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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매향리 스튜디오 현대미술展
후원 / 경기도_화성시_경기문화재단_경기창작센터_경기만 에코뮤지엄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화요일 휴관
매향리 스튜디오 Maehyangri Studio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315-4번지(구 매향교회) Tel. +82.(0)32.890.4820
매향리 스튜디오는 1968년 건립된 매향교회 구 예배당을 재생시킨 시설로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가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이용백 개인전 『한국적 모자이크』 전시를 기획하였습니다. 한국적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내딛고 있는 사회적 실존의 토대를 말하며 모자이크는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미디어 및 테크놀로지, 인간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 이 전시에 작가는 매향리의 역사와 정서를 대변해주는 매향리 스튜디오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확대하고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물건이 특정되지 않게 하는 모자이크 방식을 스튜디오 파사드에 반영시킨 설치작품을 통하여 폭격기의 굉음처럼 가려지고 지워졌던 매향리의 아픈 시간을 표현하였고, 인간과 삶의 노동이 추상회화처럼 드러나는 들판에 스텔스 폭격기의 실루엣이 검게 드리워진 드론(drone)사진 연작, 네이버 지도에서 군사적 기밀이라는 이유로 가려진 DMZ 부분을 3차원 조각으로 재현한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 그리고 작가의 대표 영상 '엔젤 솔져(angel soldier)'를 통하여 정치적이고 심리적으로 불편한 우리나라의 갈등관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 또한 인간의 허황된 집단적 욕망인 불과 전쟁, 그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꽃을 통하여 수원 군 공항 이전을 반대하는 화성 시민들의 염원과 작가의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합니다. 작가는 수원 군 공항 이전부지로 예정된 '화옹 지구'에 정화를 의미하는 들불로 갈대를 불태워 거대한 폭격기를 형상화하고 그 자리에 시민들과 함께 꽃씨를 뿌려 거대한 폭격기가 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대지예술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 매향리 스튜디오
한국적 모자이크, 이용백의 예술세계에 대한 몇 가지 단상 ● 이용백 작가는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위치에 대해서나 작가의 실력에 대해서도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용백 작가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며, 또 어떠한 메시지를 던지려 하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할 때가 많다. 아마도 이용백 작가가 매체, 즉 미디어와 반응하는 감각적 속도가 너무나 기민하고 탁월한 나머지, 관객들은 작품에서 보이는 외양적 스케일과 기법의 참신함에 압도되어 이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놓쳐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미리 말하자면 이용백 작가는 결코 테크니션을 자임했거나 그러한 방향성을 지향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작가는 테크놀로지와 꾸준히 대화하면서 테크놀로지, 그리고 미디어와 인간 사이의 대립으로부터 화해의 지점을 찾으려고 고민해왔던 휴머니스트이다. 이제 이용백 작가가 보낸 과거의 이력과 작가가 지닌 현재의 관심, 그리고 예상되는 작가의 미래를 짚어가면서 이 놀라운 예술가의 진정한 면모를 바라보기로 한다. ● 이용백 작가는 지금에 와서는 널리 보급된 상호작용 · 음향예술 · 키네틱 · 로보틱스 등의 미디어 예술을 199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성취해낸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다만 90년대에는 첨단을 걷는 작가 정도로 쉽게 치부되고 말았던 경향이 있었는데, 2000년대 지나고 나서야 작가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작가가 미디어라는 장르를 미술계에 소개하면서 장르를 확장하려던 전략을 펼쳤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민했던 철학적 문제를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미디어를 사용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이 서서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용백 작가가 1996년 대규모의 첨단 작업을 전시로 제시했을 때 우리나라 화단은 소수를 제외하고 아직 작가의 의도나 생각, 예술 수준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작가는 화단의 무반응에 낙담했을 법도 했는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대담한 차기 작업을 의욕적으로 제시했다.
