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에디션 New Edition

밴드 오브 브라더스 Band of Brothers ● 이 전시 서문의 제목을 처음부터 이렇게 붙일 생각은 없었다. 이를테면 나는 여기에 "계획과 계획의 틈바구니에서" 또는 "그들이 바라본 과정의 낱낱" 식으로 이름을 막연히 생각해 봤었다. 하지만 몇 가지 계획이 어긋나면서, 이 제목들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묻혀버렸다. 대신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이 타이틀을 따온 대중문화 콘텍스트를 이해하는 수용자들에겐 그 감상적인 맥락으로 인하여 손발이 오글거릴 우려가 없지 않아 있다. 중2병이 있고, 요즘엔 대2병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술가의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도 2년차 징크스 비슷한 증세가 있을 법 한데 말이다.

강경아_감싸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45cm×4_2017

김보미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7

김태준_관찰자&이중간첩_나무에 유채_60×60cm×2_2017

『뉴 에디션 New Edition』展은 이들 초보 작가 2년차 세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간의 사정을 풀이하면 이렇다. 대구 수창동의 낡은 폐건물을 개조한 수창청춘맨숀을 알리는 행사가 마련되었다. 이 공간에 미술 전시가 크게 할당되었으며, 전시 감독인 필자는 『당신의 숨결마다 Every Breath You Take』展을 기획했다. 나는 이 건물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시각화할만한 힘을 가진 기성 작가들을 이 프로젝트에 참여시켰다. 그런데 공공 차원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예술행사들이 그렇듯 정량 평가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근거들이 본 전시의 외연 확장을 요구해왔다. 최고의 큐레이터가 아닌 내가 택한 방법은 인원과 작품수의 유기적 재배치가 아닌, 서브 익스히비션을 새로 만드는 일이었다. 즉, 본 전시는 그대로 진행하되, 록 콘서트장의 오프닝 프로모션처럼 신진 작가들을 본 행사의 사이에 두는 착안이 이루어졌다. 그게 이 전시다.

김희정_땅_한지에 목탄, 먹, 혼합안료_200×360cm_2017 김희정_A.D. 바닥_한지에 목탄, 먹, 혼합안료_75×75cm_2017

남재희_관상의자_유채_90.9×65.1cm_2017 남재희_무제_유채_40.9×53cm_2017

이민경_수창을 덮다_침대사진_92×207×160cm_2017

나는 예술계에서 상투적으로 쓰이는 레토릭, 이를테면 "젊은 작가들의 패기와 열정의 에너지를 발칙하게 어쩌고저쩌고"하는 수사적 표현을 혐오한다. 나는 경험이 없고 앞날에 대한 보장이 서있지 않은 그들이 가진 것이 패기와 열정이 아니라 막막함과 두려움이라고 보니까. 그리고 이 전시의 모체가 된 일은 2016년 말에 수창청춘맨숀 바로 옆 대구예술발전소에서 벌어진 『거의 최초에 가까운 전시』다. 대구권 미술대학 졸업예정자들 가운데 가려 뽑은 백사십여 명이 모인 이 미술대학연합전시를 감독한 나는 이후에 일종의 불편함 내지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게 뭔가 하면, 그들 미술대 학생들 가운데 본인은 연합전시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각자의 이유 때문에 초대받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이미 엎어진 물이지만, 학교별로 주어진 우수작품상 수상자들 가운데에는 애당초 작업에 대한 의지가 없는 학생들도 끼어있었다. 그리고 그 백사십여 명 가운데 지금 작품 활동에 나선 졸업자는 절반에 훨씬 못 미친다. 이런 현실의 한 편에서는 전시에 부름 받지 못한 학생들 가운데 여전히 붓과 도구를 쥐고 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작가 지망생들이 몇 명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뉴 에디션』은 그들에 대한 나의 헌사다. 이 전시는 『거의 최초에 가까운 전시』에 대한 나의 양심이다. 이 기획전이 단지 『당신의 숨결마다』의 부대 전시로 겉돌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야 어리석게 깨달은 사람이 나, 윤규홍이다.

