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形相 그 너머 환還

김명운展 / KIMMYEONGUN / ??? / photography   2017_0906 ▶ 2017_0912

김명운_#007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102×130cm_2015

초대일시 / 2017_0906_수요일_05:00pm

평창동계올림픽 홍보사진展

주최 / 강원도 주관 / 한국사진작가협회 태백지부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기념으로 강원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사진전을 갤러리 그림손에서 개최한다. ● 강원도의 대표적인 자연을 대변 할 수 있는 태백산의 모습은 많은 사진작가들이 렌즈에 담은 장소이다. 기존의 사진들은 태백의 풍광을 담은 반면, 이번 김명운 사진전은 태백의 표면이 아닌, 산의 깊숙한 곳에서 우리가 쉽게 볼 수 없었던 태백의 내면을 담아 내고 있다. 강원도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홍보사진전으로 태백산 곳곳의 사계절을 담아낸 김명운 작가에게 그 기회를 제공하였다. 작가는 태백산의 새로운 풍광과 지리적 환경, 자연적 생태계를 보여주고자 1년내내 태백의 깊숙한 곳을 찾아 우리가 보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신비로운 태백의 내면을, 사계절 동안 렌즈에 담아내었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계절의 변화를 통해 태백 곳곳의 다채로운 풍경을 이번 사진전에서 보여 줄 예정이다. ● 작가는 때때로 태백 산속에서 많은 동물들과도 만나면서, 기존의 태백산이 아닌, 태고의 자연이 보여주는 본 모습을 사진에 담고자 하였다.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태백 곳곳의 자연을 시간과 계절, 환경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스러운 대자연의 힘을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태백에 살고 있다. 작가에게 태백은 곧 자신이며, 영혼이며 아버지이다. 태백 숲에서 만난 고목은 삶의 고된 시간과 역경을 견뎌내고 그 자리에 묵묵히 자연의 흐름과 함께 지내온 영혼인 것이다. 이번 사진전에서 보여주는 고목은 이러한 삶의 과정을 사계절을 통해 우리의 삶과 함께 생각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 갤러리 그림손

김명운_#002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130×102cm_2015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숲으로 들어선 날이다. 소년의 눈으로 임종을 지켜 본 한 자락 슬픔이 스쳐 갔다. '아버지는 왜 그토록 서둘러 삶을 내려놓으신 걸까?' 오랜 시간, 가슴속 깊은 곳에 상처로 남은 의문 이다. 아버지께서 임종하셨을 때가 지금의 내 나이와 같았다. 아이는 아버지의 등을 보며 따라가고, 더 커서는 아버지의 등을 보 고 살아간다 했던가. 겨울 숲에 든 나는 아버지의 등을 닮은 한 그루 고사 목枯死木에 숨을 죽였다. 아파도 아파할 수 없고, 슬퍼도 슬퍼할 수 없는, 아버지 곁에 담담히 어머니도 계셨다. ● '숭고한 희생이 빚어낸 텅 빈 형상形相!' 내 어버이의 지고 지순은 그렇게, 검게 탄 사랑의 흔적과 더불어 겨울 숲에 남아 있었다. 천둥 번개가 치던 밤이었다. 아버지는 두려움에 떠는 자식을 기도 하는 마음으로 감싸주셨다. 그 기억을 좇아 다시 숲으로 갔다. 초록 숲에 안개가 피어 올랐고, 비바람이 몰아쳤고, 아주 오래 전 그날처럼 천둥 번개 가 엄습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산짐승의 울음 소리도 들려 왔다. 그러나 숲은 사락사락 눈이 내릴 때처럼 이내 곧 평온을 되찾았다.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 오신 아버지가 그곳에 자리하고 계셨다. ● '죽음은 끝이 아니다.' '새 생명의 삶으로 영속永續되어 간다.' 숲이 내게 들려준 말이다. 육신이 떠난 자리에 영혼이 머무는 소리로 들렸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도, 또 다른 형태로 형상形象을 빚어내는 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누군가의 한 생이 살을 발라 내고 뼈를 삭인 다음 일편단심으로 자리를 지키는, 한 그루 고사목은 바로 아버지였던 것이다. 먼 고대부터 숲은 위험하고, 신비로운 곳으로 여겨 졌다. 하지만 숲은 또 다른 안식의 거처이자 독백의 장소였다. 아버지의 형상을 발견하고부터 숲에서 만나는 모든 형상은 어둠 속 등대였다. 계절이 바뀔 때면 숲 은 순환의 의미를 되새겨 주었고, 삶은 둥지 밖이 아니라 안이 더 눈부시다 는 사실도 일깨워 주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숲을 찾아가 숨을 고르곤 했다. 비록 완성의 길은 멀지만, 그 미완의 형상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숲과 바람과 고사목과 산짐승들에게 감사하다. ■ 김명운

