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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 / 2017_0908_금요일_07: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홀스톤 갤러리 HOLSTON GALLERY 대전시 중구 선화로 50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교내 Tel. +82.42.221.2612 cafe.naver.com/holstongallery
지인의 소개로 한 카톨릭 성지에 내 작품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 성지의 관계자 분들과 의논하여 작품의 형상은 성서에 나오는 요나의 고래로 결정하였다. 구약성경의 요나서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 요나는 니네베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타르시스로 가는 배에 오른다. 항해를 하던 배는 풍랑을 만나 위험에 처하게 되고, 요나는 뱃사람들에게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으니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한다. 뱃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바다가 잔잔해진다. 주님은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요나는 그 물고기 뱃속에 머물다가 물고기가 뭍으로 뱉어내어, 결국 주님의 말씀에 따라 니네베로 향하게 된다. ● 요나는 성자다. 성경이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성자는 당연히 주님의 말씀에 매우 순종적일 것이란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요나는 그런 이미지와 다르다. 주님에게 자신의 뜻이 옳다고 항변하는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주님의 뜻에 따라야하는 여정에서, 요나는 타락한 니네베 사람들을 벌주지 않는 주님에게 순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르시스로 가는 배에 오르고 바다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곧 주님은 큰 물고기를 보내 요나를 삼키게 한다. 아마도 그 큰 물고기는 고래인 듯싶다. 주님은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시련에 들게 하시지만, 결국 고래를 보내 꾸준히 문제제기를 하는 요나를 구원하신다. ● 동화의 피노키오나 여러 이야기에서 고래 뱃속에 삼켜진 후 생존한 사람들의 일화들을 찾을 수 있다. 학생을 가르치는 주변의 작업하는 친구들이나 미술교사 지인들에 따르면, 학생들이 생각하는 고래는 지금의 십대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세월호 사건과 관련하여 고래 자체에 구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세상에 알려진 고래에 관련한 이런 이야기와 이미지처럼, 요나서에서 보여 지는 고래도 역시 구원의 상징으로 생각된다.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어린양마저 보호처를 마련해주는 주님의 자애로움이 요나서에서 드러난다. 이 고래 뱃속에서 요나는 사흘 낮밤을 머물며 기도의 방식으로 주님과 소통하게 되는데, 이 부분이 참 흥미롭다. 어린 시절 문제집 뒤편에 소개된, 고래뱃속에 삼켜졌다가 어선에 의해 구출된 사나이의 일화를 통해 '그가 어떻게 고래 뱃속에서 그토록 장시간 호흡을 하며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까!' 에 대해 궁금해 하던 글쓴이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거대한 생명체에 삼켜진다면 그것의 내장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마자 호흡곤란이 오고 곧바로 죽음에 이를 것만 같다. 그러나 고래의 뱃속에 삼켜진 요나의 상태는 참으로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 고래는 나무로 만들어진 배 이거나 잠수함과 같은 느낌을 주는 구원의 의미를 갖는 보호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구원의 배, 쉘터(shelter)...나는 고래의 원 형태를 유지하기 보다는 배와 같은 보호처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나무의 식물성을 더해보기로 했다. 아마도 그 형상은 뿌리나 덩이 식물의 형태와 더욱 유사할 것이다. 일상적으로 내가 하는 작업은 뿌리, 잎사귀, 줄기, 열매 등과 같은 식물이 지닌 요소를 달리 배치하거나 변형하여 유기적 형태의 동물성을 부여하는 시각적 형식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 작업에서는 역으로 동물성의 고래를 식물성이 더해진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한다. ● 홀스톤 갤러리 본 전시실에서 보여 질 이번 전시작품은 이렇게 평소의 작업과는 다른 스토리를 갖는다. 일관적으로 작가가 꾸준히 집중하고 있는 내용에 관심을 갖는다면 3층 복도에 전시되고 있는 작품의 노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에선 중복하지 않기로 하겠다.
3층 별관 전시 소개글 - 여러 개의 줄기를 지나 부유하고 부유하는...Ⅱ ● 1. 누구의 제작물이든 상반되는 이미지가 하나의 몸체 안에서 보여 질 때마다 나는 즐겁다. 내 작업도 그렇게 한다. 이전의 평면작업에서 식물의 본성을 지니며 소화의 과정이라는 동물적 특성을 함께 갖는 '식충식물'을 소재로 한 작업부터, 설치 형태로 '알루미늄와이어'를 엮는 현재의 작업이 그래왔다. ● 차갑고 단단한 금속이미지를 갖는 알루미늄와이어를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뜨개질 기법으로 엮어 인공물을 만들고, 이 인공물을 자연물 이미지로 구성하는데, 식물의 형태로 시작해서 동물의 특성이 보이도록 만드는 등 상충하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중복한다. 이렇게 성격이나 이미지가 상반되거나 여러 가지일 때, 그것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워서 모호하고 애매해진다. 애매하다는 건 어떤 입장에선 답답한 감정과 공유되지만, 나는 이 애매한 상태가 편안하고 호기심이 생겨 그 안에서 유영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살아가며, 명확하게 정의된 것들이 대체로 요구하는 선택의 강압과 폭력을 지켜봐야 되는 것은 큰 괴로움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모호하고 애매한 것들에 더 생기와 여유를 느끼고 숨이 쉬어지는 모양이다. 한편으론 무언가를 정의하고 빠르게 넘어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드러나고 그것들을 얻을 수 있는 애매함 속에서의 더딘 알아감이 훨씬 더 풍부하고 값진 경험일 수 있다고 나는 느낀다.
