso 토르소」연작의 모티브는 고전 미술사의 단골 소재인 조형 '토르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1995년 영화로 출시된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 기동대」가 핵심적 부분을 차지한다. 이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장면은 여성형 사이보그(쿠사나기 모토코)의 팔 다리가 잘려 나가면서 터지는 스펙터클로 치장되어 있다. 이 장면으로부터 받은 감명이 주제가 되었고, 일종의 고전 조형인 '토르소'는 이제 얼굴이 갖춰진 '모에적 상반신'으로 등장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디지털 페인팅이 아닌, 실제 결과면에서 봤을 때 프린팅보다 크기나 색채 면에서 훨씬 풍부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유화로 적극 전환한다. 이어 망가,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형식과 컨벤션(convention, 상용구)들에 착안한 몇가지 다른 시리즈가 이어진다.
2015년에 발표한 「danae 다나에」시리즈에서는 망가 형식 중에서 컷을 중심으로 화면이 구축되는 방식을 차용하여 인물의 극적인 순간과 그 과장됨을 그렸다. 클로즈업 된 얼굴, 과장된 포즈, 화려한 색은 시각적으로 주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다각화되어온 이미지 구성에서 중심 도상은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잘록한 허리와 매끄럽게 이어지는 다리, 풍성하게 휘몰아치는 머리카락을 가진 미소녀이다. 이들의 귀여운 표정, 당당한 자세와 역동성, 빛나는 화려함 등의 특징은 '오타쿠적' 열광과 애착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이들의 자세와 섬세하게 결정되고 조화를 이루는 화려한 색채 조합은 이미지 전체가 내부로부터 주체적 의지에 의해 폭발하고 발산하는 것으로써 재탄생하는 데 기여한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모에적 대상이 되기보다는 모에적 충만함과 자기 완결성을 추구하는 신적 존재로 느껴 지기도 한다. 그/녀가 빌어온 도상이 그리스 신화에서의 신(god)이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상용화된 표현들을 극대화 시키고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그/녀의 선택과 작업 방식, 표현에서 나온 특성에서 기인할 것이다. ● 과연 그/녀의 그림들에서는 이런 모에적 감정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추측해보건데 만화적 표현을 빌어옴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아마도 회화적 표현성 중의 하나인 붓의 터치를 최소화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적 평면성에도 불구하고 젖가슴의 물컹함과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의 단단함 등이 느껴지도록 하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얼굴 표정을 이루는 주된 요소는 눈과 입 모양이지만, 작은 디테일들에 있어서는 일종의 또 다른 주관성이 개입되는 듯 하다. 가령 벌린 입 모양의 크기나 형태를 어떻게 잡느냐, 미세한 선을 어떻게 그리느냐 혹은 코의 그림자 표현에 있어서 조금 뭉툭한 삼각형으로 하느냐 아니면 그 위치를 얼굴로 여겨지는 배경의 중앙에 놓느냐 등에 있어서의 미묘한 차이가 눈에 띈다. 나아가 머리카락의 살짝 삐침이라든가 젖꼭지의 세심하게 선택된 연분홍 터치와 같은 세부 사항들의 고려가 그러하다. 그것이 잘 알려진 상용화된 표현이라는 어떤 암묵적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러한 고려 때문이다. 상용적 표현의 주관화, 변주마다 다른 디테일에의 주목과 미세한 색의 배치 등을 통해 이미지 전체가 애착어린 모에의 결정체로 등장하는게 아닐까 한다.
