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ind

하용주展 / HAYONGJOO / 河龍宙 / painting   2017_0930 ▶ 2017_1105 / 월요일,10월 1~6일 휴관

하용주_Blind 40_장지에 먹, 분채_385×1540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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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930_토요일_04:00pm

영은미술관 영은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10월 1~6일 휴관

영은미술관 Young Eun Museum of Contemporary Art 경기도 광주시 청석로 300 (쌍령동 7-13번지) 제4전시실 Tel. +82.(0)31.761.0137 www.youngeunmuseum.org

사냥꾼의 시대, 안전지대로서의 회화 ● * 하용주의 〈Blind> 연작은 이제껏 그의 회화를 지탱해온 전제들과 결별한다. 그의 회화는 일체의 외부 채광으로부터 차단된,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이 된다. 사물들은 반쯤 어둠에 잠긴 채고, 그 윤곽만 어렴풋하게 드러난다. 명도가 제로 근처까지 곤두박질치면서 선명한 색조와 사실묘사, 그것을 기반으로 했던 내러티브도 기반을 상실한 것이 되고 만다. 오랫동안 그려온 가스마스크도, 두부(頭部)가 불타거나 터지고, 심지어 낙지로 둔갑해버린 비극적인 인물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전에는 더 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제시되던 것들, 보고와 고발, 분노는 어둠의 장막으로 사라졌다. ● 지난 10년 간 하용주의 세계는 가스마스크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함축될 수 있다. 가스마스크는 그것이 허용하는 위장 없이는 한 순간도 영위될 수 없는 실존과 그것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폭력적인 체계에 대한 비유거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가스마스크의 비유가 성공을 거두는 것에 비례해 하나의 역설이 불가피하게 고조되었는데, 소재주의라는 함정이 그것이다. 소재주의는 주체와 객체의 전복이 일어나, 작가가 모티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티브가 작가를 규정하는 것으로, 이는 작가로서는 견딜 수 없고 결사적으로 탈피해야 하는 비상사태다. 그 덫에 걸려드는 순간, 어떤 모티브건 더 이상 이전에 했던 것처럼 세계를 빛나게 해주는 조건이 아니라 음습한 무덤으로 이끄는 저주가 되고 만다. 이것이 이제껏 자신의 세계를 밝혔던 조명을 소등하고, 가스마스크를 착용한 인물들의 서사를 깊은 어둠에 침잠시켜야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용주_Blind 40_장지에 먹, 분채_385×1540cm_2017
하용주_Blind展_영은미술관_2017

** 〈Blind> 연작이 시작되기 이전, 하용주의 회화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비극적이지만 크게 난해하거나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또렷하게 전개되었다. 이야기의 명료하고 잡음이 섞이지 않는 전개를 위해 서사를 구성하는 조건들은 최적의 상태로 유지되었다. 인물과 사물들, 그것들을 둘러싼 배경은 매우 구체적으로 재현되거나 진술되었고, 색조는 최상의 조도 아래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스토리는 더더욱 그랬다. 진리와 비진리의 구분은 모호하지 않고, 희생자와 단죄되어야 할 가해자가 헛갈리는 일이 없도록 필요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이 이야기는 가스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만큼 비극이 상주하는 세계에 관한 것이지만, "세계의 불완전함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아직은 자신의 다양한 가능성의 계기들을 내부에 지니고 있는" 그런 세계, 아직은 '근대적인 개방성'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세계였다. ● 하지만, 〈Blind> 연작에서 세계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뒤덮여진다. 식별가능한 것들의 소멸과 더불어 형태와 색채의 서사구조도 무너져 내린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이전에 주어졌던 성격이 분명했던 역할들을 한 결 같이 반납한 채 깊은 어둠의 장막으로, 시종일관하는 검회색의 불확실한 개방으로 물러난다. 이 무한히 불확실한 개방성은 더 이상 어떤 서사를 확고하게 결정할 능력도, 그 서사를 유지시킬 능력도 부재하는 '무력함의 서사와 무중력상태의 작동만 허용된다. 어둠은 파악할 수도 저항할 수 없는 것들의 현대적 개방성의 암시이다. 이전에 하용주의 세계는 비록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었지만 용감한 자기주장이 낳은 연약하나마 소중한 서사였던 반면, 〈Blind>연작을 주도하는 서사는 주로 파악할 수도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을 환기시킨다. 이것은 "부정적 지구화', 즉 무역과 자본, 감시와 정보, 폭력과 무기, 범죄와 테러 등의 선별적 지구화가 낳은, 계획에도 없었고, 예상치도 못한 부작용들을 동반하는 운명"과도 맥이 닿아있는 운명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 한상석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10). 참조.

