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7_1208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강태훈_물질과 비물질_서평주_손혜경 연구모임 아래_양유연_이덕형+조주연 이상엽_이우성_홍진훤
기획 / 신양희 디자인 / 배지선 공간디자인 / 비유유피 주최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문화가있는날(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 11:00am~09:00pm
아르코미술관 ARKO ART CENTER 서울 종로구 동숭길 3 제2전시실 Tel. +82.(0)2.760.4850 art.arko.or.kr www.facebook.com/arkoartcenter
러시아혁명의 현재성과 우리 인민의 잠재성―사회는 아주 오랜 시간 그대로 멈춰 있기도 하고, 때로 조금씩 변화하기도 하는데, 더 이상 그 체제가 유지될 수 없는 한계 지점이 오면 다른 사회로 이행한다. 인류의 긴 역사는 몇 번의 생산양식의 변화를 거치면서 다른 세계로 이행했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로 인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자본주는 인류의 진보를 앞당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과정이 너무나 참혹했다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이다. 지금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다른 체제로의 이행은 역사적 필연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존속하지 않지만, 100년 전 인류의 한 사회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길로 사회주의 혁명을 관철했다. 러시아혁명이라 명명되는 이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 내재되어 있던 본성을 끄집어낸 사건이었으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 러시아혁명은 피지배계급의 열망과 이를 이끈 볼셰비키의 협력으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신호탄이었다. 인민으로부터 끌어낸 레닌의 4월 테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현실화되었고,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실현된 것이다. 러시아혁명은 이전의 유럽 혁명들과 연결되는 지점이 존재하지만, 피지배계급이 혁명을 통해 국가와 정치를 획득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실현하고자 했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의의는 분명 특별하다. 물론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어떤 체제로 인민들과 함께 나아갔는지는,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부정적이고 왜곡된 것으로 남아 있다. 냉전 이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대립 상황에서 남한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에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사라짐을 사회주의의 실패라 규정함으로써 역사적 의의를 폐기하고자 하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그들의 경험은 더 많은 발전을 요청하겠지만, 이는 인류의 미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이 전시 『옥토버』는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러시아혁명에 주목하면서도 한국사회에서의 계급투쟁과 계급적대를 한국의 근현대사와 당대의 운동을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 눈에 전혀 다르게 보이는 두 역사에서 어떤 동일성을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에 전시는 두 섹션을 개념적으로 분리하였는데, '러시아혁명의 현재성'과 '우리 인민의 잠재성'이 그것이다. 1섹션 『러시아혁명의 현재성』은 러시아혁명을 이끌었던 주체들에 대한 시각적, 조형적 탐구, 혁명 전후 러시아 미술에 대한 연구, 혁명이 사라진 후의 풍경, 혁명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 등 당대적인 주제를 탐구하면서도 이를 현재화하는 작업으로, 강태훈, 물질과비물질, 연구모임 아래, 이덕형+조주연, 이상엽이 참여한다. 2섹션 『우리 인민의 잠재성』은 한국사회에서 계급투쟁과 계급적대 그리고 이를 이끌었던 주체들에 대한 역사적이고, 당대적인 고찰로 서평주, 손혜경, 양유연, 이우성, 홍진훤이 참여한다. 전시는 비록 개념적으로 분리되었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 미션은 전시라는 맥락을 통해 같은 방향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 이 전시가 다루고 있는 러시아혁명은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연구를 면밀하게 진행한 결과물이 아니며, 또한 이 자리에서 러시아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공과를 따지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러시아혁명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고 어떤 이념과 이상을 보여주었는지에 주목하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더 방점을 두고자 한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의 의의를 표현하면서도 그것을 우리의 현실과 밀접하게 결합시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했던 러시아의 상황과,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의 변혁보다는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해 달려온 우리의 역사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100년 전의 인민들에게 놓인 과제와 현재 우리 인민에게 놓인 과제 또한 다르다. 