한편, 두번째의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이 궁금함에 가득 차 대답해 주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보인다. 전시되는 그림들 중 일부는 그/녀가 20대에 그렸던 것들이다. 당시에 대해 물으면 '어렸을' 때 자신은 무엇을 그리는지,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왜 그리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 자체에 몰입했고 집중했다고 한다. 그/녀 자신의 그림들이 '낯설어'진 것은 관객이란 매개를 통해서였다. 전시를 통해 관객들은 특정 시선으로 그림을 보고 그들이 느낀 것을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과 만나면서 작가 본인도 모르거나 납득할 수 없는 지점들이 돌출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그림이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특정 소통이 되기도 하고 오해의 매개가 되기도 한 것이다. '무의식 중에 의도 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에 무언가를 들킨 것 같은 느낌도 받았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2007년에 제작한 「그런 공간」 연작과 2008년의 「일반인 남성 모델」 / 2010년 ~ 2012년에 제작한 「숲 속 친구들」, 「불면」, 「어떻게」, 「겨울 과수원」, 「어릴 때 살던 집」 / 2017년의 사실적인 묘사의 모델화인 「은주」와 「김동화 선생님」의 세 축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회화적 표현, 구성, 붓질이 과감하게 행해진 것이 특징적이다. 때로 그림을 '특정 장면'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는 네러티브적 요소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있어'볼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 그/녀의 그림은 을씨년스럽기도 하고 초현실적이기도 하다. 어떤 구도는 피핑탐(Peeping Tom, 관음증자, 엿보기 좋아하는 사람)의 클로즈업과 광각렌즈로 촬영한 것 같은 과장된 심도를 갖기도 하다가도, 회화 표면의 질감이 강조되기도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웅크리거나 엉덩이가 부각되는 자세를 반복하기도 하는데 풍자적이기도 하고 난데없이 희극적이기도 하다. 한 그림 안에서도 다각적 공간구성과 붓질, 표면 질감의 변화 등의 다양한 표현이 공존한다. 이에 비하면 볼거리나 네러티브를 구축하는 장면(주로 정사장면)들은 단번에 그려진 것들이 많기도 하고 어눌하고 미숙하기까지 하다. 전체 이미지 면에서 봤을 때 이런 정사 장면은 일종의 클리셰(cliché, 상투적인 장면)로 작동하기 때문에 자세히 묘사할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른다.2)
서른을 전후로 하여 해외 레지던시를 몇 차례 다녀오고, 다양한 관람의 솔직한 토로의 장이 되기도 했던 전시들을 거쳐온 그/녀에게서는 어떤 특유의 태도를 볼 수 있다. 물론 20대 여느 청년들이 흔히 겪는 한때의 울렁거림이란 게 소재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이제는 작품이란 것을 놓고 스스로도 다양한 관람을 즐기고 있는 한 작가로서의 여유가 뚜렷이 드러난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에게서 일어나거나 관객으로부터 공명되는 반응들에 대해 딴 소리를 하거나 '성숙'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둥 능청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그녀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게 그/녀의 회화는 능청스러운 것, 직관적으로 불러일으켜지는 충동들이 산란하는 장이 되기도 하는데 그녀 스스로도 개인들의 단독적인 정서들이 순간적으로 조우할 때의 느낌을 추상적으로, 표현적으로 회화의 장에 노출해 보고 싶어 했기에 그런 제스처와 흔적으로써의 회화를 관객 앞에 슬그머니 툭 던져 놓는 느낌이다. ● 그/녀의 그림은 초조해 보이기도 하고 수줍어 보이기도 하며 내내 불안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며, 관객의 시선을 화면 곳곳에 침투시키고 사로잡아 놓기도 한다. 그/녀의 그림들은 이제 그림 속 도상, 제작 시기, 장소등의 맥락과 상관없이 매번 곳곳에서'발생'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사진이나 데이터들을 활용하기보다는 실제 사람, 실제 장소를 대상으로 하여 한 때 그/녀는 그 대상성을 재빠르게 회화에 담아내는 것에 몰두하기도 했고 모델과 함께 특정 장소를 방문해보기도 하는 등 대상이 회화로'발생'하고 정서가 그로부터 산란하도록 유도했었다.3) 지금은 지긋한 시간을 들여서 대상이 고유한 존재로써 드러나는 것에 주목하는 듯 하다. 짧지만 이렇게 그/녀의 10여년간의 몇몇 그림들을 보니 뭔가 새삼스럽기도 하다. 이제 관람은 대상의'실제성reality'이나 '단독성singularity'이 (정서나 심지어 오해의 형태로) '발생'하기도 하고 화면에서 지긋이'조우'하기도 하는 역동적인 장으로서의 이미지-스크린, 즉 충동이 생동하고 충돌하는 장에 놓여지게 된다.
