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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103_수요일_04:00pm_인천아트플랫폼
2017_1217 ▶ 2017_1226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Hangaram Art Museum, Seoul Arts Center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서초동 700번지) 제7전시실 Tel. +82.(0)2.580.1600 www.sac.or.kr
2018_0103 ▶ 2018_0115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인천아트플랫폼 INCHEON ART PLATFORM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218번길 3, B동 전시장 Tel. +82.(0)32.760.1000 www.inartplatform.kr
사회적 성찰을 통한 자율격동自律激動의 노마드 -김기룡의 근작 牛畵를 중심으로 ● 1. 소 그림의 기원, 소를 그리는 화가들 소는 언제부터 사람들과 함께 하였을까? 문득 김기룡의 牛畵를 보면서 궁금해진다. 우리는 이미 BC15,000년경 그려졌다고 하는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동굴벽화에서 약동감 있는 신성해 보이는 소를 만나볼 수 있다. 풍족한 사냥을 기원하는 듯 실감나는 들소 그림은 간결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또한 '알타미라 동굴과 스페인 북부의 구석기시대 동굴예술'은 그 기원을 BC35,000년경까지 유추한다. 특히 '상처 입은 소' 그림은 형태와 윤곽뿐만 아니라 스푸마토를 통한 원근감까지도 느껴진다. 수렵과 기원의 주술로 추측하는 동굴 벽에 그려진 소 그림들은 한 결 같이 살아있는 듯 생동한다. ● 피카소는 1936년작 전쟁의 아픔을 고발한 게르니카에서의 소이미지 뿐만 아니라 1945-46년의 Bull 드로잉에서 모방의 재현을 버리고 내부적 구조로 그의 관심이 이동하였음을 보여 준다. Bull, XI, January 17, 1946년 작에 이르면 불과 8개의 선과 두 개의 동그라미로 소를 표현하기에 이른다. 소의 중량과 체적, 구체적 형상을 걷어내면서 추상화된 소는 소이면서 공간과 감상자의 참여적인 해석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피카소는 자신의 신념대로 소를 생명으로부터 물화하였다. ● 이중섭은 '황소', '흰 소', '싸우는 소' 등 다수의 소 그림을 남겼다. 1956년 작고하기 몇 년 간 그려진 이중섭의 소는 파리하다. 전란을 격은 반도의 민둥산을 닮은 듯 거죽에 윤기가 없고 앙상한 뼈대를 노출시킨 드로잉으로 역동적이다. 그의 소는 그 시대의 아픔과 가족사의 애환을 담으면서도 해학적이고 해체적이다. 이중섭은 몰골만 남은 소 드로잉을 통하여 생명에 대한 열망과 절규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 까지 소는 인간에게 소 이상의 알레고리를 가지고 화면에 등장한다. 인류의 생존과 싸움의 현장에 소는 타자로 거울로 상존하여 인류를 향해 되묻고 있는 것인가 보다.
2. 김기룡과 소, 牛畵 ● 김기룡은 인천 검단의 목장에서 십여 년간 소를 키웠었다. 김기룡은 소싸움의 잔인성은 소의 품성이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럴 것이다 그가 목장에서 마주하던 하루 세 번 여물을 주고 매일 새벽 세시에 일어나 때 맞춰서 소젖을 짜며 교감하던 소의 품성에 공격성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초등학생 때 꼴 먹이던 암소도 어린아이에게도 순종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소는 순하고 우직하다. 소를 키워본 작가의 말을 빌리면 소는 항상 자기잠자리를 찾아가는 상당히 후각이 예민한 가축으로 설명한다. 경기장안에 들어서면 본능적으로 후각을 자극하는 피비린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리라. 그는 인위적으로 기획 조성된 싸움판의 공포가 소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 작용한 것으로 이해한다. 실제로 대기 장소에서 소들은 온순하다. 그런데 경기장에 들어서면서 부터 이상행동을 보인다. 소싸움에서 먼저 등장한 소는 상대편도 없는데 흥분하고 눈이 뒤집히고 땅메지기를 한다. 이는 상대에 대한 적대시가 아니라 냄새를 통하여 본능적으로 피와 죽음의 공포에 대한 격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흥분된 상태에서도 인위적으로 소머리를 서로 부대야만 비로소 밀치기 또는 지키기의 몸싸움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사실 소싸움은 소 스스로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인위적 상황에 소를 내몰아 방어기제를 촉발시켜 치열한 생존 본능을 일깨우는 인간욕망의 대리전이요 상술의 미장센인 것이다. ● 누구보다도 소의 습성을 잘 아는 그가 정작 소싸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작업을 하게 된 것은 스케치 여행 중 청도 소싸움을 경험하고 나서부터이다. 