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OCI YOUNG CREATIVES 유쥬쥬-마더랜드

유쥬쥬展 / U JUJU / mixed media   2017_0817 ▶ 2017_0909 / 일,월요일 휴관

유쥬쥬_K2_거울, 혼합재료_27×97×6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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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817_목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17_0826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삭제된 삶을 회복하는 몸짓"인간의 삶은 얼마나 쉽게 삭제되는가."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p. 19) 본래 성스러운(?) 교리를 갖가지 죄로 물든 이들에게 전파한다는 의미로 생겨난 단어, 프로파간다(propaganda/선전). 이 말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쟁의 명분을 심어놓기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고, 다시 자본주의 아래서 수많은 이들에게 상품을 사들이도록 하는 기업의 교활한 도구로 전락하였다. 미국의 철학자인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우리는 어떠한 시대적 관점이 우리를 비난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 관점의 전염성에 포섭되지 않으면 배제될 수 있다는 강박으로 늘 두려워하고 우울해한다. 필자가 유쥬쥬의 작업 전반에서 포착한 키워드는 이렇듯 시대에 공헌하며 갖가지 모습으로 변신해온 '프로파간다'와 '관점들'이다. ● 근래 유쥬쥬가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The North」시리즈에는 북한의 인쇄매체에서 따온 갖가지 아이콘들과 더불어 거울을 자르고 이어 붙여 만든 북한의 선전문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의 작업 전반에서 일괄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직접 노동에 참여하면서 작품을 생산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The North」시리즈에서도 반복된다. 그는 좁은 스튜디오 안에서, 마치 과거의 유리세공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거울을 직접 자르고 붙여 그 사이에 단어와 문장을 심어 놓는다. 그리고 그 작업방식은 스테인드글라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우리는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종교와 이념이 세속화되어 궁극적으로 통치의 수단이 되는 과정의 유사함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에서 선한 신은 빛으로 등장하였으며, 무지몽매한 자들을 일깨우는 계몽(enlightenment) 역시 어둠의 세계에 빛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지성적인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감성을 어루만지며 그들의 정신 속을 파고들어왔다. 북한의 프로파간다 역시 마찬가지다. 인민의 생과 사를 좌우하는 거대이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령을 아버지(father)로, 당을 어머니(mother)로 섬길 것을 요청하며, 동일한 악의 대상을 설정하고, 공동의 승리가 미래에 부여할 환희라는 일루전을 심어놓는다. 이처럼 빛으로 표상되는 이념의 허상을 우리는 유쥬쥬의 작업에서 엿볼 수 있다. ● 우선 우리는 유쥬쥬가 「The North」시리즈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거울이라는 소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울은 빛을 반사시키고 이미지를 반전시키는 매체이다. 거울로 된 그의 작업 앞에서 관객들이 우선 집중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작품 자체이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일 확률이 높다. 자크 라캉의 '거울단계'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을 비추는 도구에 의해 세계에서 분리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게 되며, 이때부터 상징계로 진입하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것은 실재 이미지가 아니라 반전되고 왜곡된 상이다. 유쥬쥬의 거울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갖가지 텍스트들 역시 그러하다. 텍스트, 그 중에서도 이념과 사상을 함축하는 프로파간다는 상징계를 대표하는 요소이기도 하고, 인민으로 하여금 의심의 여지없는 것으로 믿게끔 만드는 장치로 작동하지만, 사실 그것들 역시 왜곡된 허상에 불과하다. 즉 우리가 유쥬쥬의 「The North」시리즈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소재와 텍스트가 만들어내는 여러 겹의 왜곡된 장면인 것이다. 작가는 이 작업들을 제작하기 위해 스테인드글라스 제작법을 사사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작업들은 종교적 예술작품들의 전유물인 모종의 아우라가 발산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중세 종교의 대표적 상징물인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으로 형상화된 신을 투과시켜 바닥에 비춤으로써 사람들에게 그 신성함을 제시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빛 그 자체'를 드러내지 않고, 인공적 요소로 필터링하여 – 즉 왜곡하여 –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역시 「The North」시리즈가 말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신격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념은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비단 특정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흔들림 없이 굳게 믿어온 진리와 윤리라는 것 역시 일방향성과 폭력성을 숨기고 있는 허상에 불과하다.