오늘날의 회화 작가 ● 최근 전시장에서 마주친 몇몇 인상적인 그림들이 떠오른다.4) 짧은 단상이겠지만, 이들로부터도 회화적 형식과 구축 방식들, 붓질과 터치 및 색감에 있어서는 실로 다양한 재미와 변화들로 인한 자율성을 느낄 수 있다. 구성면에서는 기존 영화나 드라마의 네러티브적 요소, 한국 민화와 풍속화의 평면 구성, 일본 우끼오에나 중국 산수화의 다시점 구성, 시청각 오락 대중매체의 압축되고 상용화된 3차원 구성, 길거리의 간판이나 플래카드에서의 도안된 디자인 요소 등 다양한 시각적 매체와 네러티브 매체, 시간매체들의 형식들이 여러가지로 활용되거나 차용됨이 확인된다. 그래서인지 기존의 아카데미즘적인 미술사에서 정형화시킨 형식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한다든가, 외국의 주요 유명 작가들의 형식들을 무의식적으로 참조 하기보다는 현재 한국 상황 내에서 익숙해진 시각 특성과 감각들이 혼합되어 자유롭게, 자의적으로 펼쳐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 사실 우리나라처럼 시청각 매체에서 서로 맥락이 다른 다양한 정보들이 오락적으로, 소비적으로, 나아가 지속적으로 빠르게 공급되는 사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 영화, 게임, 나아가 인터넷 뉴스들이나 개인 블로거들의 이야기, 심지어 의학 정보나 과학 뉴스 등 전문적 담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정보들과 시청각 데이터들이 (인터넷 용어로) 알고리즘(algorithm)의 방식으로 빠르게 소비되면서 동시에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을 볼 수 있다. 이는 복제 가능한 매체로 디자인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그림과 같은 (복제 불가능한) 예술 매체로 제작하는 경우에도 영향을 미쳐서 자율적인 제작환경을 조성하는 듯 하다.
물론 두 작가도 형식적 자율성을 만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작가는 그러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다른 작가는 그러한 산만한 환경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벗어나면서 자율성을 획득한다. 반면 두 작가 모두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반복 추구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강박적이며 애착 어린 추구로부터 비롯된 반복과 변주의 인물형상들, 즉 전시장에서 우발적으로 조우하게 된 h/er(s)는 복합적인 이미지로 관람을 새롭게 맞이한다. 전시장에 등장한 어떤 인물은 '비전문 모델들'이고, 어떤 것은 캐릭터화 된 디지털 이미지이며, 어떤 이들은 관람객을 응시하는 실제 인물의 초상이기도 하다. 이상화되고 정형화된, 나아가 관습화된 포즈들이 클리셰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유하고 독특하고 유일한 실제적 단독성을 획득해내기도 한다. (물론 인물화에 있어서의 다양한 포즈들은 작가의 트릭 중 하나란 점도 잊지 말아야한다.) 전시장에서의 h/er(s)는 서로 상호 대응하면서 기묘한 조우를 이뤄낸다. 그리하여 h/er(s)는 일상적이고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친근하면서도 불안한 다변화된 이미지로 재탄생한다. 이제 왜 인물 형상들이 '이상화'되어 등장하며 폭발하고 분출하고 역동적으로 활개를 치는지, 혹은 편안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불안한 응시 속에 사로 잡혀 있는지, 때로는 지극히 표현을 최소화한 자세에 갇혀 있는지를 가늠케 된다. 그 h/er에 부여된 충동들이 매번 어떻게 대상의 정체를 파고 들면서 대체하는 것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지를 알 수 있다. ● 생명현상 있어서 그것의 중핵이라고 간주되어 온 고유한 단독성이란 것은 정서들이나 충동과 같은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어떤 특질을 말한다. 그로 인해 생명현상은 일정정도 상실과 해체와 분열을 지속함과 동시에 무엇인가를 재획득하려는 생명력을 키워내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출몰과 고집스러움의 양상이 작가란 개인의 삶과 더불어 예술활동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등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생명체 특유의 소중한 판단능력이자 소통방식 중 하나인 직관이란 것은 그것을 어떻게 측정할 수없고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예술의 중요한 핵심 중 하나였다.'직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가장 빨리 눈에 띄는 것, 자극적으로 보이는 것에 일차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급함'과 같은 상태가 아닌가 싶다. 때문에 직관은 일차적으로 위급함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민첩성이나 순발력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속기 쉽다. 