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至肖(구지초) 프로젝트 : 닮음에 이르는 것을 모으다

나광호展 / NAKWANGHO / 羅鑛浩 / painting   2017_1218 ▶ 2017_1231

나광호_Cape Coat_리넨에 유채_227.3×181.8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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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광호 블로그_blog.naver.com/art36936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7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공모지원사업 지역예술활동 지원사업

후원 / 경기도_경기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구지초등학교_기운찬_김동혁_김주아_김현서_문다예 성예서_우재현_윤하정_이시연_이재현_이지후_이해원 조영채_조윤찬_지서윤_최서윤_최지율_한지은_허정진

관람시간 / 09:00am~06:00pm

구리시행정복지센터 전시실 Guri City Government Welfare Center Gallery 경기도 구리시 체육관로 74 행정복지센터 2층 Tel. +82.(0)31.550.3751 www.gwdcguri.or.kr

작가 나광호의 九至肖 프로젝트 ● 판화, 설치, 회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지만 아이들이 그린 이미지를 수집하고 조합하는 일관된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 작가 나광호. 필자는 사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당시 "자신의 제자들이 그린 드로잉을 작업의 전면에 앉히고 마는 것이 과연 오리지널인가"라는 의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화면을 차지하는 거의 대부분의 이미지가 그의 제자들 것이었고, 굳이 따지자면 엄연히 본래의 저작권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과연 누구의 것이며, 그 이후 생성된 작품과의 차이는 어디서 찾아야하는지에 관한 의아함이 컸음이 사실이다. ●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와 같은 의구는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듯싶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은 어느 글에서 나광호의 작업에 대해 "타인의 그리기, 손짓과 몸놀림, 가장 원초적인 선긋기, 그리기와 구체적인 대상의 묘사에 이르는 과정을 수집하고 이에 기생하는 작업."이라고 적었다. 무언가 뾰족하게 정의할 수 없던 그의 작업에 대해 그는 '기생하는 작업'이라는 말로 정리한 것이다.

나광호_Cyclamen_리넨에 유채_91×116.7cm_2017
나광호_Dormer Window_아르쉬지에 수채_45×35cm_2017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광호 작가의 작업을 조금 더 고찰할 수 있는 틈이 생겼고, 곧 그의 '기생하는 작업'이 되레 작가가 의도하는 지점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기술복제의 시대에 타인의 손과 눈을 빌어 예술의 원본성, 고유성, 오리지널리티란 유효한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그의 예술의 목적이라면 "타인의 그리기, 손짓과 몸놀림, 가장 원초적인 선긋기, 그리기와 구체적인 대상의 묘사에 이르는 과정을 수집하고 이에 기생하는 작업."은 오히려 합당한 프로세스로써 인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원본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기 위해 원본 그대로의 습속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그의 작업을 목도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궁금증의 첫 실마리는 풀렸다. 1910년대 이후 제시와 선택은 예술의 고유영역으로 자리 잡아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자, 이는 다시 예술이란 유일무이한 원본성을 바탕으로 한 특별한 것이라는 낭만주의적 발상에서 이탈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던 탓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 전반에 대한 미묘한 심정이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었다. 사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벤야민의 논문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에 대한 논의(사진기술과 영상기슬의 발전에 따른 예술의 변화, 대중성의 확보, 종교적 제의적 상황에 머물던 예술의 아우라가 붕괴됨으로 인한 예술발달, 재현으로써의 회화에 참다운 민주성 부여 등)는 20세기 초반 이후 이미 숱하게 전개되어 왔고, 그에 대한 해답 역시 충분히 방출된 바, 그 연장에서 보자면 나광호의 작업은 굉장히 식상한 주제의식일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따라서 단지 '의문제시'로써 국한되는 작업이 아니라면, 또는 창의를 기반으로 한 작업의 연장으로 이해한다면 이 부분에 대한 가치구분은 과연 얼마만큼 '재해석'하여 자신의 독창성을 증명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해도 그르지 않다. 즉, "몇 겹의 재현과정을 보여주고 아울러 그 사이의 무수한 차이와 분열을 드러낸다."는 박영택의 설명처럼 '무수한 차이와 분열'이 어디를 기점으로 하는지 되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광호_In the Orchard_리넨에 유채_227.3×145.5cm_2017
나광호_Irises_리넨에 유채_72.7×116.7cm_2017

작가 또한 이에 대해 인지한 듯, 차이와 분열의 근거로 판화의 제작 방식으로 거리 두기, 차용, 해체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판화의 제작방식으로 거리두기'란 복제성을 지정하면서도 간접적인 프로세스를 통한 별개의 양태를 말한다. 원본은 분명 존재하지만 작가의 손(판화)을 거쳐 여러 층으로 그리드 되어 옮겨지고 덧칠되는 과정(차용의 과정, 전파의 과정)에서 원본의 가치는 희석되고 복제의 의미가 더욱 크게 부여되며, 그로 인한 의미와 성격, 고유성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큐레이터 고원석이 친절하게 나열한 "아이들이 그린 다양한 단편적 이미지들이 각각의 투명한 층에 중복되어 하나의 액자 속에 존재하는 작품(Cooked and Raw 연작)들과 그 이미지를 응용하여 오브제화 시킨 후 모빌의 형식으로 매달아 놓는 설치작품, 그리고 신체의 사이즈를 압도하는 대형 드로잉 작업" 등이 그것이다. 모두 물리적 고유성, 원본이 복제되어 사람들에게 보급됨에 따라 원본이 가지는 아우라가 사라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원본의 가치에 의존하기 보단 환상이나 추상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심리적 정서적 개입에 방점을 둔 작업들이랄 수 있다.

