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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율 홈페이지_www.haeyul.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료 / 1,500원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추석 휴관
진천종박물관 JINCHEON BELL MUSEUM 충북 진천군 진천읍 백곡로 1504-12(장관리 710번지) Tel. +82.(0)43.539.3847~8
「Stroke」로 촉발된 「No Interaction」 ● 세상에 대한 인간의 비전을 시각적 대상물을 생산하여 보여주는 것이 미술가들의 활동이라 할 때, 각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비전을 보여주기에 알맞은 주된 도구와 재료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노해율의 경우 핵심 재료와 도구는 메탈과 동력을 제공하는 엔진이다. 이것들을 통해 그가 만들어내는 것은 '움직임 자체'로 여기서 굳이 '자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비전은 '움직이는 대상'을 만들고, 단순히 바라봄으로써가 아니라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움직임'을 지각하고 인지하는 과정 속에서 작가의 세상과 관람객의 세상이 만나는 추상적인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사에서 움직임에 주목했던 흐름은 20세기 초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속도'에 대한 자각이 민감해지고 이동의 편이가 가져온 일상생활의 빠르기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체화시키려 했던 시도와 관련이 있다. 미래주의, 구축주의의가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미래주의가 현대 생활의 속도와 움직임, 기계 문명 발달에 대한 찬양을 은유하는 평면적인 작업에 몰두했다면, 구축주의는 기술과 '실제 재료'("실제 공간 속의 실제 재료 (real material in real space)"라는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경구 )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3차원의 구축물들을 통해 움직임, 속도, 기술을 보다 구체적으로 도입, 실현한 차이를 보였다.
노해율의 작업을 굳이 비교하자면 미래주의 보다는 구축주의자들의 작업 방식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주지하다시피 새로운 사회, 유토피아를 꿈꾸는 혁명가들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면서 실제 삶에서 기능과 쓰임에 부족하지 않은 예술을 꿈꾸었던 타틀린(Vladimir Evgrafovich Tatlin)과 같은 공리주의적 구축주의(Utilitarian Constructivism) 와 달리 기술을 통한 순수한 형식 탐구를 추구했던 나움 가보(Naum Gabo)나 라즐로 모홀리나기(László Moholy-Nagy) 계열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들은 1960년대 등장했던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들로, 노해율 작업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
가보가 과학적, 기술적 사유를 모델로 조형 형태를 제시하는 관념주의자에 가까웠다면, 모홀리나기는 기술적 요소를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예술과 기술의 직접적인 접합을 시도한 실증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가보에게 기계적 구조는 그의 예술적 지향점을 경주해가는 도구의 의미였다면, 모홀리나기에게는 기술, 기계는 예술 자체로, 그의 작품은 "반(半)조각 반(半)기계였다. 또한 이들은 전통적이고 상투적인 배열 방법인 '구성composition'이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기능적으로 결합하는 '구축construction'으로 대치하고자 했다. 이때 구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덩어리(mass)로 제시되는 조각의 전통을 전복시키기 위해 아크릴, 유리와 같은 새로운 재료와 기술의 도입을 통해 빈 공간, 빛, 소리 등 비물질적인 요소들을 조각의 요소로 끌어들이고 구축하여 실체화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노해율 역시 금속, 나무와 같은 단단한 물질성을 가진 재료와 함께 빛, 소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의 작업에서 빛은 주로 LED 전구가 뿜어내는 빛과 그것의 움직임으로 통해 실체화된다. 은유적인 의미로서의 빛 또는 물감이 만들어내는 일루전으로서의 빛이 아니라 빛은 구체적인 실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다루어지며, 이때 명과 암의 대비를 통한 빛이 아니라 전구들의 점멸하는 '움직임'을 통해 드러남으로써, 빛의 사용 방식에 특징을 갖는다. 소리는 작품의 움직임 속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주를 이루는데, 소리와 관련해서는 특히 초기 작업 「Musical」시리즈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리즈에서 소리와 빛은 유기적으로 반응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소리는 불빛을, 불빛은 소리를 쫓는다". 빛과 소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 강화시킨다. 여기서 소리, 빛은 물질로 존재하는 다른 대상을 암시하는 비물질이 아닌 그 자체로 실체화된다.
앞서 노해율 작업의 미술사적 위치를 살펴볼 수 있는 선구적 예로 가보와 모홀리나기의 경우를 들었다. 이 둘은 과학기술을 예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 상이점을 보였는데, 노해율의 경우 이 둘의 입장을 모두 포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기술을 통해 움직임을 만들어냄에 있어 기계장치를 억지로 숨기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강박을 느끼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모홀리나기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내기도 하고 가보의 예처럼 조형성과 움직임의 특이성에 따라 숨기기도 한다. 따라서 그에게 기술과 기계장치는 예술자체이기도 하면서 작가의 세계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비전은 'No Interaction'이다. 주로 '상호작용'으로 번역되는 'interaction'은 적어도 둘 사이(inter)에서 어떤 행위(action)가 교환되고 쌍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때 발생한다. 작가는 이 작품들을 통해, "전체적인 앎, 인지에 대한 불확실성, 어긋남, 파편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즉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파악되고 소통될 수 있는 가능성, 희망에 대해 불신을 드러낸다.