그럼에도 이 전시는 지배/피지배의 계급관계에서 발생하는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이 한편에서는 혁명을 성취하는 모습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잠재된 모습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를 혁명의 성취냐 아니냐의 차별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계급 관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이상이 어느 시대에나 작동한다는 동일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통해서 현재 우리는 어떤 시대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러시아혁명과 더불어서 좀 더 선명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 지난해 10월 말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으로 시작된 광장의 촛불은 그를 대통령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을 뿐만 아니라 '적폐청산'이라는 국민적 의지를 만들었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정치세력을 앞질렀던 것은 뜨거운 열정뿐만 아니라 이성과 합리, 지성과 상식을 보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정치세력 일반과 국민 사이의 권력 투쟁은 결국 이 사회에 은폐되어 있던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는 여전히 국가와 정치, 사회를 변화시킬 주체로서 인민들의 진보적인 의의를 말해준다. 이 전시에서는 이러한 투쟁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따져보기 위해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계급투쟁을 작업의 주제로도 염두에 두었다. 분단과 냉전, 산업 근대화라는 엄혹한 시대에서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수탈과 폭압이 가혹했지만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투쟁이 한 번도 사라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위해서 수많은 투쟁과 죽음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한국의 근현대사는 말해준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를 두고 한국사회의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계급투쟁이 이 전시의 논의 대상이 되었으며, 우리 운동의 의의뿐만 아니라 한계까지도 전시의 주제로 삼고자 했다. ● 이처럼 『옥토버』는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지배/피지배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며, 더 나은 사회와 체제를 이성적으로 열망하고 희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사회의 진보적인 힘에 대해 예술 언어는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담아내고자 한다. 현실의 문제를 온몸으로 감각하면서 그것을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이성적으로 표현했던 시대도 분명히 있었다. 물론 그들 당대에 실현하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역사와 후대는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 명확한 현실 인식 아래 의식적인 운동으로서의 예술, 사회의 모순을 끝까지 밀고 나간 예술이 시대마다 존재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모험이 없다면 예술이 가진 역사적 상상력과 잠재성이 드러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전시는 예술이 다른 사회를 향한 이상과 비전을 떠안아 볼 수 있다는 시도이자 인민들의 건강함과 투명함이 역사, 진보,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빛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전시이다.
강태훈 ● 「반영된 시차#2」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미디어설치 작업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역사적 공간을 열었던 10월 혁명, 하지만 70여 년 만에 동구 사회주의가 문을 닫음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은 실패라 간주된다. 작가는 이러한 규정을 거부하고 혁명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생성 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며, 그들의 이상과 소망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희망 속에서 개념적으로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가 선택한 수평의 기념비는 수직적 형태의 기념비와는 구별된다. 이는 작가가 러시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중요시했던 '현실성'에 초점을 두고 '현재성'에 맞추어 고안한 것이며, 또한 쐐기이자 확성기 모양의 원뿔 구조물은 러시아 구축주의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단단하고 육중하면서도 낮은 기념비에 투사된 영상은 혁명기와 이후의 기록영상(레닌, 노동절 퍼레이드, 10월 혁명, 2월 혁명, 코민테른, 문화혁명 등)을 짜맞춘 것으로 당대인들의 혁명 의지와 새로운 삶에 대한 움직임을 응시하도록 한다. 수평의 기념비이자 여러 면의 스크린으로 기능하는 쐐기는 관람객에게 고정된 시점을 요구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드러난 역사가 결코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표현이자 생성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혁명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는다. 먼 시간을 지나 우리 앞에 나타난 의식적 과거는 그 한계를 넘어 여기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물으며, 현실의 패배주의에 맞선다.