그러나 반복되거나 경험이 쌓이면서 정보와 이성, 감각이 중첩되면 직관 또한 단순한 순발력으로부터 나아가 통합적인 측면을 획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정서적 깊이를 가지고 예민하게 수용하고도 빠른 통찰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정서적 깊이, 감각적 예민함, 통찰력 이라는 것은 정해진 기준이 없는 다양성의 영역에 자리하기에 인간은 그것을 주로 '예술'이란 매체를 통해서 발현시켜 왔고 향유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렇게 해서 무르익는 직관이라는 것이 근대적 휴먼이 포스트 휴먼으로 확장되면서 발현되는 새로운 미학적 기제가 아닐까. ● 변덕스럽기도 하고 가변적이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어떤 특유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작가란 존재에 대해서도, 혼자서 뭔가 애꿎은 상상을 하는 존재라고 하기도 하고, 금기에 도전하는 자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은 평소에 일반적으로는 시간이 부족하여 집중하지 못한 어떤 영역이라든가, 사회에서 주목되지 않는 부분들, 과도한 정보와 복잡한 매개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소수적인 것들을 잡아채고, 다뤄볼 시간을 충분히 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 오늘날의 작가가 아닌가 싶다. ■ 이병희
* 각주 1) 모에 萌え는 작가 이윤성이 '망가, 모에화의 전략으로 고전을 탐구하는 자세'라고 하면서 자신의 작업 특징으로 언급하는 표현이다. 이에 임근준 aka 이정우의 「이윤성의 회화에 관한 비평적 메모, 2014」에서의 설명이 적절해 보인다. 그는 "싹트다/타오르다'는 뜻의 오타쿠(망가 · 아니메 따위에 과도하게 열중 하고 집착하는 사람) 신어인 '모에'는, 1차적으로 '애호하는 미소녀 캐릭터를 볼 때, 가슴에 솟는 흐뭇한 감정'이라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제 '모에'의 의미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단순한 취향이나 성적 페티시 이상의 뜻이 됐다. 심지어 지하철 노선이나 편의점, 기업 브랜드 등을 '모에 의인화' 해 미소녀나 미소년으로 전치시키는 일도 허다하다."하며 그 모에적 감정이 단지 미소녀를 성애적으로 현현하는데만 쓰인 것은 아님을 짐작한다. ● 이윤성의 회화의 특징과 도상의 역할 대해서 장승연은 「참조의 하이브리드, 2014」에서 그가 서양미술사의 관습화된 도상들과 망가형식을 복합적으로 참조하면서도 새로이 한국적 도상을 재창조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글에서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인 다나에(그녀의 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 왕이 외 손자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그녀를 지하 방 안에 가두지 만,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에 의해 결국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는다)가 그간 전형적인 서양미술사적 도상(코레지오, 티치아노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부터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인 렘브란트, 그리고 1900년이후 클림트까지 즐겨 그린 소재인데, 그들의 작품에서 되풀이 되던 전형성이란, 하얀 천이 깔린 침대 위에 기대어 누워서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 위주)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윤성은 그 관습을 단숨에 파괴해버리고 있음에 주목한다. ● 이윤성의 회화적 구성의 측면에 대해서 건축가 정현은 「구조의 단면, 2014」에서 이윤성의 그림 이 만화적 평면성의 칸들과 사선의 구성을 활용하지만 도상이나 표현은 그로부터 폭발적으로 탈주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만화에 비유하자면 흔한 쇼넨망가(소년 만화)—성적 대상화 양식을 소비하는 소년들을 위한—가 아닌, 쇼조망가(소녀 만화)의 컷 구성에 가깝다. 서양의 코믹스를 기반으로 발 전한 일본의 망가 형식이 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층의 소실점에 잡아두려 했었다면, 다시 망가에서 분화되어 나온 쇼조망가는 극단적인 평면구성—마치 문학이나 잡지의 텍스트 배열 같다—그 자체이다. 쇼조망가 에서의 '칸의 바깥'이란, 매체의 프레임 안에 둘러싸인 또 다른 칸으로 간주 된다. 칸의 바깥은 안쪽에 그려진 도상 주변을 떠다니는 물방울, 빛, 식물과 같은—감정과 운동감을 나타내는 효과—상징물들을 담음으로써, 클로즈업 된 얼굴과 대비되는 역할을 한다." 2) 유현경의 작품을 놓고 크게 두가지의 관람이 가능한 건 사실이다. 참조할 만한 것으론 2012년 학고재 개인전 『거짓말을 하고 있어』 이후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도록이 있다. 여기엔 유진상과 반이정, 지세민, 김우임 등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유진상은 "회화가 그 독자성과 아름다움을 획득하는 것은 그것이 생산하는 관계의 역설로부터 비롯된다. 회화는 끊임없이 소멸되고 재창조된다. 