하용주_Blind 32_장지에 먹, 분채_180×110cm_2017
하용주_Blind 32_장지에 먹, 분채_180×110cm_2017
하용주_Blind 32_장지에 먹, 분채_180×110cm_2017

***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생존에 유리한 조건이 되는 상황이 존재한다. 최소의 노출로도 큰 희생을 치룰 수 있을 정도로 외부세계가 위협적일 때, 따라서 노출의 급수를 여하히 낮추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안전을 도모하는 길이라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렇다. 그리고 어두움은 서사의 설명적인 기제들을 해제시키고, 감시의 시선을 따돌리는 매우 전통적이고 가장 유력한 보호막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해 왔다. 외부세계의 위협과 어두움이 제공하는 안전이라는 두 조건은 하용주의 회화가 일관된 검회색의 어두움으로 서사적 명료성을 몰수하고, 꽤 오랜 기간 숙성된 이해와 설명의 기술을 무산시키는가에 대한 의미있는 단서가 된다. ● 지극히 적은 부분만 보여주거나 거의 보여주지 않는 〈Blind> 연작에서는 보이지 않게 감추어진 부분의 의미가 더 본령에 해당한다. 불분명한 윤곽이 드러나도록 허용될 때조차, 단지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거리를 좁혀 다가서도 어둠은 가시지 않고, 세계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상대방, 또는 관객은 그 안의 상황이 어떠한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 이성적 판단의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데, 이렇듯 이성이 제약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가 제약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이 회화는 시선의 추적을 따돌리는 것에 의해서만 확보되는 안전지대로서의 회화이고, 그렇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위장으로서의 회화이기도 한 것이다.

하용주_Blind展_영은미술관_2017
하용주_Blind21_장지에 먹, 분채_150×200cm_2016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비유를 빌자면 오늘날은 '사냥꾼 시대'로, '정원사'의 시대였던 근대와는 많이 다르다. 유토피아의 꿈이 아직은 남아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적어도 그 때까지 인류는 막연하지만 유토피아를 꿈꿨고, 억압과 소외, 상실과 두려움 앞에서 저항을 설계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도 했었다는 의미에서 근대는 정원사의 시대였다. 어떻든 인간은 무너지지 않고 버티면서 경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반면 오늘날은 '사냥꾼'의 시대다. 사냥꾼의 시대에 선택지는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사냥꾼이 되느냐(죽이느냐), 사냥감이 되느냐(죽거나), 살벌하지만 이게 진실이다." 이 시대의 인간들은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강요받는다. 남들을 뛰어넘는 사냥꾼이 되지 못하면 다른 사냥꾼의 사냥감이 되거나 최소한 앞선 사냥꾼들의 대열에서 낙오자가 되고 말 것이다. 사냥꾼의 유일한 선택지는 다른 사냥꾼보다 더 큰 사냥감과 더 좋은 사냥터를 독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끝도 없이 자신을 투여하는 것뿐이다. ● 하용주의 가스마스크는 애초에 작가자신이 사냥꾼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콤플렉스에서 출발했다. 그렇다고 다른 사냥꾼의 총알이 자신의 몸 어딘가를 관통하기를 기다릴 수도 없다. 가스마스크는 약탈적인 사냥꾼이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사냥감이 되기를 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었다. 하용주의 회화는 뛰어난 사냥꾼이 되는 것도 사냥감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기에, 가스마스크를 착용하고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도 그 이야기의 한 단락으로 포함되어 있다. ● 하지만, 이제 가스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데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회화가 했던 이 이야기가 이제 회화 자체의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냥꾼들의 세상, 사냥감이 되는 숱한 사람들, 콤플렉스, 가스마스크는 이제 회화 자체의 인식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제 회화가 그것이 아니었다면 사냥감이 되었을 사람들을 위한 보호장비였으며, 무력하지만 평화를 저버리지 않는 저항이기도 했던 가스마스크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 회화는 어두움과 식별되지 않음이라는 은유적 의미의 가스마스크를 착용한 회화인 것이다. ■ 심상용

Vol.20170930g | 하용주展 / HAYONGJOO / 河龍宙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