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토끼 Pretty Rabbit

허영임展 / HEOYOUNGIM / 許瑛恁 / painting   2017_1021 ▶ 2017_1026 / 월요일 휴관

허영임_Tuning No45102_캔버스에 혼합재료_30×30cm_2015

초대일시 / 2017_1024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뮤온 예술공간 Art-space MUON 서울 영등포구 도림로 418 (문래동3가 54-41번지) 203호 artmuon.blog.me

녹색지대 위의 기호들 ● 프로이트는 여성의 욕망을 '어두운 대륙'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러나 허영임의 대륙은 어둡지 않다. 그녀는 억압당한 무의식을 녹색지대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반추한다. 녹색은 색이면서 색이 아닌, 빛의 삼원소에 속한다. 녹색은 어두움과 밝음의 한가운데에 있는 색이다. 녹색은 출발점에 펼쳐진 색이다. 어둡게 보려는 이에게 어둡게 보이고, 밝게 보려는 이에게는 밝게 보인다. 그러므로 녹색은 빛과 어둠, 두 방향으로 가는 생성의 힘이다. 들뢰즈가 말한 생성의 이중성이 허영임이 펼쳐놓은 녹색지대 위에 변주된다. 거기 죽은 토끼가 있다. 허영임에게 토끼 그리기는 도피하려는 퇴행이 아니라 생성하려는 퇴행이다. 그녀의 퇴행, 즉 유년으로의 귀환은 그때의 심리 상태를 상상하는 것을 넘어 다시 체험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반복된다. 어려움을 대면하지 못하도록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 경험과 감정들을 인정하고 대처할 능동적 역전의 기회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방어기제들과 다르다.

허영임_Tuning No15102_캔버스에 혼합재료_65×53cm_2015
허영임_Tuning No25102_캔버스에 혼합재료_65×53cm_2015
허영임_Tuning No35102_캔버스에 혼합재료_65×53cm_2015

토끼가 그녀에게 오기 전까지, 길이란 길은 다 그녀의 외부였다. 바깥 세계는 완강하게 그녀를 가로막고 '저쪽'을 열어주지 않았다. 혼자서 길을 건너는 것이 두려운 세월은 유년의 한낮까지 지속되었다. 길은 소녀 허영임이 상징계의 질서로 진입하여 처음으로 만난 대문자의 세계였고 원억압의 표상이었다. 토끼가 그녀에게 왔고 그녀의 입사(入社)는 훌륭하게 성취되는 듯 했다. 그녀는 열린 세계를 향해 곧장 발걸음을 내딛었다. 토끼 다리에 모자를 달고 씽씽 길을 건너고, 목욕탕집과 한약방과 약국을 순회한다. 유리 너머로 박제된 조류와 다리가 많이 달린 갑각류와 장수(長壽) 신령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유리가 가로막고 있긴 했지만 모두 토끼가 있어 가능한 시도들이었고 토끼와 더불어 공유한 세계였다. 내장이 꺼내진 박제된 새들, 다리가 여럿 달린 기물(奇物)들, 최후의 파충류, 거북이는 삶 너머의 죽음과 그보다 더 먼 신화의 세계 속으로 유년의 상상력을 이끌어갔으리라. 소녀에게 그것들은 얼마나 행복한 기호들이었을까. 세계는 토끼와 하나였고 일원론의 세계 안에서 소녀도 토끼와 하나였다. 세계와 소녀, 그리고 토끼는 들뢰즈가 구조의 필수요건이라고 말한. '삼항(三項)'이며 동시에 항들 사이에 선분도 간격도 없는 하나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은 열린 계(界)여서 거기서는 에너지의 증가하는 무질서를 보완하는 역(逆)엔트로피 원리가 항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소녀와 토끼의 세계는 소진과 고갈이 없이 나날이 넘쳐나는 에너지의 세계였다는 말이다.

허영임_다중생체 No57102_캔버스에 혼합재료_33×23.5cm_2017
허영임_다중생체 No67102_캔버스에 혼합재료_33×23.5cm_2017
허영임_다중생체 No77102_캔버스에 혼합재료_33×23.5cm_2017

빨간 스티커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기호들은 찢겨진 고깃덩어리로 대체되었다. 세 개의 항이자 하나였던 구조는 세계이기를 거부당하고 낱낱이 해체되고 짓이겨졌다. 하양의 세계는 토끼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순백의 세계와 상상력은 다시는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재능 있는 예술가는 억압된 욕망을 새로운 세계에 투영하고 승화시킨다. 그녀의 토끼 그리기는 기호적인 것을 부활시킨다. 그것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언명한 기호이다. 라캉이 상징계의 질서에 대비시켰던 상상계 대신에 '기호적(the semiotic)'인 것을 대비시킨 바로 그것. 허영임은 가지치기 당하고 의미로 고정되기 이전의 맥동이나 충동의 기호들을 녹색지대 위에 펼쳐낸다. 그녀의 기호는 유동적이고 다원적이며 정확한 의미에 대한 일종의 유쾌한 창조적 과잉(excess)이다. 우리는 그녀의 기호들을 통해 찢김 당한 육체의 피학적인 쾌감과 '빨간 스티커'로 상징되는 억압과 금기의 기호들을 파괴하거나 부정하는 가학적인 기쁨을 느낀다. 기호적인 차원의 본능은 원래 사도-마조히즘(sado-mazochism)적이다. 가학과 피학이 한 몸인 것. 즉 다중적, 다형적, 다중생체적인 것.

허영임_다중생체 No87102_캔버스에 혼합재료_73×91cm_2017
허영임_다중생체 No97102_캔버스에 혼합재료_73×91cm_2017
허영임_다중생체 No107102_캔버스에 혼합재료_73×91cm_2017

허영임의 기호는 다중생체(多重生體)다. 그것은 모든 고정되고 초월적인 의미작용에 반대한다. 그런 면에서 허영임의 화면들은 그 자체로 텍스트적이다. ● 이러한 텍스트의 기호적 힘에 의해 기존의 권위는 붕괴되거나 '중심을 뺏기게 되고' 모순에 빠진다. 아마도 토끼와 더불어 거닐었던 골목길의 박제된 새들, 지네, 그리마, 박쥐, 거북이, 술병에 담긴 살모사들의 이미지에서 왔을 다중생체(多重生體)는 다형적(多形的)인 작품들을 낳았고 모든 이원적 대립-적절과 부적절, 규범과 일탈, 정상과 정신이상, 나의 것과 너의 것, 권위와 복종-을 해체시키고 있다. ● 그러나 이 모든 기호들은 결국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성이라는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다. 허영임은 기호의 세계로 되돌아가 자신의 경험과 그것을 파괴한 세계를 재해석함으로써 생성과 파괴란 그것을 둘러싸고 사람들 서로 간에 맺고 있는 관계의 결과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녹색지대 위에, 그보다 더 선연한 기호와 이미지들로 . ● 토끼는 오래전에 죽었지만 죽음 본능처럼 죽지 않고 영원한 어떤 것이 있다. ■ 유달상

Vol.20171021f | 허영임展 / HEOYOUNGIM / 許瑛恁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