김명운_#011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130×102cm_2014

김명운의 작업 「붉은 나무」에 대하여 - 1. 지금의 사진 형편 ● 사진은 계술(械術, 기술과 예술의 복합어)이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사진이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치명적인 단점으로 '기술에 의존성'이 거론되곤 했었는데, 오히려 현대에 들어서서는 이 인공적인 기술과의 공명이 예술로 이해되는데 중요해 지고 있다. 그것은, 산업 사회를 지나 정보가 온통 우주를 뒤덮고 있는 시대이기에 기술의 모습과 예술이 한 울에 얽혀 있음이 어색하지 않은 덕분이다. 따라서 이제 사진은 예술의 중심 장르로 이용되고 있으며, 다양한 예술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기도 하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 활발하게 발흥하던 시기에 '경계가 희미해 지고', '장르 간의 연계가 자연스러울' 즈음 예술에 있어서 사진의 활용은 정점에 이르렀다. 사진과 회화, 사진과 조각, 사진과 영화, 나아가 사진과 문학이 마구 얽히며 새로운 표현의 방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시대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최근 들어 디지털의 무자비한 약진은 그 속성에서 보이는 것처럼, 모든 다른 장르와 이종교배(移種交配)가 손쉽다. 그뿐만 아니라 사진 안에서도 기호와 사물 간의 경계가 허물어져 전면과 후면의 교차배치 혹은 한 사물의 새로운 모습/형태로의 재현 또한 매우 손쉬워 졌다. 그뿐인가. 렌즈의 디지털화는 마크로(MACRO) 혹은 마이크로(MICRO) 한 대상에로의 접근이 간편해 졌기에 무한 클로즈업이 가능 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에 따른 사진 기술의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사진 자체에 대한 평가 또한 변하게 만들었다.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의 경계가 희미해 지고, 누구나 다룰 수 있는 편한 도구로서의 사진은 이제 누가 그곳에 있었는가를 구분할 뿐, 누가 찍었는가에 대한 존경이 흐릿해 진 것이다. 이로써 하향 평준화된 사진기술의 보편화는 사진가가 찾아내는 특별한 장소와 대상을 더욱 특별한 것으로 대체해야 하거나, 혹은 더욱 내밀한 일상으로 파고들어 철학을 기반으로 지루한 일상의 표피적 단편들을 불명확하게 나열하게 했다. 마치 독일사진가 볼프강 틸만스(Volfgang Tillmans)의 사진처럼 말이다.