전시장 중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레일을 이용한 작품에서 3개의 금속 상자들이 레일 위에서 흡사 기차처럼 움직인다. 이때 각 동력의 추진력을 상이하게 조정해 놓았기 때문에 움직이는 속도의 차이를 보이며 어느 시점엔 서로 충돌하게 된다. 충돌은 상자들의 진행 방향을 바꿔놓는 스위치 역할을 하여 지금까지의 진행방향과는 역으로 움직이게 한다. 원형의 레일을 움직이기 때문에 역방향으로 움직이던 차량은 다시 충돌+방향전환을 반복하게 된다. 원형의 레일은 이 작품을 지배하는 전체상이면서 상자들이 제아무리 동력을 가지고 움직인다 해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로 작용하지만, 상이한 동력에 근거한 움직임은 원의 전체성을 무너뜨리고 각각의 방향과 움직임을 강조한다. 만났다가는 헤어지는 지속적인 움직임은 원형 레일의 완전함에 틈을 낸다.
그 옆에 놓인 사각 기둥 형태의 작업은 세 개의 부분으로 잘려 각자 움직이는데 이들 또한 속도를 달리하며 움직이기 때문에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기둥을 완성해가기 위한 움직임이 아닌 영원히 어긋나고야 마는 파편화된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런 움직임의 특징은 천장에 매달린 작업 또한 마찬가지다. 이 둘이 하나의 기둥으로 온전해 지는 것은 아주 찰나의 것일 뿐, 서로 엉키고 뒤틀리는 움직임 속에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Musical」시리즈 이후로 볼 수 없었던 비디오 작업이 눈에 띤다. 어떤 배경 장치도 없는 하얀 벽 앞 좌측에는 현대 무용수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몸동작이 지속되고 그 우측에서는 드럼연주자의 불규칙한 연주가 흘러나온다. 화면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로 정확히 나뉘는 영상은 실제로 두 대의 카메라를 동원하여 촬영한 것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아주 짧은 순간 자연스러운 흐름이 끊기면서 화면이 튀는 느낌이 드는데, 이것이 바로 두 대의 카메라로 촬영한 것을 교차 편집한 것에 대해 작가가 남겨 놓은 힌트이다. 이는 바로 인간의 눈을 마치 카메라의 눈인 것처럼 상정해 놓고 둘이 아닌 하나의 눈으로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추상적인 주체의 시각, 다시 말해 일점 원근법이 만들어 내는 일루전의 공간에 대한 역(逆)은유라고 볼 수 있다. 소실점을 중심으로 그 소실점과 위치를 같이 하는 작가와 관람자의 눈이라는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무한한 전체로 펼쳐지는 원근법적 공간과 전체로서의 지각과 인지가 갖는 불확실성, 부정확함을 지적하면서 분리된 화면, 조각난 공간, 서로 어느 지점에서도 만나 어우러지지 않는 몸짓과 소리의 파편들을 보여준다. 이 비디오 작품은 특히 초기작 「Musical」 시리즈와 대별된다. 소리와 빛의 유기적인 반응과 움직임을 보여줬던 「Musical」과 달리 「No Interaction」이라는 제목처럼 상호작용하며 전체 상과 감각을 이뤄내는 것의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다.
'움직임' 이라는 비전을 놓지 않고 진행되어온 「Musical」, 「Swing」 「General Move」, 「Movable」, 「Balance」, 「Self Action」, 「One Stroke」, 「Layered Stroke」에 이은 「No Interaction」시리즈는 공교롭게도 현재까지 작품 흐름의 중앙에 해당하는 「Balance」시리즈를 기준으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Balance」통해 그가 말했듯이 흔들리는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는 움직임을 통해 불균형을 균형의 방향으로 잡아가는 것처럼, 이전 작품들은 다양한 움직임 속에서 찾아가는 전체성과 온전함의 느낌이 강했다면, 이후로는 온전한 전체에 균열을 내는 'stroke'가 발생시키는 움직임과 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행보를 이렇게 둘로 나눠 보는 것은 어쩌면 현재 작가가 지향하는 것을 거스르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이 또한 「Balance」를 중심으로 펼쳐보는 전체적인 조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노해율의 작업은 지속적인 움직임 속에 펼쳐지는 작가의 세계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시각적, 물질적 등가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비전 또한 지속적인 변화와 움직임 속에 있으며, 이를 시각화한 작품의 움직임은 비전의 변화에 따라 변모한다. 지금까지 여러 시리즈를 통해 보여준 작가의 세상에 대한 비전의 움직임에 다시 stroke를 가하고 현재의 것을 단편적인 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방향과 움짐임이 어떤 것이 될지 기다려본다. ■ 김재도
Vol.20170819e | 노해율展 / NOHHAEYUL / 盧海律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