물질과 비물질 ● 물질과 비물질의 「∞ 사각형 이야기」는 엘 리시츠키의 책 『두 사각형에 관하여(about 2 squares)』(1922)의 형식과 형태를 빌려 리시츠키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보유하면서도 현재화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리시츠키는 혁명 이후 새로운 사회주의를 만드는 데에 예술의 사회적인 확장에 대해 고민하였고, 공산주의적 이상과 비전을 미술을 넘어 디자인, 건축, 출판에서도 접목하고 제시하고자 했다. 이 책은 기하학적 도형을 이용하여 공산주의적 비전을 분명한 메시지로 전달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복잡한 개념을 단순화한 작업이었다. 물질과 비물질의 「∞ 사각형 이야기」는 리시츠키의 책에 대한 현재적 해석으로, 현재의 주체들에 대한 생각을 담아내고자 한다. 두 사각형을 통해 리시츠키가 정리하고자 했던 한 세계에 '∞ 사각형'이 등장하고, 이들은 정리된 세상을 다시 어지럽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두 사각형이 정리했던 이전의 세상과 '∞ 사각형'이 어지럽힌 현재의 세상은 비록 다르지만, 그 근본은 같은 것으로 그려진다. 즉 그들이 상상한 무한은 개별성을 강조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가능성이 발현되기를 희망하며 흩어지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균열과 분열이 중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구모임 아래 ● 「어떤 시대에 대한 기억」은 러시아혁명을 통해 드러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탐색함과 동시에 이를 한국근현대사의 맥락과 결부시키는 도서와 사료로 꾸려진 아카이브 작업이다. 이 도서와 사료들은 이 전시를 관통하는 지성사적 맥락과 실천적 맥락을 가늠하는 내레이션의 역할을 한다. 5개의 시대별로 나누어진 책들은 '혁명'을 키워드로 삼은 것이다. '혁명 이전', '혁명', '강요당한 혁명', '혁명을 포기하다', '사라지지 않은 혁명'을 통해서 러시아혁명과 연결된 책, 한국사회에서 혁명이 어떻게 재생산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책, 그리고 소비에트 해체 이후 사라져 버린 혁명과 그럼에도 현재 남아 있는 혁명의 의미를 따지는 책들로 꾸려졌으며, 일부의 책에서 발췌한 글도 전시된다. 이러한 흐름으로 배열된 책들은 혁명을 고정화하고 고착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상황에 따라 의미화되는 지점이 달랐음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내적으로 관통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보고자 한다. 한편 한국운동사와 관련이 있는 사료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오픈 아카이브에 기증된 사료에서 추출한 것이다. 국가와 자본,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역사적 관계에서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게 어떻게 혁명을 강요했는지, 그리고 피지배계급은 이에 맞서 어떻게 싸웠는지를 70년대부터 90년대 초 주요 사건을 사료로 제시한다.
이덕형+조주연 ● 「예술의 혁명, 혁명의 예술」은 비잔틴-러시아 정교 사상 전공자 이덕형과 서양 현대미술이론 전공자 조주연이 『옥토버』에 연구자로 참여하여 공동으로 저술한 연구 결과물이다. 두 연구자는 집필에 앞서 서로의 저서와 논문을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또한 두 차례에 걸친 대담을 통해 19-20세기 초 러시아의 대내외적 역사의 변화와 세기말의 시대상, 그리고 이와 함께 새롭게 발전을 모색하는 러시아 근현대 미술에 대해 전반적 토론을 진행하였다.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위대한 실험'이자 최초의 유물론적 미술인 '구축주의(Constructivism)'와 '생산주의(Productivism)'는 예술의 혁명인 동시에 러시아혁명과 긴밀히 연결된 혁명의 예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향의 미술사조가 탄생하기까지 러시아 화단은 집약적이고도 독특한 현대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과정은 서양미술사에서 단순하게 취급되거나 누락된 것이기도 한데, 이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현대미술의 전사(前史)는 두 연구자가 교환한 서신을 통해 소개된다. 이후의 러시아 미술의 전개는 두 연구자 각자의 관심과 연구 분야에 집중하여 집필되었다. 이덕형의 「재현-구상에서 절대-추상의 길로」는 곤차로바, 라리오노프 등의 신원시주의, 광선주의, 입체-미래주의를 지나 말레비치의 쉬프레마티즘을 살펴본다. 말레비치가 열어 놓은 절대-추상의 길을 이어받은 이후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조주연의 「예술의 혁명! 혁명의 예술?」에서 이어진다. 타틀린, 로드첸코, 리시츠키로 대표되는 구축주의와 생산주의는 러시아혁명을 전후해서 전개된 예술로 장구한 서양 미술의 역사에 최초로 러시아 미술의 독보적 성취를 남긴 예술적 혁명을 일으켰으나 정작 러시아 혁명과의 관계는 순탄하지 못했음을 제시한다.
