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7_1214_목요일_03:30pm
참여작가 류현욱_박기진_배성미_스튜디오1750(김영현+손진희) 임지빈_정인희_허수빈
주최 / 대구광역시 주관 / 대구문화재단 전시감독 / 윤규홍 협력 큐레이터 / 윤현정_조준호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대구시 구 KT&G 연초제조창 사택 및 부지 대구시 중구 달성로22길 27 Tel. +82.(0)53.430.1243
오래 전에 문을 닫은 담배공장 숙소가 예술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곳 수창동 낡은 건물에 전시를 벌이게 되었고, 책임을 내가 맡게 된 사연은 좀 복잡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대구시는 이 공간이 청년 예술가들을 위한 특별 지구가 되길 원했고, 그렇게 계획을 벌여왔다. 몇몇 사람들은 이 안에서 교육과 체험, 그리고 실연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살펴봐 왔고, 그들 가운데에는 최윤정 큐레이터도 있었다. 이런 공간을 해석하는 일에 도가 튼 그였지만 무슨 이유였는지 중간에 하차했고, 최 큐레이터가 일구었던 전시팀 또한 해산했다. 전체 기획을 가꾸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공간의 시작을 선언하기에 무난한 미술 전시회가 필요했고, 그래서 이 또한 무난한 감독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윤규홍이 선임되었다.
여름에 이르러 뒤늦게 일에 끼어든 나는 느슨하지만 몇 가지 원칙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전시가 앞으로 여기서 운영될 활동을 시험 삼아 벌이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면, 나는 창생전이 남긴 의미를 이어받거나 반대로 청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본 전시의 정체성은 파일럿 형식의 이벤트가 되고, 작년의 활동은 그 주체들이 내 말을 어떻게 해석할진 모르지만 파일럿의 파일럿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큰 틀로 볼 때, 창생전에 몸담았던 그 어떤 작가들도 전시에 초청하지 않는다는 뜻을 세웠다. 또 상위 프로그램을 준비해 온 기획단의 방향이 굉장히 숭고한 차원에서 호흡을 느리게 가다듬는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전시만큼은 가급적 소박하게 벌이길 원했다. 나는 전국에서 불러 모은 일곱 아티스트가 이 장소와 시간의 측면은 눈여겨보되, 너무 무겁지 않은 스펙터클로 공간을 봐주길 원했다.
전시 표제를 『당신의 숨결마다』로 정한 이유는 큰 뜻이 없다. 나와 일하게 되면 사람들은 통화대기음으로 걸린 "Every Breath You Take"를 좋든 싫든 들을 수밖에 없다. 이 곡은 폴리스(The Police)가 남긴 대 히트곡이지만, 실은 그들이 담은 뜻은 '숨소리 하나까지 엿듣고 몸짓 하나까지 엿보려는' 사랑의 집착에 관한 독백이란다. 말이 나와서 그런데, A메이저 코드로 시작해서 F#마이너-D메이저-E메이저 다시 F#마이너로 리프가 진행되는 이 곡을 기타로 연주해보면 난 팔목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귀로 듣기엔 그저 편안하게 들릴 따름이다. 우리 전시에 공개된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손장난이 곳곳에 숨어있다. 미술 작품을 구경하려고 장소에 들어선 관객들에게 많은 전시 작품은 당혹스러움을 안겨줄 여지가 크다. 여기에 걸린 그림다운 그림들은 죄다 암호투성이며, 그게 전시 홍보물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허름한 공간의 안팎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이걸 준비하는데 작가들이 투여한 고통을 일반 관객들이 알기란 어렵다. 우리는 오랜 시간 비어있던 여기에 사람의 숨결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리고 캄캄했던 공간에 일부라도 빛과 소리 또한 끌어들이고 싶었다.
