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각한 일상

김선태展 / KIMSUNTEI / 金善泰 / painting   2017_0908 ▶ 2017_0926 / 월요일휴관

김선태_무감각한 풍경_장지,먹,잉크,판화기법_104×145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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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908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02:00pm~07:00pm / 월요일휴관

스페이스 엠 SPACE M 서울 서초구 바우뫼로 101 (양재동 138-4번지) 경인프라자 B1 Tel. +82.(0)10.5140.3215 www.facebook.com/spacem2016

김선태 작가의 전시회 『무감각한 일상』에 부쳐 ● 동양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서구철학의 청초한 개념과 명증한 논리가 주는 짜임새에 탄복하게 된다. 이에 반해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동양 고전이 주는 건강한 지혜와 실천하는 삶의 자세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동양미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은 서양예술의 진취적 예술정신을 보고 조바심을 낸다. 반면 서양예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동양예술이 견지하고자 하는 내면화된 정신성을 매우 존중한다. 이렇듯 근본적으로 상이해 보이는 현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의 문장은 우리의 질문에 좋은 답변이 된다.

김선태_복권방_장지, 먹, 잉크, 판화기법_200×135cm_2005

"서구철학과 정신적 수양을 기반으로 삼는 동양철학 사이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그 둘의 출발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구 사상가들은 '자아(Self)'로부터 시작한다. 이 자아는 '외부세계(outer world)'를 의심한다. 그리고 자아는 외부 세계를 연구한다. 동양철학은 세계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자아를 의심한다. 그리고 자아를 연구한다. 그것은 우리 서구인들이 관념론으로 경도되는 이유이다. 세계는 자아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반면 동양인들은 자아는 외부세계의 현상이라고 본다. 따라서 자아와 외부 세계 사이에 차이란 없다. 서구인들이 외부 세계를 연구하고 조작하면서 자연과학을 발전시켰다면, 동양인들은 내면에 대한 성찰을 계기로 내면에 대한 점진적인 지식을 쌓아왔다."

김선태_수레할머니_장지, 먹, 잉크, 판화기법_145×104cm_2005

이 문장의 개요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더라도 동서양의 사상에 대한 윤곽은 충분히 보여준다. 서구의 사상과 예술은 자아가 세계를 발전시킨 역사이다. 동양의 사상과 예술은 세계로부터 비롯된 현상의 본질을 찾아간 역사이다. 이렇듯 장황한 서두를 거칠 때 우리는 비로소 김선태 작가의 의도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동서양이 자아에 무게를 두는가 세계에 무게를 두는가에 따라서 사상의 지형이 바뀌었다. 김선태 작가는 이 두 가지 포지션을 옮겨가며 영역을 확대했다. ● 김선태는 초기에 섬이나 하늘, 산세를 그렸다. 자기 내면에 비춘 외부세계를 따뜻하고 습윤한 감수성으로 묘사했는데, 특히 섬 풍경을 제일 잘 그렸다. 그런가 하면 불가에 등장하는 사천왕이나 동양 신화의 여신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외부 세계가 자기 내면에 반영된 모습을 천진하고 따뜻하게 그리는 방식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2004년 즈음부터의 일이다. 내면에 반영된 외부세계가 아니라, 외부 세계 자체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외부세계가 자연일 때 순수무구의 청정한 본연이건만, 외부 세계가 인사(人事)일 때 사특한 어긋남으로 다가오는 사실에 대하여 작가는 가슴 아파했다. 2005년부터 김선태 작가는 시야를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시켰다.

김선태_술마시는 아저씨_장지, 먹, 잉크, 판화기법_104×145cm_2005

시간에게 삶을 빼앗긴 노약자 · 제도에게 삶을 유린당한 노숙자 · 사회적 통념에 자리를 내준 노동자 · 쾌락의 수단에게 삶의 목적을 박탈당한 알코올 중독자 · 고귀한 가치의 상대적 위치에 있다고 해서 몰가치한 취급을 받는 모든 것이 작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려야 한다. 일단 사진으로 담고 작업실에 와서 장지를 펴고 먹과 물감으로 담담하게 그려갔다. 그들이 '무감각한 일상'을 영위한다면 당연히 작가의 시야와 붓질도 정제되어야 하고 감정도 무덤덤해야 했다. 일말의 감정이나 판단을 자제했다. 먹물이 그려낸 검은 바탕은 땅거미가 져서 칠흑의 밤으로 가는 경계처럼 보인다.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빛을 의지해서 발산하는 갖가지 인간 군상은 초췌하면서도 초연해 보인다. 술에 취해서 누워있는 아저씨는 다시 일어나기는 하려는 것인가? 굽은 등을 겨우 펴가면서 앞으로 느린 걸음을 거듭하는 할머니는 언제쯤 집에 돌아가려나. 그리고 남들이 쓰고 버린 종이 상자들 묶음은 어째서 저리 속되고 진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토록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가? 나약한 비닐 우산에 의지해서 비 내리는 어둔 밤길의 터널을 걷는 여학생들의 미래는 밝은 빛에 놓여있는 것일까? 아니면 영구히 어둔 그림자로 남을 것인가? 당첨되지 않을 복권방은 이 땅에 어째서 이리도 많은 것일까? 그리고 신문지를 주워 만든 임시적인 돗자리에서 나눠 마신 소주의 취함은 두 노숙자를 위로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비시키는 것인가? 작가의 근본 물음은 매우 쉽지만 그 대답은 매우 어렵다.

