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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세 블로그_blog.naver.com/tnvnflim
초대일시 / 2017_1013_금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주말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이목화랑 YEEMOCK GALLERY 서울 종로구 북촌로 94(가회동 1-71번지) Tel. +82.(0)2.514.8888 www.yeemockgallery.co.kr
그림자가 사라진 그림: '죽음'을 키워드로 임진세의 그림 읽기 ● "나는 오늘 꽃이 꽂혀 있는 화병을 골똘히 보고 있다 / 쳐진 그물에 물고기가 갇히듯이 화병에 갇힌 꽃은 / 죽은 물고기의 마른 비늘이 물속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 어깨는 주저앉고 두 눈동자는 벽(壁)처럼 얼이 없다 / 꽃의 얼굴은 목탄 그림처럼 어두워졌다 / 화병은 하루 안에도 새 꽃을 묵은 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 화병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내가 시드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태준, 「이상한 화병(花甁)」 부분,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16.)
흙빛 아스팔트에 놓인 몇 줌의 눈과 그 위에 아스라이 식어가는 미약한 담뱃불. 다 태운 담배만 버린 채 자리를 떠난 누군가의 시선처럼, 머지않아 볕이 들면 눈은 물이 되어 꽁초와 함께 흘러 사라질 것이다(「눈과 담배꽁초」). 한철의 꽃나무(「도원동」)나 금방이라도 도망가 버릴 듯한 길고양이(「길고양이」), 폐업을 목전에 둔 동네 목욕탕(「목욕탕」)은 또 어떤가. 임진세의 그림에는 유독 사라진, 혹은 사라짐을 예감하게 만드는 존재들이 자주 등장한다. 어떤 밤은 산책만큼이나 짧고, 또 어떤 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검은 강물 같다. 한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불확실한 미래로 서둘러 떠나야만 하는 이들의 운명은, 밤이라는 한정된 시간과 누구도 정착하지 않는 터널을 그린 「밤의 터널」처럼 막연하고도 다급하게 느껴진다.
임진세의 그림에 두드러지는 이 쓸쓸한 정서는 문태준 시인의 「이상한 화병」과도 퍽 닮았다. 어느 날 시적 화자는 꽃이 꽂혀 있는 화병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러자 꽃은 서서히 죽은 물고기의 마른 비늘로, 공허한 벽으로, 어두운 목탄 그림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이 이상한 화병의 세계에서 시들어가는 것은 화병의 꽃뿐만이 아니고, 화자도 된다. 꽃이 목탄 그림을 닮을 때까지 소요된 시간만큼 화자 역시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하루 안에도 새 꽃을 묵은 꽃으로 만드는 재주가 화병의 것이라면, 화자를 죽음으로 이끄는 무자비한 재주는 우리가 인생이라고도 부르는 이 세계의 것이다. 세계라는 화병에 우리는 모두 꽃처럼 꽂혀 예외 없이 시들어가는 중이다. 마찬가지로 임진세는 그의 삶 도처에 널린 이상한 화병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붓으로 화폭에 쓸어 담지만, 이제 그들 대부분은 오직 그림으로만 잔존할 따름이다. 이 세계에 자취를 감춘 존재에게서는 더 이상 그림자가 흘러나오지 않으므로, 남은 것은 그림자 없는 그림뿐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 동안 이미지가 죽음과 무관한 적은 없었다. 조잘거리며 살아 숨 쉬던 육체는 호흡을 멈추는 순간 우리의 눈앞에서 침묵하는 이미지로 급변하며("What is alarming about death is the fact that a speaking, breathing body is transformed into a mute image before our eyes, in an instant.", Hans Belting, 「Image and Death: Embodiment in Early Cultures」, 『Anthropology of Imag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1), p.85.), 애도를 함의하는 기념비적 이미지는 죽은 자의 부재를 재현하는 동시에 남은 이들에게는 죽음의 의미를 호소한다. 마치 화병에 꽂힌 꽃이 그 자체로는 우리에게 특별한 작용을 가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보고 무상한 세월을 상기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죽음은 지극히 사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이자 공동의 경험이다. 사회라는 퍼즐을 함께 구성하던 조각이 이탈하면서 일상이 통째로 뒤흔들리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세계가 재조직되기 때문이다. 하여, 무력감을 이겨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죽음을 경험한 이미지는 출현한다.
임진세는 그림의 대상을 선정할 때 특정한 기준을 설정한다거나, 그 대상을 수단으로 삼아 강건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는 편이다. 그저 동네의 둘레를 따라 걷고,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발길을 잠시 멈춘다. 그림에 종종 인물이 등장하긴 하나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축제라는 일시적 이벤트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사람들처럼 행방이 묘연하다(「축제-누워있는 사람들」). 그의 시선은 줄곧 신식 피트니스센터가 아니라 강변의 허술한 운동 기구(「강변풍경」)로, 세련된 대형마트가 아니라 보따리장수의 임시 매대(「길채소」)로 향한다. 시간의 흐름을 은폐하는 것들이 아니라 산발적인 존재들이 사라지기 직전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고대 무덤을 추적하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사실에는 선인의 죽음만이 아니고 죽은 장소도 필연적으로 수반되듯이, 임진세의 그림은 그가 우연히 마주한 일상의 존재가 어떤 형태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물론이고, 어디에서 희미해져갔는지 어림할 수 있게 해준다. 그곳은 주로 밤이었고 골목이었으며, 뒤안길이었고 공간과 공간의 사이였다.
임진세의 신작들은 대체로 조금 나이 들었다. 붓을 완전히 내려놓은 시점을 기준으로 2017년 작(作)이라는 꼬리표가 붙지만, 실은 몇 년에 걸쳐 그려온 그림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미 한참이나 지나간 풍경, n년 전의 어느 밤, 흙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주택을 현재에 다시 되돌아봐야 하는가? 무언의 이미지("a mute image")로서 그림에 힘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재현에 충실한 증거 자료라기보다는 현실의 결핍을 호소하면서 쉽사리 휘발되지 않는 감정을 불러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부재를 암시하는 이미지에 접근하는 일은 결국 유한한 시간을 재인식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좀 더 섬세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연결된다. 이미지는 죽음을 어떻게 흡수하는가, 그리고 그림자를 상실한 존재는 그림 안에서 어떠한 감정을 발산하는가. 우리는 임진세의 눈앞을 스친 이름 모를 꽃송이와 고양이가 살다 간 마지막 계절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발로한 죽음의 전조(前兆) 앞에서, 우리 각자에게 할당된 계절 역시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 이현
Vol.20171013b | 임진세展 / LIMJINSE / 林珍世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