김영현, 손진희 두 사람으로 구성된 스튜디오1750은 건물A동 3층 안과 밖을 이어서 「Study in Scarlet」을 설치했다. 거대한 공기 주머니를 만들어 덩어리감과 모빌아트의 특성을 살린 그들의 작품은 누가 보더라도 재미있다. 하지만 그 배경은 꽤나 심각해서, 현대의 혼종문화에 관한 관심이 작업의 주제다. 예컨대 인위적인 유전자 변이를 꾀하여 식량 생산성을 높이려고 애써 온 근대적 기획이 혼종 문화라는 탈근대적인 결과를 부르는 양상이 그들의 작품마다 곧잘 나타나있다. 뭐, 이들의 염려(혹은 은근한 기대)만큼 '괴랄한' 유기체가 우리를 놀라게 한 사례는 많지 않다. 작가들도 이런 사실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그 안도와 불안의 심심함을 유전공학 대신 예술로 보충하려 한다. 과학과 기술 체계에 대한 레퍼런스만으로도 좋은데, 뜬금없는 설화는 또 무엇인가. 천년의 기다림 끝에 용이 되려는 이무기 이야기가 건물을 뚫고 꿈틀댄다. 건물 안에는 이 녀석의 내장을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이 거대한 이무기를 청년작가에 관한 알레고리로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스튜디오1750의 유쾌한 설치 현장을 지나서 좀 더 어둡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허수빈의 작품이 있다. 내가 장담한다. 아무런 정보 없이 그 컴컴한 공간에 들어선 관객 셋 중 하나는 작품을 못 찾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빛이다. 허수빈은 어두운 공간에 스며드는 빛 한 조각을 연출하며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돋운다. 올해 갤러리 자인제노에서 벌어졌던 그의 개인전 『햇빛 한 조각』은 2017년 최고의 전시에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그것은 미술에서 그림이나 조각을 비춰주는 도구로 사용되어 온 조명이 그 자체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미술의 서광이다. 그의 작업에 의하여 여러 개로 나누어진 방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자연광을 차단하여 어두운 공간이 되었다. 여기에 작가는 로고라이트를 벽이나 바닥에 비추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의 라이트 아트가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효과는 시간이 흐른 후에 비로소 드러난다. 우리는 일상의 여러 곳에서 그의 작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방문 틈새로 드리운 한 줄의 햇빛, 어두운 골목의 담장 낮은 창문 너머에서 전해지는 불빛, 이 세상 어디에나 그의 작품이 있다.
2층에 들어선 관객들은 회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서양화가 류현욱의 연작 「애도의 숲」이다. 캔버스에 담긴 색과 선들의 겹침은 매우 화려하다. 그렇지만 이 모두는 지난 시간, 그의 곁에 머물렀던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다. 내가 아는 한 외로움을 가장 잘 버텨온 사람 중의 한 명인 그는 개인의 추억을 버려진 사택 공간을 빌어 집단의 추억으로 넓히기를 제안한다. 형태가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한 그의 그림은 보는 이들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낸다. 그 안에 숨은 구체적 대상, 팔림세스트처럼 가리고 지워져도 남은 메시지, 그가 업은 삶의 무거움으로 굽이치는 선들은 이곳에서 하나의 거친 숨소리와 같다. 우리 인생이 계속 되는 한 숨결은 이어지고, 이는 삶을 죽음으로부터 가르는 징표다. 나는 몇 해 전 그의 그림이 지금과 같이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한 바로 그 시기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살펴본 바가 있다. 형태 없는 예술을 그와 우리 모든 이가 마주한 삶에서의 진실로 드높이려는 작가적 입장을 나는 여전히 지지한다. ● 배성미 작가는 2층의 깊숙한 공간에 대지 미술과 미디어 아트를 같이 두었다. 따로 스크린 장치가 되어있지 않은 맨 벽에 네 개의 영상 작품이 구획을 나누어 상영된다. 매우 속도감 있게 찍힌 고속도로와 지하철의 창밖 풍경, 강풍에 흔들리는 들녘의 잡초, 중장비가 부수는 낡은 건물이 이 네 개의 영상에 담겨 있다. 그 아래 넓은 바닥을 가득 채우는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흙이다. 그 한 가운데 이른바 그녀의 '한 평 미술'이 자리 잡는다. 이 한 평에는 영상에도 비슷하게 담긴, 산과 들에서 직접 옮겨 놓은 풀들이 자란다. 관객은 이 계산된 자연의 재현 앞에서 시간의 속도가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평소에 자동차로 시간을 관통하듯 내달리던 도시의 일상은 시점을 바꾸었을 때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작가가 로케이션 한 장소는 네 개의 채널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런 상상을 한다. 그것은 이 네 개의 장소가 실은 하나의 좌표를 중심으로 서로 멀지 않은 공간에 있다는 생각 같은 것이다. 빠르고 느린 것은 상대적이다. 흔히 낭만적 태도에서는 느림이 예술적 우위를 획득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내가 볼 땐 빠르거나 느린 것, 혹은 자연과 인공과 같은 갈래에서 어느 한 편이 더 좋거나 나쁘다고 단정 짓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들은 공유되는 집단의 기억 너머에 존재하며, 배성미와 같은 예술가는 그것을 작품으로 고정시키는 매개자일 뿐이다.