이상엽 ● 이상엽의 사진 작업은 2004-2006년 작가가 러시아를 횡단하며, 소비에트 체제 이후의 러시아인민들의 삶과 풍경을 담은 『레닌이 있는 풍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중 주요 도시에 세워진 레닌의 동상과 함께 그 곁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이 전시된다. 그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10년이 훌쩍 지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던 이유는 젊은 날의 초상을 마주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의 이십 대에 이념과 이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는 그가 떠난 시대에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레닌의 모습과 인민들의 모습을 렌즈에 함께 담아낸다. 역사가 죽은 것과 죽어가는 것에 경의를 표했던 것처럼 그는 레닌의 동상을 경의의 지표로 삼은 것이다. 이 전시를 위해서 10여 년 전 사진을 다시 꺼낸 작가는 러시아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키릴문자 형태를 차용하여 레닌의 말들을 새겨 넣음으로써 원래의 사진이 갖고 있던 무게감을 조금 덜어낸다. 하지만 그 단어들이 주는 문자적, 이미지적인 낯섦 못지않게 레닌이라는 표상으로 남은 사회주의는 흑백 사진이 주는 무게만큼 가볍지 않다. 사실상 이 사진들을 통해 전면화된 사회주의라는 표상은 이면의 부재를 환기하는 장치이지만, 그 부재가 텅 빈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무언가로 꽉 차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서평주 ● 「연극이 끝나고 난 뒤」는 탄핵정국을 맞아 광장에 불었던 바람이 조기 대통령 선거, 즉 투표라는 대의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일단락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영상 작업이다. 작가는 광장에서는 적폐청산이 울려 퍼졌고, 이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여러 사회적 의제들이 등장하였음에도 모든 힘이 현실 정치의 장으로 흡수된 것에서 모종의 실패감을 느낀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선거라는 빅 이벤트로 사라져 버린 현실로부터 87년 민주항쟁을 기억해낸다. 분할된 화면에서 2017년과 1987년 광장의 뜨거움을 연결하는 장치(매개)로 삼은 것은 움켜쥔 주먹과 '팔뚝질', 그리고 투표라는 행위이다. 작가는 저항의 징표로서 움켜쥔 주먹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행위의 결과가 투표였음을 용지를 떨어트리는 가벼운 손으로 대체하지만, 그럼에도 싸움을 멈출 수 없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렇게 전개되는 이미지와 함께 그것이 채 담아내지 못한 속내를 내레이션을 통해 전달하는데, 이는 우리 운동의 한계를 연극과 같은 것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쉽게 열망했던 것, 체념으로 귀결되어 버린 것, 그럼에도 말하지 못한 그 무엇을 감지한 것, 어쩌면 서평주의 영상은 더 해야 할 것 같고, 더 밀고 가야 할 것이 있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손혜경 ● 「연희예우」는 자본의 자기증식을 위해 잉여가치의 생산이 주목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것을 지양하여 진리로 나아가고자 하는 역사의 필연성을 은유적으로 구조화한다. 이에 작가는 먼저, 이 체제의 모순이 절대적 법칙 안에서 운동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그리고 사물을 재료(자기계기) 삼아 그것의 형태, 기능 외 그 물질의 본질적 속성을 대립시키고 통일되는 투쟁을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조형적 구조물은 합리적 구축을 위한 개체와 개체, 개체와 전체가 힘의 균형을 유지해 보이는 '연희'(演戲)의 자리이지만, 동시에 모순과 대립 관계가 발현되는 장소이다. 즉 한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은폐되는 것이 있음을 구축한다.
