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7_0907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트렁크갤러리 TRUNK GALLERY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66(소격동 128-3번지) Tel. +82.(0)2.3210.1233 www.trunkgallery.com
조정숙- 소멸하는 존재에 참여하는 시선 ● 조정숙은 장노출(노출시간은 ND 1000필터를 사용해서 2~8초 정도를 주었다)의 사진을 통해 흐르는 물의 표면을 건져 올렸다. 경주 보문정 호수와 팔공산 치산계곡의 수면을 반복해서 찍었다. 치산 계곡의 경우는 컴컴한 산 속의 깊은 계곡으로 파고드는 빛에 의해 드러난 오전 11시~오후 3시 사이에만 촬영했다. 빛이 있어야 대상은 보이고 그로인해 출현하는 가시성의 세계는 사진이 사진일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의 하나다. 특정한 시간과 빛에 의해 가능해진 특별한 수면은 다채로운 변화 현상을 현기증 나게 안겨준다. 사람의 눈은 그 흐름을 고정시키지 못하고 다만 흘려보낼 뿐이지만 사진은 순간의 시간을 응고시켜 놓는다. 지금 막 사라진 흔적들, 지나가버린 것들의 뒤늦은 현존이자 늘 사후적인 결과물이 모든 이미지의 운명이자 사진 이미지의 필연이다.
사진 속에는 물의 흐름이 어지러운 선묘를 남기고 있고 또한 수면으로 난반사 된 물 바깥의 외부세계가 다채로운 색상으로 얼룩져있다. 아울러 그 위로 떠 있는 여러 부유물 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형세가 다분히 몽환적인 이미지, 격렬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흔적을 안겨준다. 명시적 존재성이 슬쩍 뭉개진 자리에 빛과 색채로 얼룩진 자취만이 돌연 멈춰 있는 장면이다. 얼핏 그 장면은 모네의 수련 연작이나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회화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모네는 오로지 표면만을 안기는 수면을 캔버스의 존재론적 조건인 평면성과 일치시키면서 그 평면 위에 평면적인, 표면만의 세계(수면)를 옮겨 놓았던 것이다. 이른바 모더니스트 페인팅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인식 속에서 가능한 그림이다. 표면뿐인 수면에 비치는 대기의 현상, 날씨와 빛과 바람과 함께 하늘이 짓는 풍성한 표정, 그 순간적인 기미를 모네는 물감과 붓질의 물리적 흔적으로 응고시켰다. 동시에 그는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니라 인간의 눈이 특정한 빛의 순간에 드러나는 바로 그 대상의 형태와 색채를 그리고자 했고 그로인해 당연히 수면은 또한 요구되었다. 결국 상이한 빛의 조건에 따라 달리 보이는 수면의 모습은 색채와 명도의 차이로 인해서다. 이러한 연작을 통해 이제 그림의 정체와 의미는 그리고자 하는 특정 대상이 아니라 캔버스들 사이의 차이의 관계가 결정하게 되었다.
조정숙 역시 화면과 수면을 일치시키면서 그 수면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깊이가 부재한 수면 위에서 벌어지는 이미지의 다양한 흔적들, 물 위로 몰려다니는 여러 존재들의 부유하는 모습을 연작으로 기록하고 있다. 끊임없이 흐르고 이동하는 물 위에 떠있는 존재들은 주변의 나뭇가지와 풀, 꽃들이다. 바람에 의해 수면 위로 낙하한 것들인데 이것들이 물의 격렬한 또는 지속적인 흐름에 의해 함께 흔들리고 선회하며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무와 대지에서 분리된 것들이 물의 흐름 속에서, 내 눈앞에서 지금 막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수면에 반영된 하늘의 기미들 역시 그렇게 변화무쌍하게 사라지고 있다. 결국 작가가 찍고자 한 것은 물 위에서 부유하는 저 존재들의 흔적으로 보인다.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자 돌이킬 수 없는 존재의 운명들이다. 삶이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우발적 사건을 필연적인 운명으로 끌어안고 사는 것처럼 이 낙엽과 꽃잎들 또한 주어진 자연 조건 속에서 소멸하는 장엄한 운명을 매혹적인 아름다움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봄날 벚꽃 나무에서 눈송이처럼 떨어지는 꽃잎과 수면 주변에 자리한 나무와 풀, 꽃 등 주변 자연에서 날아와 떨어진 것들로 이루어진 사진은 모든 생명체의 운명을 사뭇 감상적으로 안겨준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사진은 수면에 떨어진 것들이 죄다 물의 흐름에 의해 급속히 쓸려가고 끝내 사라지고 소멸하는 순간을 응시한 결과다. 생각해보면 물 또한 지속해서 사라지는 중이다. 동일한 물은 없다. 그 물위에 낙하한 생명체들 역시 물과 함께 일시적 생을 마감하고 사라지는 중이다. 이 두 존재는 맹렬한 시간의 흐름, 속도 앞에서 속절없이 소멸하고 있다.