김명운_#023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100×200cm_2014

2. 장소와 대결 ● 지금, 이처럼 사진의 기술적 활용이 매우 심각하게 확산 되어가고 있는 시기에 김명운의 사진을 보면서 들게 되는 생각은 '장소와 대결'이다. 그가 선택한 대상은 나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산에 올라 그 정점에 있는 나무를 찾아내었다. 보편적 나무야 어디나 있다. 그러나 작업의 대상으로서 나무가 드러나려면 특별해야 할 터이다. 더욱 특별한 대상을 찾아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시대의 사진가라면 응당 취해야 할 태도다. 주목(朱木), 그것도 속이 텅 비고 검게 타버리거나, 혹은 다른 자연의 물질로 가득한 주목 나무다. (사진 003, 016) 그가 이러한 주목이라는 나무 앞에 서서 혹은 다가가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삶 속에서 의미가 있는, 그-것 말이다. ● 다시, 사진은 그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신묘한 촬영 기술을 소유한 사진가라 하더라도 곡선으로 찍을 수는 없다. 렌즈의 구면 수차로 인해 대상이 휘어지도록 촬영할 수는 있으나 대상과 직선으로 마주 서야 비로소 촬영이 가능한 사진의 속성은 언제나 그대로다. 우리/사진가는 반드시 대상 앞으로 나서야 한다. 이는, 카메라를 쥐고 그 대상을 향해 발걸음을 떼는 순간 우리를 포박하는 '의식'이 됨과 동시에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채찍 하며 그 대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기도 할 터이다. 그렇다면, 사진가는 대상을 결정하고 찾아 나서는 탐험 시도의 첫 언저리에 자신의 과거를 결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지금의 나를 이루게 하였으며, 어떻게 내가 그 과거와 뒤엉키며 살아왔는가는 사진가가 그 대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발진(發進)의 힘이다. 이 지점이 김명운 작가의 사진을 보는 첫걸음이다. 그가 주목을 향해 산을 오르며 가슴에 안은 것은 아버지다. 보통, 나무 앞에 서서 아버지를 형상(形相)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니까, 사진가의 과거에 속이 검게 탄 주목과 속이 검게 타도록 애끓는 심사를 가졌던 아버지의 모습이 중첩 되는 것은 매우 개인적이며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그가 스스로 찾은 대상이 주목이라면, 그리고 그 주목으로부터 얻어내고자 힘쓴 주목 너머의 형상(形象)이 아버지라면, 그 둘은 이미 등가의 가치를 지닌 대상일 터이다. 과거, 20세기 초반에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는 구름을 찍으며 덧씌우고자 했던 형상(IMAGE)을 이큐벌런트(EQUIVALENT)라고 명명했다. 스트레이트 한 사진이 상상과 창의의 힘을 얻기 힘들다고 판단한 그가 애써 다다른 곳은, 대상과 상상의 대체가 가능한 형상의 유사성 즉 대상 너머의 다른 이미지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며 저것을 함께 공유/상상 할 수 있는 모습 말이다. (사진 008) 3. 중심과 아버지와 작업 ● 김명운의 사진에 이것이 다는 아니다. 그의 사진을 깊숙이 보면 대체로 중앙 중심적이며, 동시에 매우 권위적이다. 파인더 안에 위치해야 할 중심 대상이(속이 검은 주목) 완고하게 거기 있으며, 주변의 나무들은 때때로 안개 너머로 혹은 역광의 빛 속으로 옅게 포진해 있다. (사진 013) 그가 카메라 앵글을 완성하면서 눈으로만 대상을 보지는 않았을 터인 즉, 그의 의식 속에 중심에 대한 '인정/확인'과 그 앞에서 맞서고자 하는 대결의 의식이 함께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몇몇 사진에는 주목을 둘러싼 주변이 더욱 포근하게 보이기도 한다. ● 이번 김명운의 작업은 모두 세로다. 카메라의 앵글이 대체로 세로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나무들 또한 모두 세로다. 그러니까 시인 허만하의 말처럼, 서서 죽는 비처럼, 이 나무들도 죽는 그 날까지 거기 그대로 '서' 있는 세로일 것을 완고하게 발언한다. 뒤에서 빛이 비치는 역광의 사진에서조차 서 있는 나무들이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인 채로 죽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김명운이 스스로 강조한, 저 나무에서 아버지를 찾는 것은 그렇게 아버지가 완고한 수직으로 살았고 그리고 수직으로 죽어 갔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런 아버지를 한편으로 품으며 다시 그 앞에서 커가는/죽어 가는 나의 시선을 '대결점'으로 확인하는 일이 이번 작업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사진의 구성이 다시 완고하다. 흔들림이 없기를 자신에게 기원하며,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세우고, 파인더를 통해 앞을 직선으로 보기를 반복하고, 다시 반복하면서 같은 나무를 향해 셔터를 눌러 만든 사진은 그래서 김명운과 닮았다. ■ 정주하

Vol.20170908j | 김명운展 / KIMMYEONGUN / ???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