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7_0817_목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17_0826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회화의 종말, 종말 이후의 회화 ● 정해민은 파괴와 폭력, 환란, 파국의 장면을 멀리 공중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린다.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숱한 인간 군상이 격돌하거나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는 모습이 어스름한 불빛이나 분출하는 화염 사이로 흘깃흘깃 보이는데, 다분히 묵시록적인 이러한 장면을 그리기 위해 정해민은 '포토샵(Photoshop)'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때에 따라 미디어와 인터넷에 유통되는 기존의 이미지를 콜라주하여 조합하기도 하고, 포토샵의 페인팅 툴로 직접 그리기도 한다. 그리고 기존의 이미지나 작가가 포토샵으로 그린 이미지는 모두 작가의 묵시록적 비전을 구성하는 단위가 되어 그의 컴퓨터에 저장되었다가 전체 화면에 부분적으로 소환된다. ● 그의 작업실에는 캔버스와 붓과 물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은 파노라마 장면을 펼쳐놓을 수 있는 광폭의 모니터와 대용량의 고성능 컴퓨터가 있다. 작가의 첫 개인전이 되는 이번 전시를 위해 정해민은 높이 2미터, 길이 30미터에 달하는 장대한 묵시록적 장면을 구상했는데, 이는 OCI미술관의 1층 세 벽면에 설치될 것이다. 관람자는 세 벽면의 대형 회화 안에서 정해민의 종말론적 장면을 마주하게 되는데, 작가는 이러한 장면을 그리기 위해 오랫동안 포토샵 프로그램과 씨름했으며, 그것을 출력한 2m 높이의 캔버스는 대형 이미지를 출력할 수 있는 프린터의 사양에서 비롯되었다. ●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강한 에너지가 폭발하고, 엄청난 힘이 분출하며, 파괴와 폭력의 기운이 교차하는 이 심상치 않은 장면을 그리기 위해 정해민은 붓과 물감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했고, 포토샵을 이용한 그리기 과정에는 레디메이드 이미지의 차용은 물론 붓질의 느낌을 살린 회화적 터치가 함께 사용되었다. 그리고 수평으로 오랫동안 연이어 그린 긴 파노라마 장면을 캔버스 천 위에 출력해 놓았다. 그 출력물이 부분적으로 매우 회화적이라 이것이 컴퓨터 출력물이라는 사실에 일견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묵시록적인 장면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아이들의 청군 백군 게임이 어느덧 실전을 방불케 하는 혈투로 돌변하고, 보이스카우트의 체력 단련이 치명적인 부상과 상처를 수반하며, 불꽃 튀는 미술대학의 입시 경쟁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장까지 연장된다. 대낮 광화문 광장에서는 약육강식의 야생 드라마가 매일처럼 자행되며, 길거리의 흔한 편의점에서는 스크럼을 짠 시민들이 공권력과 대치하고 있다. 맥도널드 매장에 제복 차림의 북한군과 부채춤을 추는 무용수들이 병존하고, 일상의 때를 씻는 공중목욕탕에서는 서민들의 애환과 함께 서슬 퍼런 물고문의 기억이 환기된다. 한가로운 수영장에 돌연 소용돌이가 일어 대형 여객선이 침몰하고, 흥미로운 볼거리처럼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된 무대 위에서는 생체를 난도질하는 수술이 집도되고 있다. 평상시처럼 다세대 주택의 계단참을 돌면 돌연사 현장을 검시 중인 경찰과 과학수사대의 요원들을 볼 수 있고, 인간의 구원과 대속을 이야기하는 피에타 상의 성모 마리아가 사격 중인 미군 병사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정해민은 20대 초에 신비체험을 경험하고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새로운 천년,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와 회한이 한참 회자되던 2003년의 일인데, 정해민은 이런 자전적 경험과 미술학도로서의 고민을 묵시록적인 그림을 그리고 재생산하는 일에 오버랩시킨 것으로 보인다. 천년을 주기로 회자되는 기독교의 종말론은 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을 배경으로 하는데, 지난 세기 말에는 인간 세상의 종말보다 예술의 종말, 특히 회화의 종말이 매우 절박하게 천명된 것으로 보인다. ● 20세기 말 회화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예술은 비장한 종말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서력기원 후 첫 천년을 지나면서 종말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또 다음 천년을 살았듯이, 회화의 종말이 선언된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미술인들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처럼 계속되는 이 세상에서 끝도 없이 '포스트-' 시대의 이미지를 양산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첫 밀레니엄에 인류를 두려움에 떨게 한 기독교의 종말론과 두 번째 밀레니엄에 예술인들을 무기력한 '포스트-'의 시대로 밀어 넣은 회화의 종말론이 정해민의 컴퓨터에서 조우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컴퓨터는 두 종말론이 만나 묵시록적인 장면으로 재생산되는 터미널인 셈이다.
