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속에서 컴포지션을 하다

위영일展 / WEEYOUNGIL / 魏榮一 / painting   2017_0731 ▶ 2017_0806

위영일_냉무5_2017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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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영일 홈페이지_wee012.wixsite.com/weeyoungil  블로그_blog.naver.com/wee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서울문화재단_문래예술공장

관람시간 / 01:00pm~06:00pm

스페이스 XX SPACE XX 서울 영등포구 도림로128가길 1 B1 www.facebook.com/spacexx

요즘 나의 관심사는 회화에 대한 것이다. 단순히 물감과 붓으로 프레임 속에 재현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회화에 대한 총체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2009년에 계획하고 2013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알레아토릭 페인팅시리즈는 미술사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매뉴얼(가로, 세로 각각6단계)에 주사위를 6번 연속적으로 던져서 나온 경우의 수열을 해석하여 회화로 옮기는 작업이 있다. 이것을 통해 기존의 질서를 와해시키고 나만의 방식으로 현재의 관점으로 회화를 재해석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2016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작업은 2D와 3D의 경계를 오가는 것들로 리얼레이어,냉무,샌드위치,월페인팅시리즈들이 있다. 이것은 회화와 조각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요소들을 매시업(Mashup)하여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이다.

위영일_공간속에서 컴포지션을 하다展_스페이스 XX_2017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도 회화에 대한 질문으로 구성된 전시이다. 전시는 페인팅과 오브젝트로 구성되어져 있다. 페인팅은 타블로와 월 페인팅이 있다. 먼저 New point는 정면에서 보면 살롱식으로 디피 된 여러 개의 캔버스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색면만 존재한다. 그러나 정면에서 좌,우로 조금만 이동하여 여러 개의 프레임의 측면으로 다가가면 고요한 평면성은 사라지고 다양한 면적과 크기의 색면들로 이루어진 실재의 다층적 공간이 생성됨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홀바인의 대사들에서 보여지는 22.7도의 아나모르포시스(Anamorphosis)가 추상적인 구조로 현대화 된 것이다. 즉 정면에서 환영적 공간을 연상하려는 인습적 태도를 조금만 바꾸어 본다면 회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기게 될 것이다.

위영일_냉무4_벽면에 아크릴채색, 수성페인트, 스프레이, 시트지, 스프링클러, 아크릴수조, 펌프, 삼각대_가변크기_2017

월 페인팅은 냉무 시리즈와 리얼레이어 시리즈가 전시되고 있다. 먼저 냉무4는 ㄱ자로 꺾인 코너벽면과 바닥에 마구 뿌려진 듯한 물감의 흔적과 스프레이 자국은 작가와 잔디용 스프링클러가 교차적으로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스프링클러가 먼저 벽면에 좌,우로 반복하며 물을 뿌려서 벽면을 적신 후 작가가 재빠르게 그 상황에 반응하여 아크릴과 수성페인트로 다양한 스트로크를 만든다. 잠시 후 스프링클러가 재가동되어 작가의 흔적들을 상쇄시켜버린다. 벽면이 완전히 건조된 후 다시 작가는 스프레이와 시트지를 사용하여 공간속에 컴포지션을 하게 된다. 이는 탈회화적 제스쳐를 기계와 함께 수행한 것인데, 여기에 사용된 스프링클러, 시트지와 스프레이는 회화의 위대한 붓질의 신화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과 작품제작에 진중성을 무심함과 유희성으로 극대화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냉무'란 제목은 2000년대 초반 게시물의 제목만 있고 내용이 자체가 없음을 말하는 인터넷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동시대적 현안으로부터 벗어나 또다시 예술의 새로운 자율성을 추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추상적 강령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위영일_냉무5_2017_부분