양유연 ● 양유연의 회화는 동일방직 노동자 투쟁을 기록했던 사진이 바탕이 된 작업이다. 작가는 일 년 남짓 작업실로 머물렀던 공간과 멀지 않은 곳의 한 장소에서 역사적인 기억을 만났다. 그가 찾은 곳은 과거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투쟁이 일어났던 장소였지만, 지금 그 현장은 그 쓰임을 다하고 방치된 곳이었다. 70년대 민주노조를 만드는 과정은 외부의 도움으로 시작된 것이었지만 노동자들의 의식의 성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국 섬유노조 동일방직지부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사수 투쟁은 한 장의 사진으로 대표될 만큼 노동운동사의 한 부분을 채웠지만, 사실 그 과정은 긴 시간 지속된 싸움이었다. 회사 측의 집요한 공작, 전국 섬유노조, 경찰, 회사 측에 매수된 노동자들의 방해 등이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투명한 노조를 지키는 것이 자신들의 몫임을 잊지 않았다. 작가는 이러한 그녀들의 의지를 사진을 참조하여 복원함으로써 역사적인 순간을 불러낸다. 물론 작가가 기존에 보도사진을 참조하여 작업할 때와 같이 일부를 지우고 확대하는 변형을 취했지만, 사실적 묘사를 도드라지게 함으로써 역사에 대해 긴장된 태도를 보여준다. 아직은 그 무엇에 대해 명확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어쩌면 그 또한 그 기억에 대한 올곧은 대응일지 모른다. 작가가 불러낸 근현대사의 한 장면은 노동자 투쟁이라는 억압된 기표를 불러냄으로써 그 기억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표상은 달라졌다 하더라도 그 모습이 여전히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우성 ● 이우성의 천 그림 「내일이 아닌, 오늘을 위한 노래」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향해 일렬로 선 사람들이 그 방향을 향해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며 그린 것이다. 이 작업은 작년부터 올해 초반까지 광장에 모였던 에너지를 상상하며 응축시킨 작업이다. 12명 각각의 사람들은 여러 세대의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세대나 삶의 양식을 드러낼 수 있는 옷차림과 같은 모습을 통해 각각에 캐릭터를 부여하고 이들의 대표성을 이끌어낸다. 이들은 한 방향을 향해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지만, 각각이 그 바람을 어떻게 체감하는지는 표정이나 태도를 통해서 약간씩 다르게 비친다. 어쩌면 그가 광장에서 본 것은 이 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직된 힘이나 지도력을 갖추었던 힘이 아니라 개개의 의지와 힘이 모여 시작하고 끝맺었던 싸움에서 그 누구도 무언가를 쉽게 확신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이 고조된 감정으로 표현되든 담담함으로 표현되든 사실상 그것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함께 해내었던 그 순간을 담아낸 이 그림은 모종의 승리에 대한 환희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물론 작가는 이 그림을 집회의 순간으로만 한정 짓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경험을 사후적으로 진술함으로써 '떼'나 '무리'로서의 대중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재사유하고, 각각의 개인들에 애정을 쏟으면서도 이들이 함께일 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끌어내고 이를 이미지로 전환하는 데에 주력한다.
홍진훤 ● 「노래하듯, 웃지 않도록」 연작은 작가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각종 희귀병을 얻은 노동자들과 유가족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나온 사진들이다. 대기업 삼성을 상대로 10년 동안 지속하고 있는 이들의 싸움은 사고 발발부터 해결을 위한 과정까지도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이 아닌 상품 생산을 위한 근무환경에서 노동자들의 신체가 화학약품에 고스란히 노출됨으로써 희귀병은 잠복했다. 아무런 예방도 없었으며 사고가 수면화 되었을 때도, 자본은 그것을 부정하고, 은폐하고, 회유하고, 압박하기에 바빴는데, 그것은 자본의 본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여전히 산업 재해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만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삶과 투쟁을 전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응축되어있는 현재 진행형 투쟁을 발화한다는 것의 어려움, 이미지화한다는 것은 다른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작가는 의연하고 담담한 인물들의 초상을 사진에 담으면서도 그들 일상의 풍경이나 그들이 바라보는 삶의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본 것을 대리하는 사진들은 곱지만, 한편으로 슬픔이 서린 풍경이기도 하다. 산업 재해 이후의 삶, 그것이 일상의 풍경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면, 따라서 그 일상은 보이지 않는 투쟁의 장소가 된다. 이처럼 작가는 삶의 투쟁을 전면화함으로써 오히려 산업 현장의 투쟁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 신양희
Vol.20171210c | 옥토버 OCTOBER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