젖소를 목양하던 그에게 소싸움의 격동은 충격이었다 한다.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성찰을 싸우는 소에 이입하게 된 이유이기도하다. 작가는 십년 넘게 소그림에 천착하였다. 스케치 여행은 대개 소싸움 참관을 포함한다. 역동적 장면을 위하여 고성능 카메라를 사용하고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다. ● 김기룡의 소는 역동적이며 우직하다. 자신을 닮은 소는 힘차게 달리고 부딪히고 상처받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작가의 삶의 무게인 듯 무겁고 버거운 싸움을 보여주고 있다. 젖소를 키우며 그림 그리던 작가가 이제 작가로서 몰입하면서 성난 소를 그리게 되는 것은 그 만큼 작가로서 치열한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 일터이다. 이렇게 김기룡의 牛畵는 자신의 삶을 소를 타자로 거울삼아 비춰보는 성찰의 일기인 것이었다. ● 이러한 그의 태도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완전히 탈바꿈되었다. 역동적 형상과 듬직한 체적을 목적하고 층층이 다져가며 실감을 조성하는, 회화의 구축적 방식을 던져버리고 드로잉 하듯 소의 포효를 드러낸다. 얼마나 많은 화가들이 스케치에서 평생 벋어나지 못하고 모방에 갇혀 답습을 반복하는가? 그러나 김기룡은 이제 스스로 자신을 품었던 회와의 퍼스펙티브Perspective를 외양간 울타리쯤으로 여기고 탈주하는 거친 소가 되어있는 것이다.
3. 주체의 탐구와 사회적 성찰 그리고 회화적 역동성 ● 그의 소는 어쩌면 자화상처럼 거울 같은 존재인 것이었다. 작가는 사유가 자아의 탐구에서 동물 타자animal other로 급 확장되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타자他者의 윤리학을 정립한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철학에서 새로운 주체의 단서를 타자에게서 찾았다.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자아, 주체나 존재의 우위성의 자아론에서 타자로 이동 계승하면서 그 타자의 적용 범위가 되는 시선의 한계를 넘어 시적 사유를 통해 인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동물(고양이)과 인간의 시선 사이, 그 한계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작가는 인간과 소 그리고 그 사이의 자신을 각기 다를 타자로 상정하고 그 시선사이의 오류와 차이를 온몸으로 그려내고자 한다. 작가는 그동안 자신이 투영된 실존적인 단단한 회화를 추구하던 그가 이번에는 답답함을 호소하며 스스로 옥죄었던 존재적 욕망을 던져버리고 있는 것이다. ● 그가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스스로 소가되어 울부짖는 듯 격한 몸짓의 짙은 땀내가 화면에 역동한다. 이로써 그의 화면은 재현적인 회화의 항구를 떠나 부유하는 이동욕망의 첨단으로 내달리고, 그림이라는 격조 있는 양식에서 분방한 신체의 기록으로 변주된다. 격동하는 김기룡의 소는 자신을 넘어 민초의 호흡을 토해낸다. 거울로서의 소에서 묵시로서의 질주로 전향하는 것이다. ● 그는 소싸움이 싸움이라기보다는 지켜내는 방어기제의 분출임을 잘 알고 있다. 소싸움에서 소들은 격투기나 투견에서와 달리 서로 능동적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작가는 소가 경기장에서 피 냄새로 극한상황을 직감하고 절규하듯 서로 버티느라고 온몸의 근육을 떨고 다리가 엉키고, 눈이 뒤집어질 만큼 힘겨워하면서 용을 쓰는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민초들의 몸부림이 겹쳐 보게 된다 한다. 작가는 주체의 성찰과 알레고리Allegory 그리고 역동성의 카타르시스를 추구하여왔으나, 이제는 사회측정학적Sociometry 반추의 실천으로서 소 드로잉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모노 액션소시오그램mono action sociogram처럼 작가는 드로잉에서 신체성과 동일시로 반추의 공연 속으로 빠져든다. ●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소싸움의 현장은 반추동물 습성의 오류인식과 본능적 공포상황의 미장센이 싸움을 쥐어 짠 것이다. 이 원하지 않는 내몰린 싸움은 우리네 인생 판과 많은 닮음이 발견됨을 작가는 직시한다. 상황이 힘에 겨워 분변까지 하고 마는 소들의 몸부림은 뜻하지 않게 내몰린 각양의 삶의 모습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이 싸움의 역동의 순간은 기실 승자의 쾌감이 아니라 버팀의 몸부림이요 울부짖음인 것을 작가는 몸짓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로젠버그의 행동미학을 넘어서 공감으로 동일시된 실천적 몸부림이 격동provocation적 회화로 현전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복사 안에 빠져있는 오늘날 양식화된 예술의 함정과 그물망을 오롯이 벗어난 김기룡의 회화는 자율적이며 격동적이다.