이용백 작업 중에서 기념비적인 최초의 성과는 「인공감성(2000)」 · 「비정상(Abnormal, 1996, 2002)」 · 「모니터 속의 쌍둥이(Twin in Monitor(2001)」이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작업의 일련들이 어째서 대단했는지 철학적으로 검토하는 시간을 우리는 갖지 못했다. 작가는 1966년대 태어나서 1980년대에 대학을 마쳤다. 90년대에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수학했다. 여기까지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이다. 작가가 한국에 부재했던 90년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독일에서 작가는 백남준 · 요셉 보이스 · 존 케이지 · 빌 비올라 · 브루스 나우만 등 세계적인 작가들은 물론 고전과 현대의 예술철학을 향유하고 섭렵하면서 아주 행복해했다. 작가가 가진 세계에 대한 불만족은 대부분 80년대에 생긴 것이다. 80년대 우리나라의 두 가지 진영은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었다. 전자가 메인스트림이었다면 후자는 일종의 탈출할 수 있는 도피처 역할을 담당했었다. 일종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러나 정작 본질은 둘 다 같았다. 그것이 수직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 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의 가르침은 수직적이다. 그것은 나무를 닮았다. 기초적 토대에서 저 대기를 향해 진리를 찾으러 뻗어 나아간다. 플라톤의 이데아도 그렇다. 아르스토텔리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 1 원인 · 임마누엘 칸트의 물자체(Das Ding an sich) · 헤겔의 절대정신 · 니체의 영겁회귀 · 하이데거의 존재도 우리 현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운영자로서의 최초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 혹은 그것을 모색하는 작업의 가능과 한계를 진단한다. 이러한 철학적 혹은 문화적 작업의 주체는 바로 대문자로 표현되는 나(I)이다. 나는 주체(subject)라고도 하고 자아(self)라고도 한다. 이때 대문자로 표현되는 나는 세계와 분리된다. 나는 나이고 세계는 세계이다. 나의 의식은 세계의 모든 사물에 투사(project)되며 투사가 다시 반영(reflect)되어 정보로 재정립된다. 그리고 각자의 모든 주체들은 알아서 세계를 파악하는데 그것이 확실한지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어떠한 큰 줄기의 리더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누군가 확실한 영도적 리더가 있고 나머지 팔로워들은 그 뒤를 맹신하며 뒤따른다. 철학에서 어떤 학파의 영수가 나타나면 기존 학파에 도전하고 대립하면서 역사 발전이 전개되었다. 미술에서도 사조와 유파라는 것이 부침을 겪어오면서 역사의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우리나라의 현대미술의 경우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라는 커다란 두 줄기의 유파가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 둘이 원하는 바는 같았다. 영향력 있는 작가로서의 안락한 위치 보장이라는 목적에 그들의 촉수는 꽤나 예민했다. 이러한 권력욕에 무관심한 거리를 유지한 작가였다. 이용백 작가가 이 둘 모두와 절연했던 것은 당연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용백 작가가 「인공감성」 · 「비정상(Abnormal)」 · 「모니터 속의 쌍둥이」에서 발언하고 현시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나무를 닮은 수목형 모델(tree model)로 진리를 파악하는 기존 가치체계가 더 이상 시대에 걸맞지 않고 낡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일차적 목적에 있었다.. 이용백 작가는 나라는 객관, 나아가 이데올로기라는 거창한 기치(旗幟)보다 중요한 가치가 다원주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작가에게 중요한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신이나 제 1 원리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우리 인간이란 서로서로 영향을 받아가면서 도와주고 연대를 맺어가며 발전해가는 존재이며, 인간에게 내재된 문제점이 무엇인지 성찰해가면서 기쁨을 얻는 존재라는 사실 속에서 진정한 가치가 발현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용백 작가는 나라는 자아(self)의 위대한 정체성보다 나는 타인과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 존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한 것이다. ● 「인공감성」은 서로 하나된 관객들의 들숨과 날숨이 만들어내는 교류와 연대로 메시지가 형성된다. 박제된 소와 관객이 나누는 대화와 소통이 박제된 소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주체는 이미지로 나타내자면 인드라망의 구슬이다. 수많은 구슬들이 서로를 비추는 빛에 의해 영롱하게 빛난다. 그 빛의 기원이 무엇이고 누가 리더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서로 영향을 받으며 존재하는, 다자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다자인 그물이다. 나중에 「예수 - 부처」로 더 잘 알려진 「비정상(Abnormal」이라는 비디오 작품 역시 주체 중심주의가 갖는 여러 문제점을 파악하고 돌파하려 했던 작가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예수의 사도이고 너는 부처를 믿는 보살이라는 도식이야말로 모든 것을 분리시키면서 기득권을 지켰던 기성의 생존 체계였다. 작가는 이러한 체계의 유혹의 손길을 뿌리쳤다. 이용백 작가는 1996년부터 "나는 모든 존재와 가치로부터 열려있는 다원주의 세계의 엄연한 일원이며 자유롭다. 물론 그 자유를 위해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과 연대와 협력을 제안하고 아이디어를 모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작가의 발언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30년이 더 지난 이 시점에야 비로소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이해했다. 「모니터 속의 쌍둥이」 역시 주체나 자아라는 동일성의 철학이 얼마나 낡고 진부한지, 그리고 그 낡은 토대에 앉아서 권리를 요구하는 기성의 화단과 학계의 일원들이 얼마나 퇴행적인지 일침을 가했다. 마술처럼 공간을 부유하는 쌍둥이 인형은 자기 동일성을 주장하지만 외부세계(거울)에 너무나 쉽게 굴복하고 유혹되는 자아의 허구성을 절묘하게 드러냈다.