그러나 정해민이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종말의 이미지는, 처음 천년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속된 인간의 삶이 허망하듯이 두 번째 천년 뒤에도 아무 일 없듯 지속되는 회화를 더 이상 진실되거나 유의미한 예술의 경로로 대할 수 없는 무력한 패배주의를 동반하고 있다. '분명한 무엇'으로 체험된 그의 신비체험은 종교의 거대서사에서 분리되어 동시대의 오락이나 게임, 이단적 대중문화의 이미지와 불온하게 결합하고, 오랫동안 미술의 제왕이었던 회화의 기법은 디지털 페인팅, 콜라주, 몽타주, 다중의 복제술과 자유롭게 혼성을 이룬다. '종말론'이나 '묵시록'이란 말에서 불가피하게 유일신 종교의 체취가 환기되지만, 게임이나 영화 등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에 익숙한 21세기 사람들의 눈에 정해민의 대형 디지털 회화는 종교와 오락, 예술과 게임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호한 혼성의 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 회화의 종말은 선언되었지만 종말 이후에도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회화는 이렇게 밖에 존재할 수 없는지 모르겠다. 종교와 예술은 지나간 시대의 향수가 되었으며, 컴퓨터로 그린 이미지(CGI)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가 보편화되고, 짤방과 움짤로 외계인의 음모론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정해민의 디지털 회화는 각종 이종 이미지와 결합하여 혼성의 생명체로 증식한다. '다가올 끝'을 '무한히 큰 것'으로 그리고 싶다는 정해민의 디지털 회화는 회화를 닮았지만 '유사 회화'에 해당하며,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피억압인들의 염원이 종말을 통한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열망으로 흘러간 것을 생각하면, 파괴와 폭력, 환란, 파국의 장면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정해민이 자신의 회화를 '유사 사회참여'라고 부르는 점에 동의할 수 있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끝날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파국과 구원이라는 극적인 종결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갈망하는 종말론의 어법이 "결국 변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종말을 향한다"는 정해민의 현세진단에 대한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혹은 회화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에 회화의 틀을 환기하는 회화 흉내내기에 매진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현재의 회화 진단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그의 그림에서 종말론과 묵시록의 장면이 연상되는 이유는 공중에서 비스듬히 지상을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천상에서 땅 위를 내려다보는 관점 혹은 공중에서 사방을 두루 조망하는 넓은 파노라마 뷰가 그의 화면을 지배하는데, 여기에는 하늘의 천사 혹은 강림하는 구세주의 전지적 시점이나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나 천상으로 날아오르기를 원하는 자들의 염원이 드리워져 있다. 기독교의 종말은 흔히 예수가 재림하여 공중에 임할 때,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려진다는 일명 '휴거(携擧, rapture)'로 설명되는데, 지상의 해묵은 중력에서 벗어나 불현 듯 승천하는 해방감은 육중한 군상들마저 가볍게 느껴지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나 천상의 그리스도 옆에 평화롭게 도열한 프라 안젤리코의 구원받은 자들, 혹은 심판의 날 분노의 칼을 휘두르는 미카엘 대천사의 발밑에서 어두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얀 반 에이크의 인간 군상들에서 이미 실감나게 재현된 바 있다. 정해민은 드넓은 공간감과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현세에 대한 묵시록적인 진단과 종말 이후 도래할 회화의 내세를 가늠해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한편으로 매우 도발적이고 유희적이기도 한데, 묵시록적인 비전이 진지한 만큼 그와 유사하게 컴퓨터 게임 상에서 가상의 영토를 활공하는 게임 캐릭터의 시선이나 현실의 육신을 극복한 아바타적 존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의 묵시록적인 비전은 컴퓨터 게임처럼 화려하고 버추얼한 그래픽 이미지처럼 박진감 넘친다. ● 총 30미터가 넘는 이번 출품작의 좌측에는 붉은 색의 덩어리가 보이는데, 이는 정해민이 오랫동안 연이어 그리던 이 장폭의 디지털 회화를 저장하는데 잠시 소홀하여 생긴 사고의 흔적이다. 장시간 공들여 그린 화면이 붉은색의 덩어리로 먹통이 되어버린 참사를 작가는 그대로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는 "과학적으로는 우연의 개입이라면, 종교적으로는 신의 간섭"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을 동반하고 있다. 예술의 고유성을 보증하던 회화의 유일성은 복제와 수정이 자유로운 디지털 기법에서 치명적으로 훼손된 것으로 보이지만, 디지털 회화 안에도 여전히 불가피한 힘은 작용하고 있다.
화면 곳곳에서 구상적 형태의 일부분에서 시작하여 해당 부분의 색상을 길게 늘이는 기법을 볼 수 있다. 묵시록적인 장면을 깨는 회화의 고민이 재앙처럼 화면에 출몰하며, 회화에 대한 회화 혹은 재현의 의미를 묻는 추상의 기억을 일깨운다. 포토샵의 스트로크 기법으로 길게 늘인 색상의 띠는 시작점이었던 구상적 형태에서 벗어나 화폭 위의 색상이라는 즉물적인 실체를 드러낸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고, 사진과 회화를 오가며, 그린 것을 지워내고 다시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던 20세기말 포스트모던 추상 회화의 디지털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분야의 대표 작가였던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 역시 최근 디지털 편집기법으로 '스트립 페인팅(strip painting)' 연작을 선보이고 있으니, 이는 회화에 대한 추억, 종말 이후의 회화, 디지털 편집술 이후의 회화가 도달할 수 있는 공통적인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 정해민은 '회화' 앞에 괄호를 두어 '( ) 회화'로 자신의 '그리기'를 설명하는데, 회화 앞에 괄호가 붙어 그 안에 어떤 말이 들어가더라도 '회화'보다 괄호가 부각되기에 괄호 밖의 회화는 허상처럼 느껴진다고 설명한다. 회화 뿐 아니라 종교와 예술의 거대 서사가 무너진 세계에서 한때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틀의 의미를 포획하는 것, 또는 컴퓨터 게임처럼 리얼하지만 그만큼 버추얼하기도 한 종말과 구원의 비전에 매진하는 정해민의 제스처를 '포스트-회화'라로 부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포스트 미디엄', '포스트 프로덕션', '포스트 인터넷', '포스트 디지털', 하다못해 '포스트 컨템퍼러리'까지 등장한 이른바 끝도 없는 '포스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 작가의 생존법이자 회화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 권영진
Vol.20170817c | 정해민展 / JEONGHAEMIN / 鄭海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