2.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작업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철학이론부터 끄집어내는 건 어색한 일이다. 뭐, 넓게 아는 바도 깊게 아는 바도 없으니 사실 그에 대해선 길게 할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2년이 조금 넘었으려나.., 동갑내기 소설가 한 분이 내 작품을 보고 콕 짚으며, "들뢰즈의 리좀이 떠오르네요." 라고 말했다. "어허, 이런 이런...!!!" 식물의 뿌리를 소재로 하는 작업으로 개인전을 몇 차례 이어오면서 아닌 척 하긴 했지만, 사실 이들 작품에선 조금 관련이 있음을 인정해야겠다. ● 리좀(Rhyzome)은 원래 식물학에서 온 개념이다. 이것이 적잖이 뿌리처럼 보이긴 하는데 줄기가 뿌리와 비슷하게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땅속줄기 식물을 뜻한다. 대나무나 무덤 위에 덮는 떼, 각종 덩이식물이 그 예이고 그 중 일부는 현재의 내 작업에 많이 쓰이는 소재다. 철학자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가 수목(나무)모델을 만들어, 이분법적인 대립에 뒤따르는 서열적이고 초월적인 구조를 먼저 이야기 하면서, 그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써 리좀은 내재적이면서도 배척적이지 않은 관계들의 모델로 설명하였다. 이 리좀은 수평으로 자라서 덩굴들을 뻗는데 그것이 다시 새로운 식물로 자라나 또 다른 줄기를 뻗는 방식으로 중심(center) 또는 깊이(depth)가 없이 불연속적인 표면을 드러낸다. 이것은 한계 지어진 구조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뜻하므로 그것은 주관하는 주체를 지니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겠다. 달리 말해, 수목모델에서 리좀모델로 전환한다는 건 경직된 조직에서 유연한 조직으로의 이동을 말하는데, 하나의 지배체제에서 복수성의 지배체제로의 이동을 뜻한다. 수목모델이 근대성을 대표한다면, 리좀모델은 포스트모던한 세계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철학을 아는 이들' 이 반복해서 이야기 한다.
3. 수목모델에서 리좀모델로 전환되는 의미 속에서 나는 '중심 없음, 깊이 없음, 연속성 없음(불연속적인)' 에 대해 관심이 갔다. 예전에 읽은 리처드 바크의 「갈메기의 꿈」에선 이전의 내가 이메일 닉네임으로 사용하였던 '갈매기조나단' 이란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비행 속도와 높이와 경계의 범위를 강하게 제한하는 갈매기 무리를 떠나는 조나단에게 '플리쳐' 라는 젊은 갈매기는 조나단을 스승으로 삼고, 둘 사이엔 선문답과 같은 대화가 오고간다. 조나단은 질문을 통해 '정말로 빠르다는 것은 생각한 그 순간에 원하는 곳에 닿아있는 것이다'라는 답을 내놓는다. ● 리좀모델을 알아가면서 갈매기 조나단의 질문과 답이 머릿속을 두드렸다. 나에겐 조금만 더 리좀모델에서의 중심도 깊이도 연속성도 없는 그런 유연성의 전이가 흐름이 아닌 순간에 가까운 빠른 속도감이 느껴지는 '확산'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어졌다. 이 생각은 언어에 앞서 이미지로 떠올랐다. 그 후 난 내 작업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무런 제약 없이 종(縱)으로 횡(橫)으로 부유할 수 있는 공간성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식물 이미지를 다루던 시기의 벽에 설치되던 부조 형태의 작업이 공중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이 작업은 이런 생각들이 출발선이 되었다. 어찌 보면 그동안 작업을 해 오던 나 자신과 내 작업을 타인처럼 바라보고 다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와 관련해 조금은 가벼운 수수께끼처럼 무언가 하나의 이미지를 흘려보자면, 이 작업에선 '거머리'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왜 등장하는지 이 작품을 보는 관람자가 스스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 나는 형태를 만드는 사람이다. 각각의 작품 형태는 고유한 원래 이미지가 개인적인 스토리와 더해지고 변형을 이루면서 만들어진다. 이런 과정이 나에게는 중요하지만 또한 너무나 소소하거나 개인적이라 많이 부끄럽기도 하고, 상당부분 하나하나 개체가 완성된 후 기억의 저 편으로 그 의미가 사라지기도 한다. 또 다년간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바에 따르면, 너무 많은 설명을 통한 작가 스스로의 의미규정으로, 관람자 스스로가 누릴 수 있는 '주도적 해석' 이라는 감상의 재미를 제한하는 건 이 시대의 도가 아니라 하니, 내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칠 생각이다. 그러나 아직 이 작업은 완성의 중간 즈음에 다다른 것 같고 내가 앞으로 이 작업에서 어떤 이미지들과 생각을 더 떠올릴 것인지와 함께 이 형태들의 완성이, 끝이 궁금해진다. 끝이 있기나 할 련지... ■ 이원경
Vol.20170912d | 이원경展 / LEEWONKYOUNG / 李元京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