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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1013_금요일_06: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몸미술관 SPACEMOM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흥덕구 서부로1205번길 183 제2,3전시장 Tel. +82.(0)43.236.6622 www.spacemom.org
1960년대 말부터 서구의 미술가들은 이미 미술이 처한 환경에 대해 성찰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 가운데 핵심을 이룬 것은 18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미술관에 대한 문제였고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E. Krauss, 1941-),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1944-) 등과 같은 미술이론가들 또한 미술관의 허구성에 대해 열띤 담론의 장을 전개했다. 작가 마르셀 브로타스(Marcel Broodthaers, 1924-1976)는 미술관의 허구성을 주제로 스스로 일시적인 미술관을 만들고 미술관 자체를 이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술관을 판매하는 광고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미술관의 허구성을 표현하면서 그는 극단적으로 미술을 상품으로 취급했다. 그가 표현한 미술은 예술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지닌 물화된 존재였다.
박계훈은 미술관이라는 외적이며 고정적인 요소와 미술품이라는 내적이며 가변적인 요소가 상호간에 어떻게 작용하여 영향관계를 형성하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간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수많은 기억과 흔적을 담고 있는 미술관이라는 물리적 공간 속에서 유동적인 작품을 통해 그 기억과 흔적을 끌어내는 작업을 시도했다. 작품 「이미 죽은, 혹은 죽어가는, 죽지 않으려고 아우성치는 나무 조각들」에는 세 개의 좌표가 존재한다. 1816년 여름,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출항했던 군함이 난파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난파된 배의 승객은 극명하게 두 부류 나뉘어졌다. 구조선에 탑승한 기득권자와 뗏목에 버려진 힘없는 서민. 기득권자들의 상상조차하기 힘든 비인간적 태도와 힘없는 서민들이 처했던 처참한 상황을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는 「메두사의 뗏목」이라는 작품 안에 담아냈다. 좌표 중 하나는 이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의 위치이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봄날,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의 진도 인근 해상에서 500명 가까운 승객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사건 발생 후 형언할 수없이 절망스러운 기득권자들의 대처법은 온 국민을 분노하게 했고 여전히 만연해 있는 추악한 인간들의 욕망은 고스란히 수면 위로 드러났다. 또 하나의 좌표는 바로 세월호 사고 발생 지점이다. 마지막 남은 하나의 좌표는 지금 이 순간 작가 박계훈이 우리에게 이미 죽고, 혹은 죽어가며 어쩌면 죽지 않으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여줄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 '스페이스몸미술관'이다. 작가는 우리가 평소 인식하고 있지 않은 좌표라는 숫자를 통해 예술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 예술과 공존하면서도 예술의 존립을 좌우하며 역사와 사회의 톱니로 자리한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한 작가가 얼마나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활동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다면 그 작가의 비행기 마일리지 누적지수를 살펴보라고 할 정도로 최근 작가들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언급한 노마디즘을 차용해 예술계에서도 이들을 노마드즘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긍정적이며 밝은 측면의 노마디즘이 자리한다면 부정적이고 어두운 측면의 노마디즘 또한 존재한다. 그것은 유목민이라기보다는 난민으로 인식될 수 있다. 언제나 규정된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작가들은 가변적인 자신의 작품을 유입시킨다. 박계훈은 이러한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을 마치 난파선 위해 탑승하고 있는 승객에 비유한다. 위험에 처한 흔들리는 배에 탑승한 승객은 불안하지만 내릴 수 없다. 이것은 구조선이 될 수도 있지만 버려진 뗏목일지도 모른다. 앞을 알 수 없는 불안 속에 항해는 계속된다. 과연 예술가와 미술관, 그리고 그들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작가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전작 「불안한 양심」, 「물질화 된 양심」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술의 사회성, 사회 속에서의 예술의 역할에 대한 작가의 고민은 그가 걸어온 30여년 가까운 작가로서의 인생길에 녹아들어 있다. 언제나 고뇌하고 그 속에서 불안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길. 그 안에서 작가의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느리다. 삼베를 꼬거나 나무젓가락을 깎아 콩나물의 형상을 제작하며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작업해 온 작가의 길은 섬세하게 움직이는 역사 속에 남아있다. 그것이 미술관 안에서든 밖에서든.
미술관, 그 안의 미술품, 그리고 그것을 제작하는 작가의 관계는 과연 상하의 수직관계일까? 아니면 좌우로 뻗어나가는 평등관계일까? 박계훈은 수직도 수평도 아닌 자신의 작업을 짊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걸어가는 역동적이며 전방위적인 사선을 보여준다. 「선택하지 않은 사물의 가능성」에서 보여준 함석판으로 만든 4층탑은 일반적인 탑처럼 수직으로 쌓아올려져 있지 않다. 구부러진 탑은 마치 고개를 숙인 듯도 하고 등을 뒤로 젖혀 하늘을 향하고 있는 듯도 하다. 미술관처럼 고정된 존재로만 인식되어 온 탑. 사람들은 소원을 빌며 탑돌이를 하지만 왜 사람들만 탑 주위를 돌아야할까? 탑이 사람의 주위를 돌면 안 될까? 이런 작가의 흥미로운 발상에서 시작된 「선택하지 않은 사물의 가능성」은 평소 유연하고 탄력적이면서도 작은 한 가지 사실에 대해 깊게 파고드는 그의 작업방식을 보여준다. 작가의 탑은 수직으로 쌓아 올린 높은 탑이 아니며, 무너진 제우스신전의 돌기둥처럼 완전히 옆으로 뉘어진 탑도 아니다. 그의 탑은 움직인다. 비록 예술은 물질화된 세상에서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움직인다. 수많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그래도 주어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걸어가야 하는 것처럼. 마르셀 부로타스가 미술을 미술관에서 물화된 존재로 보여주었다면, 박계훈은 물화된 미술로 다시금 우리를 고뇌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작가는 이미 죽은 것에 대해 절망하지 않으나 분노할 줄 안다. 그리고 죽어가는 죽지 않으려고 아우성치는 것에 대해 가능성을 부여한다. 모자라지도 넘쳐흐르지도 않게. ■ 정창미
Vol.20171016f | 박계훈展 / PARKGYEHOON / 朴桂勳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