자연은 부단히 변화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넘어가면서 무수한 생명들을 산포시킨다. 움직임 속에서 하나의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쉬지 않고 옮아간다. 그렇게 쉼 없이 움직이면서 기존의 형태를 만들고 부수고 소멸시키면서 또한 생성시킨다. 인간은 그 같은 자연의 생명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반추한다. 자연의 이 무한영역에 자신의 유한한 생을 은밀히 비춰보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과 생명체들을 본다는 것, 그것들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유심히 들여다본다는 것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무한성의 타자성'에 은연중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한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바로 예술의 길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불교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한 어떠한 실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는 커다란 운동일 뿐이기에 그렇다. 살아있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그대로 있지 않고 변화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제행무상이다. 제행은 만물이 아니다. 물(物)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행이며, 살아있는 일체는 그 행으로써 무상한 것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무상은 슬픔에 앞서 진리이고 세계는 무상함으로 인해 슬프다. 그리고 이 슬픔 때문에 인간은 사람다운 비애를 간직하고 그 슬픔이 사람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수면위에 떨어진 꽃과 낙엽들이 물과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는, 사라지는 일련의 과정을 담담히 기록하면서 그로부터 자연스레 파생하는 모종의 비애와 슬픔, 생과 사에 관한 다양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수면에 떨어진 지극히 가벼운, 덧없어 보이는 생명체의 운명을 응시하면서 여러 상념에 잠겼을 것이다.
"물 위에 떠있는 주검들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부패를 시작하거나, 어느 한갓진 여울에 떠밀려 존재를 버리는 과정들을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다. 유속의 시간위에 떠있는 꽃잎과 낙엽들이, 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소멸해 가는가를 살피게 되었다. 눈길 주지 않는 곳에서 자라나고, 꽃피우고, 낙엽이 되어 떨어진, 제 생명을 다한 꽃잎과 낙엽들이 물과 함께 사라지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로 태어나 다시 물로 돌아가는....... 덧없이 소멸하는 부유물들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물의 순환은 나를 반추하게 하는 사유의 거울이다."(작가노트)
동양에서 산수화란 산과 물을 그린 것이고 양과 음을 표상화한 그림이자 자연 공간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존재의 운명성을 가시화한 그림이었다. 특히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물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장면을 안긴다. 산과 강은 영원성과 변화를 암시하는데 특히 물은 창조력의 원천이자 풍요로운 생산성 또는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이자 침투와 부딪침, 씻김과 압착 등을 통해 산과 돌을 천태만상으로 만드는 존재로도 이해했다. 이처럼 동양인들에게 물을 모든 사유와 철학의 근간이었다. 형태의 다양성과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는 물은 자연이 이치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우주 원리들을 개념화하는 주요한 모델'(사라 알란)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산수화에 등장하는 점경의 작은 인물들은 인간사의 짧음이나 무상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들은 산과 강에 의해 표현되는 공간과 시간 안에 불가피하게 놓인다. 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알려주는 동시에 산과 강의 풍경에 의해 상징된 우주 안에 한 사람을 묘사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지시한다. 이처럼 중국의 회화와 사상은 산과 물의 상관관계를 탐구하며 이 풍경을 끊임없이 해체해온 결과이다. 우리 한국인들 역시 그런 시선과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그로부터 인생사의 여러 굴곡심한 감정을 헤아리고 모종의 지혜를 찾아왔다고 본다. 조정숙의 이 사진 속에도 그런 눈과 마음들이, 산수화에서 엿보이는 물과 생명체의 상관관계가 은연중 투사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영원히 반복되는 물의 순환과 덧없이 사라지는 생명체를 통해 자신과 자연이 불가분의 관련성을 맺고 있음을 절실히 깨달으며 그로부터 치유의 시간 또한 은밀히 다독이는 것이다. ■ 박영택
Vol.20170907a | 조정숙展 / CHOJEONGSOOK / 曺貞淑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