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7_1209_토요일_04:00pm
참여작가 곽진영_김지영_김한나_박창규_엄태신_이동원 이서희_이은지_정선욱_정선주_정훈_지두리
주최 / NNR 후원 / 경기문화재단 기획 / 정선주
관람시간 / 10:00am~05:00pm / 15일_10:00am~12:00pm
갤러리 와부 GALLERY WABOO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천로 35 Tel. +82.(0)31.590.2611 www.wabujumin.or.kr/bbs/gallery
「현대성의 경험」에서 마샬 버만(Marshall Howard Berman)이 말한 바와 같이 현대인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발전의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공존의 틀을 파괴하고 발전의 잠재성만이 강조된 이러한 비극은 현대성에서 벗어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며 고민하고 바라보는 소통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예술가의 작업은 자신의 작업세계 속에서 이러한 현실의 이면을 비추는 거울로서 작동한다. [미묘한 소통展]은 예술가의 경험을 통해 소통의 다양한 형식을 작품으로 풀어놓은 전시이다. 참여 작가들은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이 서로 대면하며 공존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곳으로 백지와 같은 갤러리 공간을 사용한다. 관객의 시신경과 작가의 소통방법이 교차하고 미묘한 지점을 형성하여 '본다'에서 '느끼다', '경험하다', '기억하다', '살아가다' 의 과정으로 분화할 수 있는 장소로 갤러리의 의미가 확장되길 바란다. ■ 정선주
사람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설명하지 않고 특유의 관점과 편견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현상에 접근한다. 관념은 무수한 요소들에 의해 사람마다 다르게 형성되는데, 유독 길이 난 곳으로 더 잘 흘러서 그 길을 더 깊고 좁게 패이게 만든다. 시간의 축적과 함께 길이 나 버린 사고 구조는 촘촘히 짜여 있는 직물처럼 상당히 견고한 것이어서 그 위에 새로 새겨지는 정보는 틀에 맞게 삭제되거나 덧붙여진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내재된 편집기능에 의해 선택되고 버려지는 것들이 많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의 경험이 투영된 기억 속의 장소나 사건을 마치 본질인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우리의 기억은 결코 날 것이 아니며, 사고 구조와 감정의 동요가 뒤섞여 생성된 혼합물 혹은 편집물이다. 때론 골똘히 해독(解讀)해야 한다. 나는 안료를 종이 표면에 얇게 쌓거나 물리적으로 긁어내어 종이에 '길'을 내는 일,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물과 안료를 '고이게' 하는 일, 형성된 화면에 결코 온전하지 않은 대상과 그 반영을 새기는 일을 반복하면서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담으려고 노력한다. 이번 작업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만들어지기까지 사용되거나 제거되는 일종의 재료들을 나열한 것이다.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길을 낼 것인지 혹은 반영을 얼마나 더 일그러지게 그려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내 기억의 원본성에 대한 의문과 사고방식-이를테면 늘 하던 대로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관점을 개척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 곽진영
어린 시절 우리는 여러 놀이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했다. 엄마놀이나 경찰놀이 등 그 시절 우리에게 놀이는 재미이기도 했지만 삶이기도 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내 스스로가 특별해지는 상상을 하고는 한다. 어린 시절 우리가 보자기를 어깨에 두르고 슈퍼맨의 포즈를 취하면서 날아다니는 상상을 했던 것처럼, 이마에 별 스티커를 붙이고 울트라맨이 되었던 것처럼. 나는 나의 상상을 통해 실제로 허구의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린 시절부터 즐겨 먹었던 음료가, 사실은 내가 변신할 수 있는 물약이지 않았을까?' 라는 식의.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일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통 게임 속에서는 특정 NPC가 주는 퀘스트를 통과하면 그 보상으로 '스킬'이라는 능력을 얻게 된다. 나는 그 '사건'을 현실로 가져오고자 한다. 그리고 퀘스트와 보상을 통해 개인의 일상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되는 상상을 해 본다. ■ 김지영