벽면에 요란하게 비닐과 마스킹 테이프와 실, 물감 등으로 난잡하게 레이어를 구성하고 있는 월페인팅은, 리얼레이어4 이다. 이것의 표면을 보면 겹겹이 쌓인 비닐구조의 일부는 칠을 위한 마스킹 과정처럼 보이며 그 비닐속의 층층에는 회화적 제스쳐가 아크릴물감,스프레이,실,시트지 등으로 겹겹이 쌓여 저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물감으로 가짜의 공간을 연출하여 환영을 유도하려 했던 평면 속에 갇힌 과거의 추상구조들을 실제의 물질과 층위로 즉물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며, 내부에 발광하는 파란색 네온플렉스의 빛은 내부의 빛이라는 회화의 해묵은 문제를 직접적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 그리고 전시장 중앙바닥과 공간에 디피 된 일상 또는 가공된 사물들은 매우 현란한 색채와 요란한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특정한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유기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오직 컴포지션에만 집중한 결과물들이다. 물론 각각의 사물들에 대한 개별적인 내러티브는 존재하나, 작품 속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비워야 관람자가 자유롭게 볼 수 있고 미술사에서 존재했던 수많은 컴포지션이 텅 빈 기표임을 방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해석하려하는 것은 아주 낡은 미술의 작동방식이라고 본다. 따라서 사물에 대한 의미의 제거는 관람자에게 '자의적해석력'을 부여하고 미술의 새로운 자율성 획득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다. 한 동안 우리는 타자성과 동시대성에 관해 경주하듯 오브제를 생산해냈었음을 상기하면 지루한 반복에 염증을 느낄 만도 하다.

위영일_공간속에서 컴포지션을 하다展_스페이스 XX_2017

이번 전시에는 관람자의 반응적 태도에 대한 실험들이 있다. 먼저 전시장 중앙에 군데군데 놓인 화분들은 그려진 이미지보다 실재가, 그리고 실재 중 에서도 만들어진 조형물보다도 생물이 서열적으로 우월하게 관람자들에게 지각됨을 살펴볼 장치들이다. 즉 이미지는 실재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실험하기 위함이다. 또한 언 듯 잘 들어나지는 않지만 6각형 화분의 내부에는 문어의 사체가 들어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다른 실험은 관람자의 위치조정인데, 전시장 중앙 정면벽면에 청녹색의 원형이 시트지로 붙어있고 그 위에 레이저수평계의 붉은 선이 원과 벽면을 열십자형태로 가로지르고 있다. 그리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2개의 검은 선은 중앙벽 양쪽 아래부터 출발하여 사선으로 전시장 중앙의 두 개의 기둥상부에서 끝이 난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실재공간과 이미지가 중첩되어 흡사 방패연의 연살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것을 완결시키려면 관람자의 신체적 조건에 맞게 조정하여 볼 수밖에 없는 능동적 태도가 요구된다. 결국 스스로 눈높이와 중앙의 관점(정확한 정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성에 입각한 평행선이 화면 속에서 소실점이 된다는 가당치도 않는 논리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위영일_냉무5_2017

전시장 입구 근처에 샤워부스처럼 생긴 세로의 장방향 형광색 아크릴판이 서 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사물들이 동시에 비춰진다. 이때 추상적인 구조든 구체적인 사물이든, 구상적 이미지든 이것들이 이 스크린에서 보여 지게 되면 평면성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것은 표면(거의 완전평면)속에 갇힌 저 세계일뿐이니까, 이런 회화의 숙명적 한계는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에 미래적인 형태의 ㄱ자 아크릴 프레임을 사용하였고, 투명하고 평평한 면 뒤로 생생한 식물이 자라는 화분과 기둥에 부착된 시트지(무성한 나뭇잎실루엣 이미지), 그리고 추상적으로 커팅 된 형광아크릴 판과 허공에 매달린 추상적인 형태의 네온플렉스의 빛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모두가 평면화 된 것을 눈앞에서 현상적으로 볼 수 있다.