나광호_Quinces_리넨에 유채_72.7×91cm_2017
나광호_Sea Snails_아르쉬지에 수채_29.7×42cm_2017

그러나 '해체'에 대한 부분은 심도 있게 짚을 필요가 있다. 사실 그의 해체에 대한 구체적인 변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비평에서도 이 부분만큼은 속 시원하게 풀어내지 않고 있기도 하다. 이에 부언하자면, 필자는 그의 해체를 기본적으로 인식대상의 구조와 그 항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대립항으로 인식되어 온 대상과 주체의 이분법에서 한발 더 나아가 관계 개념에 주목하며, 구조를 형성하는 요소들 간의 동질성이 전제된 '교환'이라는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있음으로 해석한다. 나광호의 이러한 방법론은 기호학과 같은 표시체계(2013년 작품 「Cooked and Raw」에서처럼)를 비롯하여, 기존에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종류의 관습적인 것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사고의 전환(2012년 작품 「Vincent van Gogh」와 같은 인물 연작 등에서처럼)에서 시작한다. 넓게 보면 이는 예술의 구조와 체제, 의미론 등의 재구성을 넘나든다. ● 이러한 관점에서 작가 나광호가 아이들의 그림에 천착하고 그들의 그림을 자신의 것으로 차용해 재구성하는 과정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설명을 동반한다. 결국 인지된 물질과 모든 예술 작품의 의미는 작품이 창조 되어졌을 때의 예술가의 상황에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찰자의 관점과 의도와 상황에 달려 있다는 명제가 완성되는 셈이다. 다만 작가는 아이들의 그림을 차용하는 것이 작가 자신이 갖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탐닉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힌다. 그 시작이 의외로 스펙터클하지도, 거창하지는 않은 셈이다. 아니, 오히려 그 근원을 자신의 유년시절에서 찾는다.

나광호_The Observatory_아르쉬지에 수채_45×35cm_2017

실제로 그는 필자와의 대화에서 "어른인 작가는 결코 목도할 수 없는 현실에서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모든 것들, 그들의 관점에서 개간되는 현상들을 아이들이 작업에 임하는 모든 것이 즐거웠던 어린 시절에 기인하고 있음"을 밝힌바 있다. 그는 이를 "스스로에게 없는 것을 빠르게 인정할 때,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열리고 형식의 확장이 가능한가를 실험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Infandult(Infant+Adult) 프로젝트'라는 명제도 그런 까닭에 붙여졌을 확률이 높다. ● 흥미로운 건 아이들의 그림을 끌어와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을 넘어, 그 과정이 하나의 태도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작업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일체의 인위성을 배제하고 가장 투명하고 순수한 태도로 작업에 임하는)를 수용하고 작가 자신 또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작업의 영역과 형식을 적극적으로 확장 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원본'이기 때문에 유지할 수 있는 매력에 대한 탐닉을 옹립시킨다. 원본과 고유성, 오리지널이 지닌 요소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추구하고 있음이다. 그리고 그 원본은 바로 '아이들'이다. 그건 예술의 형식이야 복제를 바탕으로 하든, 어떻든 그 미적 태도는 원본인 아이들로부터 배우고 고유성을 추구하고 있다 해도 그르지 않다. 이에 나광호의 작업 태도는 어린아이처럼 그릴 수 있을 지라도 결코 우린 어린아이가 되지는 못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딛고 되레 아이들을 원본 삼아 진일보한다 해도 무리는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의 작업은 어느 하나의 숙주에 '기생'한다고 하기 보단 예술을 개간하는 형식과 태도 면에서 '양가적' 혹은 '병렬적' 작업관 아래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광호_Tree House_아르쉬지에 수채_81×61cm_2017
나광호_White Roof_아르쉬지에 수채_35×45cm_2017

하지만 오늘날 나광호의 작업에서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우선 통일성으로부터 추구하는 다양성의 결여가 눈에 띈다. 이는 오랜 시간 접할 수 있었던 그의 작업에 대한 피로감을 높이고, 자연스럽게 유사한 반복과 방식으로부터의 탈피를 기대하게 만든다. 이 기대 속에는 예술가에게 바라는 기본적인 주문, 즉 무언가 낯선 것, 보다 창의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투영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다행히 최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난 물감 끈끈한 그의 근작들은 그 고대함에 어느 정도 부합할 수 있을 것 같은 여백을 제공한다. 그만큼 작가의 의지와 확신도 명료하다. 더 두고봐야하지만. ● 한편 필자는 그의 작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앞으로 자신의 작업 영역을 보다 적극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큐레이터 고원석의 주문마냥 "그가 그의 작업을 더 적극적으로 사회 속에 투입시키기를 바란다."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답해내야 할 복잡한 문제들을 푸는 열쇠 중 하나가 될 수 도 있을 것이다."에도 그다지 수긍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방향이 그릇된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에 앞서 현재의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내 안의 모든 것을 살펴보고 좀 더 다듬어졌을 때 문을 여는 열쇠를 손에 쥐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은 변화를 탐구할 시점이지, 밖으로 나가는 것에 있지 않음이다. ■ 홍경한

Vol.20171218c | 나광호展 / NAKWANGHO / 羅鑛浩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