2002년 무렵 이용백 작가는 위에서 본 것처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검토했다. 「증발된 사물들(Vaporized Things)」은 수영장 물 속을 걷는 검은 테 안경을 쓴 정장차림의 남자를 사방의 각도에서 촬영해서 편집한 싱글 채널 비디오 영상이다. 노란 공기통(air tank)에 의지해서 수영장 물 속을 일직선으로 걷는 남성은 얄팍한 보상기제를 얻기 위해 한 방향을 향해 부단히 걷는 우리 한국인을 표현해낸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이 작품을 서두로 작가는 자신감을 얻었고 몇 해가 지나서 그 유명한 「천사 - 군인(Angel - Soldier, 2002)」 연작을 발표한다. ● 작가는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을 좋아하며 꽃을 아낀다. 작가는 문득 "이 세상이 온통 꽃이라면...."이라는 가정을 해보았다. 사람이 한번 숨쉬면 한번 내쉬어야 하고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당연히 여자가 있다. 어찌 꽃만이 세상을 넘치게 덮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세상이 온통 꽃으로 가득 찼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꽃으로 가득한 세상은 당연히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굉장한 인위적 조작이 뒤따랐겠고 모종의 있을 수 없는 술수의 조화가 펼쳐진 결과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계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즉, 위정된 평화를 가리킨다. 세계는 소수가 독점하는 금융자본으로 돌아간다. 특히 미국은 하루 사이에도 천문학적인 적자가 발생한다. 가장 풍요로운 적자이다. 기축통화인 달러를 또 찍어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나라가 국가 운영에서 발생한 적자를 메운 채권을 무엇으로 갚아 왔는가에 있다. 바로 군산복합체의 첨단무기였다. 우리나라는 겉으로 그나마 풍요로워 보이는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평화를 자국민의 세금으로 구걸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평화는 천사의 겉모습처럼 달콤해 보이지만 전사의 냉혹함만큼이나 시린 것이다. ● 천사와 군인이라는 고도의 대위법을 통해서 자연과 인위, 전쟁과 평화, 선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 일(一)과 다(多), 상명하달과 자발적 자유라는 문제가 고스란히 응축되었다. 또 천사는 선함의 대명사인 동시에 수호신과도 동의어이다. 나를 지켜주는 그 무언가는 선한 것인데 그렇다면 나는 과연 선한 것인가? 내가 선한 수호신의 수호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과연 선하고 정의로운가라는 문제까지 되짚어 보어야 한다.