영상 '원더랜드 큐브'는 큐브를 제작하고, 설치하고, 전시한 모든 과정을 담은 영상이다. 영상에는 길고양이들을 위한 '캣트리 큐브', 휴식을 선물하는 '브레이크 큐브',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미디어 공간 '엑스 큐브' 등 총 다섯 개의 큐브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영상은 기록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 3개월 이상의 긴 제작기간 동안 있었던 수많은 대화들, 몸의 접촉들, 함께 만들어 나갈 공간에 대한 설렘과 기대 또한 기록을 담고 있다. 그 과정 중 야외에 설치한 엑스큐브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소통을 경험했다. 지하철 역 근처 공원에 설치된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공간은 무연한 시민과 시민들 사이의 연결점을 만들어 주었다. 공원 속 덩그러니 설치된 큐브는 단순한 같은 것을 보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서로 이야기하고 소통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확장되었고, 그 과정에서 경험한 '소통'이 '미묘한 소통_'본다', '느끼다', '경험하다', '기억하다', '살아가다' 전시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할 것이라 생각한다. 일부러, 혹은 우연하게 전시장을 들렸을 당신이 영상을 통해 내가 경험한 소통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 김한나
나는 어떤 현실에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고민을 한다. 현실을 생각하다보면 내가 지향하는 삶이 정로를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고민을 하면서 지하철이나 버스 안 또는 거리에서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면서 있을까. 어떤 삶을 살까. 그 사람의 표정을 보며 사람을 들여다보며 나의 고민을 나눈다. 매일 매일 똑같은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원치 않지만 현실적 고민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면, 사회의 메카니즘 속에 말려들어 지배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사진들은 일상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로써 관객들이 들여다보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작업으로 해석되길 바란다. ■ 박창규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다. 계속되는 소통에 대한 요구는 이처럼 정의내리기를 시도하게 한다. 하지만 예술을 통해 소통하려는 나에게 소통은 배움이다. 끊임없이 작업하며 그 과정을 공유하고 워크숍 등을 통해 참여자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소통을 위해 소통하는 방법을 학습한다. 그것이 관객 혹은 참여자가 작품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연결할 수 있는 형태라면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의 소통을 통해 미묘한 지점을 형성한다. 함께한 치매어르신들의 주름진 모습 뒤에 뽀얗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소환하고 싶은 지점이 그곳이다. 소통의 사전적 의미가 담긴 페이퍼 앞에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캐릭터는 바로 그 지점을 바라본다. 그리고 작업으로 드러내고 싶은 나의 다음을 드러낸다. ■ 엄태신
...달은 우주적인 생명력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동시에 땅 위의 삶을 위한 생명의 원리로 간주되면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들 전통사회의 신앙과, 농경을 위주로 하였던 현실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달은 한국인의 정서적 체험 내지 심미적 체험 속에서도 매우 큰 몫을 담당해왔다....._ ■ 이동원
'티 브레이크(tea break)'은 농장의 농부들이 일을 하다 잠시 쉬며 차를 마시는 시간에서 유래했다. 이 시간으로 인해 농부들의 작업 능률이 올라갔고, 현재 직장인들의 '티타임(tea time)' 역시 중요한 휴식시간으로 자리 잡혀 있다. 휴식, 흔히 회자되는 키워드인 '힐링'은 자신이 자신을 위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무엇을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내가 이번 전시에서 선택한 오브제인 자판기는 올해 상반기 열풍을 일으켰던 '뽑기 기계"의 모태라 할 수 있다. 최근 이상현상처럼 열광적인 반응을 드러냈다고 하는 '뽑기 기계"는 성공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욕망을 투영한 단발적인 힐링 머신이 아니었을까? 관객은 워크숍에 참여하여 500원 어치의 코인으로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는 티백을 뽑을 수도, 전시되어있는 어떤 작가의 작품을 뽑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 워크숍을 통해 미묘한 소통의 틈을 보여주고 싶다. ■ 이서희
생각만 해도 설레서 잠이 오지 않는 순간, 혹은 이불을 차버리고 싶을 정도로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순간. 떠오르는 상황 속의 색깔, 그 시간의 내음, 우리에게는 이런 감각적 순간이 있다. 보고 느끼고 경험한 순간의 기억은 축적의 시간으로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이 작품은 거미줄처럼 이어진 관계망(web)과 축적된 기억을 이미지로 가시화하여 설치한 작업과 전시기간 동안 이어지는 워크숍을 통해 크고 작은 소통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 작업이다. 배경의 이미지 프린트는 예술을 매개로 한 해 동안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담은 축적된 이미지이다. 희미하게 혹은 어둡게 흑백으로 표현하여 수없이 얽힌 관계의 바탕을 이루는 기억으로 작용하는 소통은 언제 어디서 어떠한 관계맺음과 단절로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들려오는 길거리의 대화들로부터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이벤트까지 일상의 저변에 깔려있는 미묘한 소통의 방법은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어나가는 것임을 잘업과 워크숍을 통해 경험하며 확인하길 바란다. ■ 이은지