유쥬쥬_비가 오고 큰 바람이 불었다_거울, 혼합재료_가변크기_2017

이번에 유쥬쥬는 프로파간다를 담은 작품들과 더불어 거울로 만든 18자루의 총과 5점의 병풍을 선보인다. 텍스트에서 다소 빗겨간 것들이다. 사실 시각예술가에게 텍스트는 다루기 쉽지 않은 요소 중 하나이다. 은유와 은폐가 덕목으로 여겨지고, 비-진리와 비-미학을 지향하는 현대미술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텍스트는 그에 반하는 것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영문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는 프로파간다를 작품에 배치하고, 국문 표제를 달아놓음으로써 이에 대한 난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실제로 매우 함축적으로 사용되는 영문 텍스트는 문학적, 상징적, 현실적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으므로,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문 텍스트는 반대로 매우 명료하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차단한다. 총과 병풍 역시 매우 구체적인 형상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유약한 거울로 만들어지면서,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히고 외풍을 막아내는 본래의 도구성과 유용성이 훼손된 상태로 나타난다. 오히려 그 위에 맺히는 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왜곡된 또 다른 얼굴이다. ● 유쥬쥬의 이전 작업부터 근래 작업들에까지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살펴보자면, 아마도 일상적 사물의 본래 기능을 제거하되 레디-메이드처럼 작가의 물리적 개입을 최소화하지 않고, 신체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일면 수공예적이고 일면 퍼포머티브하다. 그리고 이로써 도출되는 것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과 반대되는 구체성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미술과 공예 그리고 디자인을 구분하면서 '기능'과 '도구성'은 중요한 화두로 작용해왔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로 '삶=예술'이 되고자 하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있어왔지만, 아직도 현대미술에서는 작가의 손재주나 작품의 사용보다는 개념과 사상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면에서 유쥬쥬의 작업은 이러한 경향을 거스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과거 작업들을 통해 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 유쥬쥬가 2012년부터 지금까지 지속해오고 있는 대표적인 작업으로는 「슈퍼뮤지움 프로젝트」가 있다. 이 작업은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품들이 언젠가 박물관에 고이 놓여있는 유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작가는 공장에서 일괄적으로 찍어낸 여러 상품들(마대자루, 냅킨, 사탕, 과자 포장지 등)을 이용해 소품을 만들고, 그 소품들과 더불어 작품에 직접 등장한다. 이는 얼핏 윌리엄 모리스가 19세기 말에 주창한 바 있는 '예술공예운동'을 떠올리도록 한다. 충분한 자본을 획득하지 못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일상에서 기업이 생산한 공산품이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예술을 소비하며 살아가므로, 유사한 감각과 취향, 감성을 지니게 될 확률이 높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이처럼 동일해진 성향은 새로운 통치의 대상이 되곤 한다. 고로 우리는 현실 속에서 각자의 예술적 성향을 발휘하며, 이를 향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쥬쥬의 작업에서 필자가 발견한 것은 이에 대한 가능성이다. 그는 노끈으로 짚신을 짓고, 과자 포장지로 옷을 만든다. 그리고 일회용 은박식기에 멋들어진 장식을 새겨놓는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의 저자 이본 취나드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유명한 등산가이자 세계적인 아웃도어의류 브랜드인 '파타고니아'를 설립한 취나드는 행복한 삶을 위한 소소하고 다양한 지침을 내놓은 자이기도 하고, 패트병으로 섬유를 만들고, 블루사인의 승인을 얻은 옷을 생산하는 자이기도 하다. 유쥬쥬 역시 우리의 지난한 일상에서 '새로운 인간의 조건'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소소하지만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과 원래 있던 것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그의 작업에는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워홀의 '브릴로박스'와 같은 과거의 흔적들이 엿보이기도 한다.