장은영_비치다_캔버스에 유채_90×130cm_2017

정규린_우화등선_순지에 분채_가변설치_2017

진종환_종이에 유채_가변설치_2017

그런데 여기에는 다시 도전의 무대에 오르는 작가들만 있는 게 아니다. 이들과 비슷한 까닭에서, 비록 작년 전시에는 참여했지만 대학교 대표직을 맡은 탓에 자신의 작품을 충분히 알릴 기회를 희생한 이들도 여러 명이 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란 말이 있었구나. 자질이 있으면 어떤 곳에 있어도 빛나기 마련이다. 졸업연도가 바뀌지 않았음에도 벌써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는 그들과 함께, 특별히 전체 전시 구성에 무게를 잡아줄 선도자 격의 작가에게 전시 제안을 했다. ● 맨 앞의 그룹에 정규린, 남재희, 강경아, 장은영, 이민경 다섯 작가가 포함되었다. 한지에 분채로 그림을 그리는 정규린은 전통민화보존 분야로 진출하여 새로운 이력을 쌓고 있다. 주변 물건이나 사물에 달콤한 가식 더미를 은유하는 포도송이를 덮어 그린 화가 남재희의 색채 감각은 또한 가시 돋은 선인장을 품은 화자의 포용을 그린 강경아의 그림과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공간 속에 퍼진 이미지와 냄새, 온기, 소리가 합쳐진 공감각을 그려낸 장은영의 감수성은 그녀가 예전에 선보였던 데드마스크 형식의 자화상과는 또 다른 시도인 탓에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민경의 인스톨레이션은 기울어진 침대 위에 수창동 현장의 여러 장면을 포착한 사진들을 도배한 시도로, 하나의 작품으로 수창맨숀의 전체를 품고 있다.

최민규_기다리며_캔버스에 유채_97×72.7cm_2016

최민규_품_캔버스에 유채_130.3×162.3cm_2017

여전히 내게 감사한 존재로 남은 대표들은 김희정, 진종환, 황정혜, 최민규, 김태준 작가다. 한국화를 전공한 김희정은 장지를 바탕으로 하는 재료의 정체성을 논외로 떨쳐낸다면 그림 속에 암시된 음울한 경관조차 전통적인 동양화론의 영역을 그만큼 확장한 진전으로 읽을 수 있다. 진종환의 추상화는 마치 석양을 품은 구름처럼 매혹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생각에 그 작업이 몰고 온 신비함은 화폭의 크기에 어느 정도 비례할 건데, 이번 단체전의 조건조차 그의 작품이 가진 미덕을 충분히 살리진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알게 되었다. 이미 화랑가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황정혜의 작업 주제는 내면을 자아가 재 관찰하여 걸러진 주변 환경이다. 사실 이런 작업 동기는 독창성을 얻기 힘든데, 그녀는 섬세함(말고 다른 적실한 어휘를 떠올릴 수 없는)으로 그 보편성을 넘어서려 한다. 최민규의 회화 묘사력은 우수하다. 이제 패러다임이 개념의 전위로 들어선 동시대 미술에서 과연 그의 그림이 어떤 보편성을 가지는지, 또 그를 안착할 유파 그 자체가 미술의 지형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하는 나 같은 예술사회학자들의 관점은 사실 굉장히 못됐다. 무슨 이유인지 밝히기엔 시원찮지만, 화가 김태준은 그에 대한 내 신뢰과는 별도로, 그 그림 속에 가상과 착시, 다중 시점 같은 패러독스의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현실인가.

최수영_텅 빈 수족관_캔버스에 유채_130.3×80.3cm_2017

황정혜_memory of trave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드로잉_가변설치_2017

그리고 특별히 초대된 김보미, 최수영, 최선하 작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보미 작가는 자신의 한국화 영역에서 눈에 띄게 올라가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녀를 선도하는 그룹에 거의 진입하는 단계임을 나는 알게 된다. 사실, 일련의 한국 현대 동양화 선도 집단이 보여주는 과잉담론은 허무한 경우가 많다. 김보미도 여기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벗어난다면 어디로? 모르긴 몰라도 내가 작은 도움은 될 것 같다. 작년 전시에서 나는 최수영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작가가 현실 속에 퍼져있는 공간과 우리 사이에 일종의 투명한 가림막을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평탄하지 않은 유리벽의 은유가 사회학 불평등 이론인 유리천장 가설에 대비되는 수평적인 현실의 메타포가 될 가능성을 찾아보자. 마지막으로 캘리그래퍼 최선하는 『뉴 에디션』의 라인업과도 구분해야 될지도 모르는 특별한 위치에서 자신의 예술을 빛내고 있다. 나는 이들 젊은 작가들을 한 자리에 모을 기회가 이렇게 일찍 찾아올지 몰랐다. 같은 공간에서 『당신의 숨결마다』를 연출하는 선배 작가들은 저 높은 별처럼 빛나는데, 이들 앞에 걸쳐진 싸움터는 어디까지 드리워져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신뢰와 용기로 뭉쳐진 지난 다섯 달은 이 예술가들에게 영광의 길로 들어서는 시간이 되었다. 앞으로의 시간도 이들의 편이다. ■ 윤규홍

Vol.20171125e | 뉴 에디션 New Edition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