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0912b | 박대성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7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릴레이 개인展
주최 / 양주시_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_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00pm / 월요일 휴관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777 RESIDENCE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03-1 3층 Tel. +82.(0)31.8082.4246 changucchin.yangju.go.kr www.facebook.com/777yanju
누가 사는 집 ● 뜻밖의 장소에서 새집을 발견한 적이 있다. 도시였는데도, 굴곡이 없는데도, 구석이 아닌데, 밋밋한 평면에,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들러붙어 있는지 경이롭기만 했던 새가 사는 집. 그 집의 주인장을 만날 수 있었더라면 쥐둘기라 하더라도 존경의 인사를 건넸을 텐데. 박대성 작가의 초기 작업, 「Liaison」과 「Intervention」 (2004)도 각목을 이어 붙인 형상이나 도시의 밋밋한 건물외벽을 휘감으며 들러붙은 것이 아슬아슬함까지 해서 영락없는, 그렇게 경이로운 새집이었다. 그의 다음 작업은 「Room」과 「House」로 이어지는데 이들도 집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Room」은 건축 설계도면의 형상을 짙은 회색으로 제작한 부조작업이다. 눈에 띄는 점은 설계도벽면 중간에 가느다란 파이프를 박아 놓았다. 마치 혈관의 절단면처럼. 집이라는 소재는 꾀 오랜 동안 박대성 작가의 모티브가 되어주었다. 그 중 집의 형상을 모티브로 만든 전시, 『Liaison_집』(2009)은 브레인팩토리에서 열렸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전시장은 작은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커다란 방 하나를 이룬 구조를 가졌었다. 작가는 거기서 문지방 위치에 해당하는 프레임에 작은 집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바닥에 집을 줄줄이 이어 붙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연관관계의 변주를 만들었고 이를 다시 사진이라는 프레임에 담았다. ● 그런데 연결, 연락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라는 의미의 단어인 liaison은 궁극적으로 집과 집 사이의 무엇을 연결, 매개하는 것일까? 이때 연결되는 집들은 크기가 무척 작았지만 이를 새집이라고 읽을 수는 없을 듯하다. 왜냐면 이어지는 전시, 『금광석』 (2010)의 구성을 보면 집의 형상을 단순화한 (5각형) 조형물을 겹겹이 이어 붙이기도 했고, 집 모양의 흰색 석고조형물을 돌멩이의 굴곡을 다치지 않게 깎아서 돌멩이 위에 얹어 놓기도 했다. 더구나 집을 지지하는 네 기둥뿌리와 주춧돌로 구성된 조각작품, 「덤벙주초」의 높이는 사람의 키에서 왔고, 작가가 사는 집의 치수에 따라 네 곳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그의 집 작업은 누군가가 사는 집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작가는 인터뷰에서 장일순의 사상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장일순의 철학은 세계 안에서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를 공유하는 동등한 존재자로 간주하겠다는 의지로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박대성 작가에게 집이라는 키워드는 1. 형상에 국한 되는 것도 아니고 2. 그 안에 사는 새나 사람 같은 주체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 3. 동등하게 공존하는 양상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관심사는 타자적 존재와의 관계는 아닐까? 집이란 누군가가 사는 공간이고 그 집 주인장이 가진 생명력의 됨됨이를 반영한다. 박대성 작가가 제시하는 집의 주인은 자연 안의 다른 존재와 싸우지 않고 모자란 듯이 공존한다. 결국, liaison이라는 단어는 존재자와 존재자 사이를 잇고, 오가는 관계라는 말이다.