A동 지하에 보일러실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공간을 맡은 작가는 정인희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맑스주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가 썼던 두 권의 책 "옥중수고"에서 제목과 주제를 그대로 따 온 「The Prison Notebook」을 이곳에 펼친다. 이 지하 공간은 수창동 건물 내에서도 가장 거칠고 외딴 방이다. 그람시는 지하 감옥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와 역사, 그리고 예술에 대한 혁명적인 관점을 죽기 전까지 써내려갔었지만, 정인희는 자신의 미시사를 깨알처럼 기록했다. 여기에는 이중섭의 은박지 종이 그림으로부터 착안한 금속 평면작업 이외에도 오랜 세월동안 공간 안에 방치되어있던 작업 일람표나 달력 혹은 구조물에도 작가의 글귀가 새겨졌다. 많은 미술가들에게 자신의 아틀리에는 이따금 감방처럼 느껴지는 게 허다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감옥'에서 고뇌와 낙관과 굴욕과 희열을 일기처럼 새겨왔다. 그녀의 전시 공간에는 전시 제목 "Every Breath You Take"의 노랫말과 번역어가 이 곡이 담긴 앨범 「Synchronicity」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완성한 작품과 작가의 독립적인 공간 주제인 「The Prison Notebook」을 시각화한 네온 및 오브제 작업이 상충하면서 전시의 통일성을 보류시키는 면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인희의 작업은 과거 학부시절에 동양화가 아크릴 채색이 전부인 것처럼 가르치고 배웠던 제도적 편협함을 기어이 뚫고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사실만으로 놀랄만한 성취다.
사실, 이번 전시 『당신의 숨결마다』의 전시감독을 맡게 된 맥락에는 사옥 건물의 안과 밖으로 각각 내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신용한 두 사람은 공간 안을 주로 볼 건축가 김태경 소장과 바깥을 책임질 작가 임지빈이었다. 나와 함께 프로젝트 자문을 맡았던 김 소장은 내가 감독을 맡으면 공간 연출에 난점 해결에 힘을 보탤 것이라는 감언이설을 했다. 돌이켜보면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는 후견인 역할이 전부였지만, 본 전시와 함께 진행된 갤러리 분도의 공간 해석, 그리고 수창동 바로 인근에 터한 도원동 자갈마당 미술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함께 고민할 수 있다는 점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임지빈 작가. 이 건물을 미술이라는 방점을 찍는 일에 난 임지빈의 베어벌룬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의 곰돌이 풍선은 그 가벼운 무게로 이곳의 역사성 장소성 아카이브 등등 모든 미완의 무거움으로부터 나를 해독시킬 판타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지빈은 「에브리웨어」 프로젝트를 통해 미술이 대중에게 통하는 즐거움을 모두에게 배달하겠다는 취지의 "딜리버리 아트"를 세계 여러 곳에서 이어 왔다. 이 스타 팝아티스트의 작품을 대구로 배달시키는 프로젝트가 염두에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 전시도 현재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게 분명하다. ● 마지막으로, 작가 박기진. 그의 설치작은 건물 앞마당에 길게 설치되어 있다. 「통로 Path」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대형 인스톨레이션은 관객들이 그 속에 들어가서 멀리 앞쪽으로 비치는 창 너머를 보며 방향까지 조정할 수 있다. 통로란 시간과 공간의 연결 장치인데, 지금 수창동이 품은 시공간의 맥락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에 적절한 작품이다. 원래의 의도에는 작가가 참여한 남극 프로젝트 당시에 빙원으로부터 관측한 사실과 그로부터 끌어낸 사유가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타임머신과 같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이 따라붙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이 작품이 가진 의미, 예컨대 정치학이나 문화지리학적 측면 혹은 베르그송을 떠올리게끔 하는 철학 따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다. 포병 부대 장교로 복무한 과거가 현재의 작가 정체성으로 이어진 단서는 그의 작품 곳곳에 드러나 있다. 그것만 발견한다면 이 작품이 쓸데없이 현학적이라는 오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바로, 역사적 상상력이 가진 매혹이 과하게 부각되면서 의미가 희박한 사료마저도 신비화 되는 학문적 경향의 반대 진영에 예술의 통찰을 둘 수 있을까? 있다면 그건 다른 누가 아닌 『당신의 숨결아래』에 모인 우리가 맡아야 하니까 말이다. ■ 윤규홍
Vol.20171125d | 당신의 숨결마다 Every Breath You Take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