『한국적 모자이크』라는 타이틀의 2018년 전시는 이러한 배경을 지닌다. 한국이라는 용어는 이용백 작가가 내딛고 있는 사회적 실존의 토대를 말하며 모자이크는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미디어 및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관계에 관련되어 있다. 이번 전시회는 화성시 매향리에서 진행된다. 1968년 미군들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지었다는 매향 교회가 있었고 2017년 경기만 에코뮤지엄 거점공간으로 교회 공간을 매향리 스튜디오이라는 이름의 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매향리(梅香里)는 지명처럼 매화 향기가 물씬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매향리 바닷가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농섬이 있다. 농섬은 미군의 폭격 훈련 장소였다. 원래는 그 섬은 산으로 이루어졌는데 산정상이 폭격으로 평평해졌다. 농섬의 폭격을 육지에서 바라보던 관측소 주변은 평화생태공원으로 바뀔 예정이다. 이용백 작가가 신작을 이곳 화성에서 선보이는 이유는 「천사 - 군인」의 연장선에서 우리 사회와 역사 추동력의 본질을 바라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의 평화는 잠정적 평화이고 위장된 평화이다. 서울 주민의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기 위해서 매향리 주민들은 희생을 강요 받았다. 서울 주민들 역시 바쁘게 살아간다. 열심히 살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산다고 믿는 이들 역시 국제금융자본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월가의 금융자본은 0에서 무한대로 가는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이다. 이 수레바퀴가 멈출 때 우리의 수도와 전력과 가스도 멈춘다. 금융자본은 투자와 투기로 자기 생명을 연장한다. 최고의 수익률은 금도 아니고 부동산도 아니다. 무기와 전쟁이다. 평화는 허투루 얻어지지 않는다. "Free is not free." 자유도 공짜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의 노동은 자본이 된다. 노동이 자본으로 환원되는 이 일상은 늘 반복되고 안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평화로워 보인다. 이 평화 속에서 얻어진 자본은 투자되어야 한다. 우리의 지배층은 제조업과 건설업, 부동산에 투자한다. 미국의 소수 지배층은 가장 안정성 높은 투자처인 군산복합체와 이에 종속된 연구기관, 금융회사, 다국적 기업에 투자한다. 나라는 개체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의 도구들을 선택해야 하는 상층부의 하부구조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내가 천사인 이유는 본질적으로 내가 군인이기 때문이다. 비단 우리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구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 모순적 구조와 시스템이 용이하게 작동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정보들이 가려지거나 지워져야 한다. 정보를 독점하고 향유하는 것이 고래로 지배층, 혹은 지도층이었다.
이용백 작가는 2016년 학고재 갤러리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Blind Landscape, 2016)」 · 「지루하고 흔해 빠진 소재를 작업하는 이유(2015)」 · 「지구는 어떤 힘으로 자전하는가?(2015)」라는 작품 시리즈를 선보인 적이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은 네이버 지도에서 군사적 기밀이라는 이유로 가려진 DMZ 부분을 3차원 조각으로 재현된 작품이다. 우리나라 군사 시설의 위치와 위력 정도, 포진 병력 등의 정보는 북한은 물론이고 미국 · 중국 · 일본 · 러시아도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 국민들은 알아서는 안 된다. 위장된 평화의 체계 속에서 무언가 남의 자본을 굴리기 위해서, 또 무언가 남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세계관의 맹인이 되어야 하고 진리의 뒤꼍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국가의 지배층 간의 약속 체계에 의해서 작동된다. 그리고 지배층이 아닌 바에야 우리는 모두 진리의 뒤꼍에 있는 모자이크 속에서 살아야 한다. ● 「지루하고 흔해 빠진 소재를 작업하는 이유」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커다란 천사의 날개이다. 두 번째는 이 날개를 지탱하는 유압식 기계장치이다. 세 번째 부분은 흡음 스폰지로 만든 스텔스 B-2 스피릿 형상이다. 평화를 상징하는 천사의 날개를 굳건하게 떠받치는 기계는 2차 산업인 제조업을 연상시킨다. 제조업으로 지탱하는 우리의 평화이다. 그 현실 넘어 저편에 우리는 우리의 평화를 (구체적으로는 제조업을) 지켜줄 위대한 B-2 폭격기가 있다고 믿는다. 사실 B-2 폭격기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미국이 존재하기 위해서이다. 미국이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와 주변국들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경쟁하면서 치열하게 다투어야 한다. 모자이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실질적인 모습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지구는 어떤 힘으로 자전하는가?」이다. 이 작품은 지구본을 라이플이 발사한 총알에 의해서 회전하는 영상이다. 인간의 역사가 평화로 진행되기보다 갈등과 투쟁을 극복하면서 어렵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간명하게 드러낸 역작이다. ● 이번 전시회에서 작가는 드론으로 상공에서 찍은 논바닥 형상의 사진 연작을 선보였다. 논바닥 형상에 스텔스 폭격기의 대명사인 B-2 스피릿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진다. 논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가장 밑바탕에서부터 이루어주는 상징계와 같다. 벼농사의 풍요로움이야말로 한반도 사람들의 정체성과 연대감을 이어준 끈이었다. 상공에서 찍은 논바닥은 모노크롬 회화의 텅 빈 충만감을 연상시킨다. 거기를 지나는 폭격기의 괴수 같은 형상은 극도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스텔스 폭격기는 인류의 테크놀로지가 집대성된 과학의 완결체이다. 그것은 인공위성보다 극비의 기술이며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비싸다. 이토록 그림 같은 논의 풍경은 농부의 도구와 노동, 즉 원초적이고 일차적인 인간 문명을 상징한다. 스텔스기의 그림자는 일반인들이 그것의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킨다. 스텔스기의 실체를 아는 사람만이 세계의 진정한 정복자들이다. 미군의 엘리트(소수 군인) · 미국 정계 엘리트들(소수 정치인)과 군산복합체 엘리트(소수 경제인), 그리고 연구소의 과학자 임원들(소수 과학자)만이 알 수 있다. 즉 이 네 부류의 소수 인원이 곧 이 세계를 지배한다. 이 사진 연작은 평화를 원하는 대다수 일반인과 전쟁을 조장하여 특권을 챙기는 소수자의 심리적, 정서적 대비를 그려낸다.