누구는 모자람을 덕목으로 삼는다 ● 덤벙주초라는 단어도 참 정겹다. 도록의 설명에 의하면 덤벙주초란 강에서 주워온 납작한 돌멩이의 모양을 따라 기둥 밑을 깎아서 한옥의 기둥을 세우는 방법을 일컫는다고 한다. 덤벙이 liaison으로 함의하려는 바를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덤벙'이 혹시 같은 어원에서 왔을까? 기둥의 끄트머리에는 사람의 형상이 음각으로 파여있고 각각의 인물은 가슴을 비롯해 곳곳에 구멍이 뻥 뚫려있는 것이 마치 덤벙댐이나 모자람이 곧 온전한 것임을 상징하고 싶었나 보다. 어쩌면 나는 그의 작품세계를 실존주의나 라캉의 결핍/공백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재해석해 인간이 무의식과 같이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살아가는 양상을 설명해 내면서 모자라게 살아가는 주체의 존재론을 선도했다. 그는 하이데거와 함께 인간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가에서부터 진리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로 철학의 관심을 돌려 놓은 장본인이다. ● 『금광석』 전시부터 작가의 작품세계에 새로이 등장하는 소재가 있다. 돌멩이가 그것인데 여기부터 나의 해석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돌멩이 작업은 작가에게 과도기라 나는 해석한다. 더구나 조각을 하던 작가는 페인팅을 시작했다. 전시와 작품의 제목이 『금광석』인 만큼 그에게 돌이란 무척 소중한 것, 안에 금사리를 간직한, 즉 잠재성의 존재자를 의미할 수 있다. 이후 그의 작품에 계속 등장하는 돌멩이는 작아져서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가 대부분이다. 작가는 삼각뿔 모양의 돌멩이를 단색으로 채색하고 각각의 끝에 색 점을 찍어 캔버스 위에 줄지어 붙였다. 아무래도 함께 존재하는 양상이니 뭐니 하는 나의 해석은 이 작업부터는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이전의 작업이 존재양상을 주제로 다룬다는 나의 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다를지도 모르지만, 동일하다 하더라도 이 시기의 돌멩이 작업들은 구체적 '양상'보다는 이를 추상화하고 도식화 해서 '설명'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고 해야 한다.
추상화와 도식화가 내게 미치는 영향 ● 감성보다는 오성이 더 발달한 필자가 모더니즘 추상회화를 바라볼 때마다 궁금해 했던 질문이 있다. 사실, 이 시기의 그의 화면은 7, 80년대 모더니즘의 한국 반추상화의 문법을 연상하게 하는 구석이 많다. 추상 회화가 현상계 너머의 세계를 화폭에 담거나 구도(求道)의 시간 등을 화폭에 축적하고자 했지만 화폭은 물리적인 현상계에 위치한다는 생내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추상회화 작가 개인이 숭고의 순간을 경험했다면 그가 전시장에 제시하는 캔바스는 무엇일까? 경험의 기록일까? 아니면 그러한 숭고의 감정을 관객도 느끼도록 유도하는 시각장치인가? 아니면 숭고와 의식너머 세계를 도식화하고 이를 숭고라는 의미로 소통하겠다는 사회구성원들과의 약속, 즉 상징체계인가? 추상 회화는 내러티브 없이 순수 감각의 영역이 화폭에 담기면서 이미 상징이고 물화된 무엇인데 이를 숭고와 매칭한다는 것은 상징을 다시 상징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경우 특정작가나 그 작품의 맥락이 사회적으로 선순환 된 상태가 (미술사에 기록되지) 않고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즉 그림 혼자로는 작가의 의도가 소통되기 어려워 보인다. 박대성 작가의 경우, 집이나 돌멩이가 금광석 같은 세상의 모든 존재자에 대한 메타포가 될 수 있지만 금광석이 줄지어 서있는 이미지가 덤벙주초의 존재방식을 은유하기는 어렵다. 관객이 이전 작품에서 집과 돌멩이가 금강석이 되는 논리를 미리 겪지 않은 바에야 자신만의 상징을 다시 한번 도식화하는 셈은 아닐까?