유쥬쥬_(수정) 나를 낳은 어머니를 언제나 못 잊듯이_ 스테인드글라스, 거울, 혼합재료_640×1340cm_2017

슈퍼마켓은 유쥬쥬뿐만 아니라 물질만능주의와 물신(Fetisch) 그리고 예술의 허상에 대한 고민을 해온 많은 예술가들이 다뤄온 소재이기도 하다. 1990년 기욤 바일은 스위스 바젤에 있는 니티만 갤러리를 슈퍼마켓으로 변모시키면서 '새로운 슈퍼마켓'을 제작한 바 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전시장 안에서는 구입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식량으로 기부되고, 전시가 끝난 뒤에는 다시 상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물들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또한 쉬젠 역시 '샹아트 슈퍼마켓' 프로젝트에서 상하이의 슈퍼마켓을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놓았는데, 그곳에서 그는 내용물을 비우고 재포장한 상품들을 판매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는 예술의 허상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에 더해 덴마크의 아티스트그룹 슈퍼플렉스 역시 그들의 홈페이지에 임시로 '슈퍼마켓' 툴을 만들어 자본주의 안에서 구축되어온 상거래의 시스템에 대해 사유하도록 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의 작업과 유쥬쥬의 「슈퍼뮤지움 프로젝트」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아마도 신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그 답이 될 것이다. ● 무엇보다 그는 부지런한 예술가이다. 무엇이든 만들기 전에 그 공정을 익히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기성품이나 인공물을 활용하여 새로운 수공예품을 만든다. 유쥬쥬는 새로운 사물을 만나게 될 때 본능적으로 그것과 다른 것을 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이때 항상 수반되는 것이 그 결합의 물리적 기법에 대한 고민이다. 현대미술의 트렌드를 살펴볼 때 다소 아이러니컬하게 여겨지는 지점은 모더니즘 시대에까지 고귀한 정신성에 밀려 하등한 것으로 취급되던 신체성이 여전히 온전하게 그 가치를 온전히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향으로 인터렉티브아트, 사운드아프, 퍼포먼스 등의 새로운 시도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나 예술가의 신체적 개입은 아직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양태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과연 몸이 없는 생명과 인간은 존재하는가? 여러 현상학자들의 말처럼, 몸은 정신의 부수물이 아니라 정신을 존재하도록 하는 근원이 아닐까? 이러한 지점에서 유쥬쥬의 신체적 개입은 새롭게 해석될 필요가 있을 듯하다. ● 유쥬쥬는 「The North」시리즈와 「슈퍼뮤지움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작업들, 「Vanitas」, 「Friends」, 「Flower」, 「Flower Tree」, 「Fruit Wrap Flower」, 「The Listener」에서도 이러한 신체성을 드러내왔다. 「Vanitas」에서 그는 아시아에서 유난히 발달한 푸드 카빙 데코레이션(과일조각)으로 17세기 유럽의 바니타스 정물화를 재현하였다. 런던의 작업실에서 시간의 간격을 두고 촬영된 이 작품에는 자연적 요소로서의 시간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 잘 조각된 과일 그리고 작가에 의해 더해지고 덜어지면서 이동하는 사물들이 함께 공존한다. 「Flower」와 「Flower Tree」, 「Fruit Wrap Flower」는 여러 사물들을 이용하여 꽃이나 화환을 만들었던 작업들이다. 이 작업들에서도 작가는 직접 손으로 사물들의 본래 쓸모를 제거하고, 새로운 쓸모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들 중 일부가 – 그저 조형물로 남기를 거부하고 – 유명 작가의 개인전 축하 화환으로 보내졌다는 에피소드는 유쾌한 해프닝의 오마주처럼 다가온다. ● 종교와 이념, 물신 앞에서 개별적 인간의 삶은 너무도 쉽게 삭제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미의 의미를 드러내는 자리에 관객의 반전된 얼굴을 비추도록 하는 유쥬쥬의 작업은 그 삭제된 인간의 삶(상징계에 의해 왜곡된 삶 그 자체)을 다시금 드러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의 적극적인 신체적 개입 역시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난해한 개념과 관념 그리고 사유가 범람하는 현대미술 안에서 그의 작업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김지혜

Vol.20170817i | 유쥬쥬展 / U JUJU / mixed media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