제스처, 붓의 움직임, 대상의 해석, 시선의 사용법을 통해 회화가 사라 지는 경계들이 생겨난다. 이를 통해 구체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조건들이 생겨나는 것 역시 회화적 역설을 구성한다. 유현경의 회화는 이 회화적 역설을 가시화하는 예외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다. 유현경 작업에 있어서 이렇듯 '회화성'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한 점이 주목된다. 반면에 반이정은 그의 최근 책 『한국동시대 미술 1998-2009』(미메시스, 2018)에서 유현경을 "호기심에서 범한 성역할 전환극"이란 타이틀로 본인의 구분인 "포스트 페미니즘 미술의 리비도 해방 전선"에 포함시킨다. 여기서 그는 2008년의 「일반인 남성 모델」프로젝트와 더불어 유현경이 2008년과 2009년경에 그린 복잡한 구도의 공간 그림과 그 사이사이에 그려 넣는 정사장면을 예로 든다. 이를 "미로(迷路)의 에로티즘"이라 명하는데, 이미 반이정은 2011년 OCI 미술관에서의 개인전 『잘못했어요』의 서문에서도 기술한 바 있다. 이번 책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2000년대말 초에 있어, 한국 젊은 여성작가의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표현과 소재에 주목함을 알 수 있다. 3) 2008년에 행한 「100인의 초상화」연작에서 유현경은 무작위로 모델을 모으고 한편에서는 대상의 특징을 그려보면서 각기 다른 특성의 '사람'을 직접 마주하는 훈련을 한다. 이는 그 이후의 모델 작업에서 비교적 빠르게 회화적으로 대상과 표현을 획득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바탕이 된다. 문맥이 개입되는, 2008년부터 행한 「일반인 남성 모델」연작에서는 '일반인'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 속에 남성 모델이 그림 속에 등장하게 된다. 그간 여성을 대상으로 한 그림에서 관습적으로 등장했던 에로틱함이나 화가와의 관계성은 소거된 채로 모델의 비전문가적인 엉거주춤한 자세와 회화적 표현들을 보는 것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이들은 누드 모델이 갖는 에로틱함을 해체시키고 오히려 무성애적인 단계로까지 나아감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관습적 표현에 대한 재맥락화, 해체, 심지어 저항과 반항은 이윤성과 공통된다. 유현경은 최근까지 모델화를 지속하고 있는데 특정 모델은 이제 얼굴이 아닌 전신으로 등장하며 과거보다 긴 호흡으로 작가와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최근에는 회화적 표현으로 모델이라는 대상과 마주친 순간에 발생하는 정서들에 주목한 과거와는 달리 대상 자체의 특질을 보다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등 그 과정과 결과에 있어 변화된 지점들이 생기고 있다. ● 유현경의 작업에 대해서는 2012년 학고재 전시 때 공개한 작가노트(구글 검색)와 2017년에 "청년기를 정리하며"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작가노트를 참조하였다. 2012년 당시에는 주로 독일 레지던시 당시 그렸던 초상화들을 설명하였는데, 작가가 주목한 당시의 대기환경과 대상과의 조우에서 발생하는 정서들에 집중한 표현들이 어떻게 인물화가 정서가 머물고 정서가 발생하는 장치로 변모하게 되는지를 볼 수 있다. 2017년의 작가노트에서는 그간 자신의 작품을 둘러싼 관람들과 계기들이 때로 비롯 엇나간 조우일지언정 그것에 수긍하고 받아들인다는 고백을 내뱉고 있다. 그러면서 보다 대상 집중적인 사실적인 묘사로 행하고 있는 현재 모델작업에서 어떤 안정된 정서들이 깊어지는 것을 내비치고 있다. 4) 우선은 이 두 작가가 '회화'란 매체를 주요하게 사용하고 있기도 하기에 이 두 작가와 더불어 최근 전시를 통해 보게 된 다른 작가들의 회화작품들을 떠올려 보고, 몇몇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는 회화 또한 형식적 다양성의 측면에서 봤을 때 해체된 매체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인접한 다른 매체 즉 사진이나 비디오, 3차원 공간 매체, 그리고 대중매체와 디자인 매체 등이 회화와 더불어 여러 전시장에서 그 계급적, 상황적 구분이 모호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2000년대를 통해 순수 매체 미학적 실험의 와중에 장르나 매체 혼성이 적극적으로 이뤄진 탓이기도 하다. 최근에 나는 주로 서울과 수도권에 위치한 전시장들인 학고재, 아트 스페이스 풀, 아마도 예술공간, 메이크샵 아트 스페이스, 두산갤러리, OCI 미술관, 난지 미술 창작 스튜디오 등을 통해서 30대를 넘기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접했던 것 같다. 이중에서 평면 위주 작업만 놓고 보자면 박광수, 정덕현, 이우성의 작품들이 흥미롭게 회자된 편인 듯 하다. 물론 소위 '인터넷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한국작가들의 특징이라든가, 관람의 주관성(심지어 전문 비평조차도)이란 것도 실시간 검색되고 회자되는 정보의 특징과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할 순 없다.
Vol.20180125b | h/er-이윤성_유현경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