4. 해체와 확장의 메지기 ● 김기룡의 회화는 호흡이 느껴진다. 절규하는 소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이를 반영한 작가의 신체의 반응에 따른 숨이 차오르고, 빠르게 거칠게 화면을 긁고 더해지는 칠의 숨소리가 겹쳐 들린다. 그리고 이 모든 숨은 오늘을 견뎌 사는 모든 힘든 이들의 한 숨을 담는다. 그의 화면에는 드로잉 사이로 틈이 생겨난다. 사이이면서 공간이기도하고 비껴 겹쳐지는 층위의 화면은 이미지를 구축하기 보다는 던져지게 한다. 정주하지 않고 변주하며 내 달리는 그의 화면에서 퍼스펙티브는 해체되고 생동하는 차이의 긴장과 관계항이 새롭게 생성된다. 그의 작업은 푸코의 말처럼 "우리가 속한 역사적 시대에 대해 끝없이 비판하려는 철학적 에토스ethos를 영원히 재활성화"하는 것이리라. ● 이와 같은 역동적이면서 동시에 드로잉적인 표현을 위하여 작가는 붓 대신 수세미를 사용한다. 정형의 예측 가능한 용도를 지닌 붓 대신 거칠고 자유로운 발림과 지움을 위한 변주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자율의 도구를 활용하기 위하여 직접 수세미 농사를 짓는 작가의 태도에서 격한 변주를 위한 장인의 집념을 읽는다. 땅메지기하는 소의 격동에서 영감을 얻은 수세미 드로잉은 태생적으로 빈 공간을 생성한다. 수세미의 섬유질 올 자체에 틈이 있기도 하고, 분방한 칠 자체가 선의 중첩으로 형성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 이제 화면에서 여백은 안정적이고 종속된 부수적 공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백의 공간은 불특정한 상태로 이어 반영되는 신체의 흔적에 반응하기위해 열려있는 잠재태이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공가능성compossibilite은 사이 공간 등 구별되는 차이의 조건들이 모두 진리를 향해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주체에 의해서 생산되며 어느 하나를 배제하거나 혹은 갇혀버린 종속된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다. 사이와 공백이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지는 않지만 모든 잠재와 연동되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으로 김기룡의 회화가 물리적으로나 개념적으로 확장적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5. 격동으로 지속하는 노마드 ● 그의 그림은 경험과 기억을 소환하여 자신의 신체를 통하여 되새김하는 반추의 드로잉이다. 그는 소싸움은 삶의 벼랑 끝에서 본능적인 절규의 몸부림임을 역설하고 이를 닮은 표현방식인 신체성의 드로잉으로 시현한다. 소의 땅메지기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예지의 몸부림인 것이다. 직감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며 본능적 자율성이다. 작가는 실제 작업과정에서 땀을 흘리며 분출하듯 스스로 소가되어 격동한다. 땅을 차고 부대고 버티고 떨고 하는 경기장에서 만난 수많은 소들의 울부짖음이, 이 시대 타율의 울타리에서 버텨내며 땅메지기 하는 민초의 아픈 삶을 몸으로 받아 화면에 쏟아 낸다. 그가 그리는 소는 소에서 자신으로, 다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버티기에 내몰린 이웃의 몸부림으로 번역되어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 내던지듯 그려내는 수세미드로잉을 통하여 주체의 현실이 해체되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자화상으로 확장된다. 점차 드로잉의 진행 속에서 수많은 틈과 시간의 사이가 생성된다. 그리고 연속과 지속이 예지되면서 화면은 베르그송의 시간성 '지속'의 개념 안에서 이루어지는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시간 속에서 각기 다른 선과 흔적들은 겹쳐지면서 소가되고 울음이 되고 자신이 되며 우리가 된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순수지속'은 삶의 연속에서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분리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의 의식에서 지속적으로 의식하는 시간이다. 베르그송에게 지속이란 시계로 측정하는 시간, 누구에게나 동질적이고, 등질적으로 분절되는 공간화 된 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김기룡의 회화는 유기적이나 비종속적인 자율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체성의 드로잉으로 소의 격동을 우리의 아픔으로 그려낸다. 그 아픔은 자신을 넘어 동시대의 아픔과 역사를 관통하는 것이다. 모든 오류인식과 타율의 퍼스펙티브에 저항하는 김기룡의 실천적 소 드로잉은 그 옛날 동굴 속에서 선진이 그려낸 소를 떠올리게 한다. 동굴 밖의 현전을 동굴 안에 시현한 그는 선견자이었을 터이다. 이제 소싸움의 소를 넘어 자신을 넘어 모든 정주하는 울타리의 허구를 깨트리고 질주하는 작가의 실천 그것은 연속성을 가지면서 노마드로 변주한다. ■ 조명식
Vol.20171217a | 김기룡展 / KIMKIRYONG / 金起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