군무는 최근 커뮤니티 작업을 통해 대중과의 소통방법이 되어버린 매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온라인 매체는 일방적으로 시공을 초월해 의미를 전달하고 대상들을 모으며 특정장소에 함께 할 수 있는 고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초면인 그들과 가상의 내가 매체를 통해 공통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토대로 소통하며 관계를 쌓아갈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온라인 매체의 특성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문제점으로 작동되기도 하고 편리한 지점으로 작동되기도 한다. 특히 예술을 매개로 교육, 치유, 작품 등 다양한 활동을 영위해야 하는 현대의 예술가들에게 대중, 곧 참여자들과의 소통은 여러 접점을 확인하게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온라인에서 보여주는 현상과 비슷하게 오프라인에서도 온라인의 획일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경험은 매체의 특징이 특징이 아니라 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한 곳을 바라보는 일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다량의 조형물은 현대사회의 이러한 현상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정선욱
manual sketch는 아카이브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업을 잘 실패하고 잘 시작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어 온 기록이다. 유리병 오브제 안에 담긴 manual sketch는 다시 꺼내 읽을 수도, 볼 수도 없다. 내가 생각하는 소통은 바로 이런 것이다. 기억 안에 축적되어있는 그리고 그대로 꺼내 보거나 읽어 내려갈 수 없는 것. 하지만 그 축적된 기억으로 다음을 살아가며 잘 시작할 수 있는 것. 어느 때부터인가 편리함을 추구하고 자기본위대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시된 환경에서 다소 불편한 진실을 마주대하고, 고민하고, 움직여야하는 상황에 처해있을 때 우리는 기억 저 너머에 있는 감정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를 수리(repair)하며 부정적인 것들과 함께 머무는 연습을 하게 된다. ■ 정선주
Time in Time's는 시간의 틀 안에서 만들어지는 내 궤적의 두 번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시간에 초점을 맞춘 Time's와는 달리 그 초점이 타자에게 넘어 감으로 다른 의미로 시간을 재해석 혹은 확장해서 읽어본 작업이다. 이 작업은 다중을 상대로 관계 맺기를 통해 타자의 시간들을 드려다 보게 되고 개개인의 삶의 궤적들의 고민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술가와 함께한 참여프로그램, 예술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하루라는 틀 안에서 다른 시간과 공간을 경험한 사람들과의 만남, 다양한 연령과 환경에 따라 각자의 삶을 축적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의 작업에 어떠한 흔적으로 남게 되었는지 조심스레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일렬로 늘어선 도자작품은 각기 다른 모양,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였음에도 각각의 삶의 축적과 표현방법이 다르듯 각각의 도자조형물 역시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 중 인상이 깊었거나 충격적이었거나 대중의 편견에 대비되는 삶들과 만났을 때 표현되는 강조와 대비는 슬쩍 눈에 띄도록 강조되도록 표현했다. 나와 타자, 그리고 그 소통의 흔적들이 관객의 눈에는 어떤 미묘한 관계로 읽혀질지, 그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함으로 어떤 기억을 생성하며 그 기억이 삶에 어떻게 축적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미묘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 정훈
둘 사이 two spaces ● '우리는 친해질 수 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과 맞닥뜨리면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림 너머에 있는 이와 나. 둘 사이의 space는 소통을 통해 좁혀지거나 멀어지고, 섞이거나 분리된다. 소통의 사전적 정의는 막힘없고 오해 없이 통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예술과 '나' 사이의 소통은 그럴 수 없다. 그것을 탐색하고 인식하여 해석하는 '나' 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이 정답 없음-미묘함-이야말로 예술과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다. '둘 사이 (two spaces)'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사람 사이의 이 미묘한 소통을 표현하고자 했다. 어색한 듯 친한 듯, 다른 듯 닮은 듯, 다른 곳을 보는 듯 같은 곳을 보는 둘들. 부딪힌 둘의 공간은 그들의 성실한 반응을 통해 보기 좋게 섞여갈 것이다. ■ 지두리
Vol.20171205g | 미묘한 소통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