매향 스튜디오(구 매향 교회)의 파사드에 이용백의 기발한 작품이 설치되었다. 작가는 우선 구 매향 교회의 파사드를 촬영했다. 촬영된 교회 이미지 픽셀을 의도적으로 확대한다. 그러면 교회 이미지는 모자이크처럼 보인다. 모자이크처럼 변환된 교회 이미지를 실물 크기로 계산해서 그림으로 그린 후 실재 교회 파사드에 설치했다. 설치가 끝난 실재 교회를 보는 관객은 모자이크로 가려진 교회처럼 느낀다. 모자이크는 여러 개의 의미 레이어를 지닌다. 하나는 정보의 유출 방지이다. 또 하나는 컴퓨터의 버퍼링 현상을 의미한다. 즉, 컴퓨터 화면의 모자이크는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의도적이고 적극적 의미로서의 모자이크 이미지이고, 또 하나는 비의도적이고 개연적이며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모자이크 이미지이다. 이용백 작가가 교회 파사드를 모자이크로 재배치한 것은 매우 깊은 의도가 숨겨있다. 인류의 지배층은 역사적으로 정보를 소유한 자가 차지했다. 역사 시기적으로 나누면 샤머니스트(족장) · 성직자 · 과학자 · 프로그래머로 개념화할 수 있다. 과거 권력은 성직자였다면 미래 권력은 프로그래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종교도 과학도 믿음의 체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있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과학 역시 객관적이고 완벽한 세계가 아니다. 미완성된 믿음의 체계일 뿐이다. 컴퓨터의 버퍼링 현상은 과학의 빈틈을 보여주는 일례이다. 이용백 작가는 이 과학의 빈틈으로 스텔스기를 관찰하고 세계 지배자들을 매섭게 비판한다. 전쟁 연구자는 있어도 평화 연구자는 없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리고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절대적이라고 가르치는 대안 없는 현실을 질타한다. 교회는 믿음에 기반한 종교적 진리를 상징한다. 모자이크는 테크놀로지의 진리를 대변한다. 그리고 생생한 삶의 경험으로서의 진리를 파악하려는 예술가가 있다. 작가는 이 삼각형의 역학 구도 속에서 인간의 역사와 미래를 담담하게 직관한다. ● 가장 중요한 차기 작품 연작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출발한다. 수원 전투비행장 이전부지로 거론된 화옹지구에 스텔스 폭격기 형상의 구획 틀을 구축하고 그 위에 들불을 놓는 퍼포먼스가 그것이다. 농경사회에서 들불은 언제나 미래적 가치였다. 현재가 아니라 이듬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행위였다. 들불을 놓은 뒤 언제나 풍년을 경험했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대지에서 피어 오르는 들불은 공동체에 심리적 연대감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정화의 의식이자 신령함이 증험되는 축제였다. 동시에 축사(逐邪)의 의미도 포함된다. 이용백 작가는 대지의 들불 퍼포먼스를 필름에 담을 것이다. 그리고 꽃이 피는 계절에 스텔스 폭격기 형상의 대지에 영산홍을 심을 것이다. 4 · 5월에 피는 영산홍은 역사적인 사건이 유독 많이 일어났던 4월과 5월을 연상시킨다. 만개한 영산홍으로 뒤덮인 스텔스 폭격기의 형상은 아름다움과 두려움, 그리고 대지의 원초적 힘과 인위적 미디어의 권위가 서로 자웅을 겨루는 아레나가 될 것이기에 우리는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진명
Vol.20171229e | 이용백展 / LEEYONGBAEK / 李庸白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