작품이 제공하는 시각적 이미지가 관객에게 도달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아마도 롤랑바르트라면 해석 대상이 함의하는 바와, 대상을 제시한 사람이 부여한 의미, 그리고 대상을 읽는 사람의 의미가 일치할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표상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법하다. 같은 논리로 나의 비평 또한 나만의 해석 이상을 넘지 못한다. 한편, 비평가 이영준은 같은 상황을 조금 다르게 설명해준다. 그는 2007년 자신의 사진 컬렉션으로 사진전시, 『사물데이타베이스』를 기획하였고 그 서문에서 사물의 겹표상을 논의 했었다. 그의 글을 인용하면 (사람들은) "사물이란 뻔하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물이란 이미지와 텍스트와 관습 등의 겹표상으로 주어져 있다. 그러니까 사진 한 장 가지고 사물을 재현했다고 소리치는 것은 지하철에서 파는 천 원짜리 중국제 GPS처럼 좀 허풍일 가능성이 크다. 사진가는 사물에 대한 겹표상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서 사진가는 모호한 이미지를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맥락을 함께 제공하라는 것인지 애매하다. 나는 이를 사진작가는 자신의 사진이 단표상을 제시한다고 착각하지 말거나 겹표상의 조건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표상이냐 시간이냐... ● 박대성 작가의 최근 작업에는 다시 한번 변화가 찾아온다. 그의 최근 작업 「작업노트」를 보면 화면 중앙에 캔바스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의 사각형에 수많은 빗금이 중첩되어있다. 아마도 제목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의 작가노트를 쓰되 글자 하나하나는 알아 볼수는 없을 때까지 중첩해서 완성한 작업으로 보인다. 더 최근 작업 중에는 숲에 비가 내리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에서 그린 것이 있다. 그 작품 옆에는 다음과 같은 싯구가 적힌 캔바스 작품이 보인다. "온 종일 산을 바라보다 / 문득 / 숲이 되었던 사연처럼 // 그 펼쳐진 것을 세다가 / 열에 / 나무가 있던 마음처럼 // 뻗은 가지를 이어가다 / 이제 / 세월에 인연이 되어서 / 더 이상 산이 아니게 되다."
산책을 하고 온종일 산을 바라보다가 숲이 되는 자연과 합일하는 가슴 뿌듯한 순간, 정신적 고양을 경험하는 순간이 세월이 가는 동안 인연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일부와 얽히는 상태로 전환되는 자전적인 이야기 일 것이다. 이는 앞서 논의한 존재론적 층위에대한 관심 혹은 실존의 층위에 대한 자각이 작가에게 되돌아 오는 것은 아닌지 상상된다. 적어도 그의 화면에는 글쓰기 행위가 겹쳐지고 비가 내리는, 순간보다는 긴, 시간이라는 요소가 더해졌다. ● 마르쿠제는 하이데거가 1927년 쓴 「존재와 시간」을 읽고 나서 구체성의 철학이 출현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의 해석이 나는 무척 좋았는데 왜냐하면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상들이 상징, 혹은 기표로서의 역할 이상을 담당하기나 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 시대의 철학이 제시하는 진리가 추상적이고 포괄적이어서 정작 그것을 적용하는 개개인들의 실천에는 별반 소용이 없거나, 억압적인 규율에 그치고 말았던 것에 비해 존재와 시간에 대한 성찰은 진리와 존재자들 사이의 정치적 층위도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르쿠제는 현실세계에서의 작동이라는 '존재론'이라는 표현대신에 구체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문순표(문순표, 독일 지식인의 반지성주의: 좌우의 피안에서, 말과 활, 제 14호, 2017 9월. P. 122.)는 이를 하이데거가'일상성'에 대한 담론을 엄밀한 학에 대한 요구와 적절하게 결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의식과 같은 '주관적인 측면을 무시했던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실존철학'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라 해석하였다. 마르쿠제가 하이데거에게서 발견한 것은, 그렇다면, 하나의 명제를 모두에게 흑백논리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회색 빛 영역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더라는 뜻일 게다. 박대성 작가도 그래서 시간을 넣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신현진
Vol.20171024i | 박대성展 / PARKDAESUNG / 朴大城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