위영일_냉무5_2017_부분

마지막으로 냉무시리즈4 작업에 포함되어 있는 오브제집단 중 하나로 성인의 허리높이 쯤 되는 높이에 폭이 좁은 장방향의 하얀 테이블 위에는 재질과 크기, 모양, 색, 질감들이 다른 다양한 오브제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것은 일상적 오브제와 가공된 오브제들의 집합이다. 즉 정물화의 콤포지션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데 이 작품의 완성은 관람자의 몫이다. 관람자의 카메라의 거리에 따라 풍경과 정물사이를 오갈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인증샷이 동원된다면 인물화의 기준으로 적용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회화의 정통적 분류로 보면 인물,풍경,정물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 의해 정해지고 완결된 작품을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지를 선택하여 완결하고 소유(공유)하는 것이다. 과거에 정물화의 주문자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이미지를 소유했다면 현대인은 문화적 향유를 과시하기 위해 이미지를 공유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지는 제아무리 트롱프뢰유 달인이라도 현상적 실물은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다니엘 스포에리나, 누보레알리즘에서는 실제의 사물들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 허공에 매달린 리얼레이어5는 알루미늄 행거사이에 다양한 직물과 가죽,PVC,필름지,실이 면적을 달리하며 여러 층을 이루고 있다. 그 중에는 반투명한 재질의 면적은 공간의 환영마저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진짜 물질로서 보여 지므로 결코 환영은 아니다. 그리고 바람에 살랑되는 필름지나 얇은 천은 살아있는 레이어를 증명한다. 이것은 회화의 환영성과 단면성을 거부하는 태도이다.

위영일_공간속에서 컴포지션을 하다展_스페이스 XX_2017

또한 작품'유령의 춤(dance of ghost)은 전.좌우,상하로 다양한 도형이 뒤섞인 변형프레임에 텍스추어가 느껴지는 검은 인조천을 일부는 프레임이 들어나게 긴장감 있게 또는 외곽을 알 수 없게 느슨하게 씌우고, 그 위에 노란색과 핫 핑크색의 가는 실들이 사선으로 교차하며 구획을 나누는 동시에 표면으로부터 도드라진 부조적 프레임의 얕은 공간을 부각시키며 공중에 매달려 있다. 이것은 피카비아의 성자 기의 춤(dance of saint guy)을 오마쥬 한 것인데, 이 작품의 전체를 감상하려면 제한된 일정거리와 위치에서 입김을 2~3번 세게 불어서 돌려봐야만 한다. 마네가 전통적인 회화의 단면성을 폴리베르제르의 바에서 배면을 의식하고, 입체파에 의해 큐빅과 투명성으로 저세계를 지시하려고 했지만 이 또한 작품을 정면에서만 관찰될 수밖에는 한계를 피카비아가 허공에 내건 프레임으로 비로소 양면을 보게 만들었다. ● 그리고 쉬포르 쉬르파스계열의 드죄즈 또한 공간속에 프레임의 양면을 제시하였지만 이것마저도 좀 더 회화의 모든 면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공간속에서 서서히 도는 이 작품은 모빌의 양상을 띠지만 분명 캔버스의 앞뒷면이 존재하므로 회화의 영역에서 해석 될 수도 있고, 공간속에 물질로 존재하므로 조각의 영역에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공간 속에 알 수 없는 유령처럼 시공을 달리하며 자신의 면면(정면,후면,측면,측사면 등)을 보여주며 기존의 '분별적 인식'을 홀리고 있는 이 오브젝트를 보다 유연한 유보적 입장에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그리고 조각은 모빌 외에 관람자의 동선 상에서 작품의 전체가 파악되지만 이 작업은 관찰자의 위치가 고정 된 상태에서 스스로 도는 작품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이는 회화작품 관람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작품을 감상하려면 이제는 능동성이 요구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결국 침묵하는 작품에 끼워 팔기로 월텍스트와 도슨트가 등장하였지 않았는가? 관람자는 항상 그 시대의 작품을 독해하는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위영일_Newpoint_패널에 아크릴채색, 수성페인트, 스프레이, 아크릴판, 나무_가변크기_2017

이와 같이 여러 예를 들어 이 전시를 통해 내가 말하고 자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태도를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현대의 이미지의 수용방식에서 과거와 달리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기록매체에 의존되고, 말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전파된다고 본다. 그리고 현대인은 간단한 내용을 선호하고 자극적인 시각성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복잡,현란한 사물들이 즐비한 전시는 구성된 내용보다는 관람자의 이미지를 수용하는 태도에 방점을 둔다. 즉 관람자는 전시장의 구성되어진 사물들을 취사선택하여 카메라로 촬영하거나 저장하여 이를 여러 매체(SNS,블로그,인스타그램등)로 공유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둔다. 왜냐하면 이미지의 소유방식이 과거와 엄연히 다른 시대이기 때문이다. ■ 위영일

Vol.20170731a | 위영일展 / WEEYOUNGIL / 魏榮一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