김선태_여고생들_장지, 먹, 잉크, 판화기법_145×104cm_2005

동양의 고전 『회남자(淮南子)』에 보면 "하늘은 화(和)를 품었으되 내려오지 않고 땅은 기(氣)를 품었으되 올라오지 않는다. 그저 텅 비어서 적막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가운데 어둡고 어슴푸레해서 어떠한 조짐도 없다. 기는 오로지 깊고 아득한 곳에 통해있을 뿐이다." 이 문장처럼 김선태 작가의 배경화면을 잘 설명하는 문장도 드물 것이다. 하늘에 조화가 있고 땅에 기운이 있다면 응당 통해야 한다. 통하지 않은 상태는 어둠으로 둘러싸인 적막무짐(寂寞無朕)의 단계이다. 하늘의 조화와 땅의 기운이 소통하게 해야 한다. 그제서야 적막무짐이 아니라 본연의 우주가 된다. 인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도 누구나 모두가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다만 사회와 당사자 두 가지 주체가 모두 귀중한 가치를 스스로 막았기 때문에 작가가 그려낸 현상들이 나타난 것이다.

김선태_지난밤_장지, 먹, 잉크, 판화기법_135×200cm_2005

우리 동양의 고전 중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귀중한 것이 있다면 『시경』과 『서경』이 한자리씩을 차지할 것이다. 『시경』에 나오는 단어 중 가장 중요한 말을 고르라면 당연히 '병이(秉彝)'일 것이며 『서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라면 응당 '강충(降衷)'을 꼽을 것이다. '병이'는 인간의 항상적인 도리를 뜻하며, '강충'은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좋은 천성을 가리킨다. 병이와 강충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다만 살다 보니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었을 뿐이다. 마치 평생 단 한번도 음악을 듣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고 산 사람이 있듯이, 누군가 좋은 천성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살다간 사람들이 허다하게 많을 것이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은 병이와 강충을 자각하고 본연의 천성을 회복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천지가 제 자리를 찾고 만물이 순행한다고 가르친다. 스스로 천성을 잊은 것도 문제이다. 그러나 그들을 방치하는 외부 세계의 제도도 문제이다. 김선태 작가가 문제로 삼은 것은 이 지점이 크다. 사회가 적극적으로 길 잃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수적 사회 시스템이다. 경제적,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적으로 쇠락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가난은 더 큰 가난으로 이어지고 부유함은 더 큰 부유함의 씨앗이 된다는 논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1974년에 노벨상을 받은 스웨덴의 경제학자 칼 군나르 뮈르날(Karl Gunnar Myrnal)이 평생 강구한 누적적 인과관계 이론이 그 사실을 밝혀냈다.

김선태_취한 아저씨_장지, 먹, 잉크, 판화기법_104×152cm_2005

보수주의적 경제학의 대명사는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시장, 즉 경쟁을 최고의 가치라고 선전한다. 경쟁의 이유는 바로 더 많은 자본의 소유를 위함이다. 김선태 작가는 자본의 소유가 진정한 삶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여민동락(與民同樂)하여 인정을 나누고 어려움을 서로 감싸줄 때 삶의 의미가 생성되며 병이와 강충이 명증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삶은 부유함과 병이와 강충의 실현이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지점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 병이와 강충을 자각하고 하늘이 부여한 천명을 따라 사는 삶은 매우 중요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숭고한 가치를 촉구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렇다고 보수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내세우는 자본, 명예, 권력, 학벌과 같은 가치는 너무나 세속적이고 치졸하다. 이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고 평생을 추구한 경제학자가 있다. 바로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라는 경제학자이다. 그는 진보주의 진영에서 사람들의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내세우는 사람이다. 이 위대한 경제학자는 사람이 올바르고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한 일곱 가지 조건을 연구했다. 건강 · 안전 · 존중 · 개성 · 자연과의 조화 · 우정 · 여가라는 것이다. 동양이 내세우는 내면적 가치와 서구가 추구해온 외부 세계 정복을 통한 인간 부의 실현 사이에서 참으로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가치라고 생각한다.

김선태_할머니_장지, 먹, 잉크, 판화기법_145×104cm_2005

2005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너무나 잘 포착해냈던 작가는 갑자기 인간 삶의 고된 측면으로 자신을 몰아갔다. 사회가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이 있었을 것이다. 12년이 지난 지금 작가는 인간의 보편적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의 바램은 현실 역사에서 언젠가는 실현된다는 말이 있다. 앤디 워홀의 상업적 상상력은 현실이 되었다.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도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동원이나 거연의 대산수도 중국의 어느 산골에서 아직은 살아있다. 발자크가 그린 불륜도 어딘가에서 늘 일어나며 마티스의 영감도 실현이 되어 전대미문의 춤사위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김선태 작가가 생각하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되고 대부분의 인간과 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우정을 나누는, 삶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무감각한 일상'을 반성하여 활연(豁然)하게 소통하는, 일상이 즐거운 세계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 이진명

Vol.20170908c | 김선태展 / KIMSUNTEI / 金善泰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