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Phrase : Remember me

박창서展 / PARKCHANGSEO / 朴昶緖 / installation   2017_0720 ▶ 2017_0828

박창서_Para-phrase : Remember me_스폰지, 구리스, 합판, 아크릴채색_ 스폰지 10×110×180cm, 합판 60×100×170cm_2017

초대일시 / 2017_0720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신라 GALLERY SHILLA 대구시 중구 대봉로 200-29 Tel. +82.(0)53.422.1628 www.galleryshilla.com

스며듦, 퍼짐: 장소의 확장으로서의 소통 『Para-phrase: Remember me』"스며듦"으로 전달되는 메시지 점액질 윤활유로 쓰여진 영문 글귀가 성인 크기의 직사각형 플랫폼 위에 눕혀진 라텍스에 스며든다. 작가가 "무덤" 또는 "침대"에 비유하는 이 라텍스에 물질의 누런 색채가 서서히 그 바탕을 물들인다. 시인 강은교 씨가 「숲」에서 잘 나타냈 듯, 한 나무의 가지와 잎파리들의 흔들림이 다른 나무들과 수많은 접촉을 일으키며 숲 전체가 지구의 움직임에 동화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한 동화작용은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동화작용으로 이어지며 끝없이 수많은 형태로 이동, 교체, 전이된다. 마찬가지로, 돌을 던진 호수의 파장, 공기 중에 퍼지는 향기, 컵에 담기는 물, 한 인간의 존재감과 영향력, 발상의 확산 등 사물과 사물,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프로세스라 할 수 있겠다. ● 박창서 작가는 동화를 은유적으로 '소통'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작가는 스승인 고(故) 정점식 화백의 글을 인용하며 이 소통에 대해 말한다. 이 짧은 글귀는 필자가 영어로 번역해, 번역된 글을 캔버스로 위장한 스폰지 위에 쓴 것이다. 이 글은 "작품과의 접촉에서 경험되는 재창조"는 작가의 소통에 대한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소통이라는 이상이 전제하는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 조건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조건들로 인해 예술이 소통해야하는 의무를 짊어 짐은 자명한 일이다. 박창서 작가는 이번 전시 『Para-phrase: Remember me』에서 소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며, 자신은 무엇을 소통하려 하는가? ● 하나하나 짚어보도록 하자. 박창서 작가는 진실의 사회, 정치적 소통의 문제에 매우 민감하다. '내 안'에서 '타인'의 안으로 향하는 소통의 문제는 곧 역사, 사회, 정치와 불가분 관계에 있으며, 내 안으로부터 소통하고자 하는 바의 일의성은 다원적 해석의 관계적 네트워크로 편입되며, 그 겉모습을 바꿔가며 인간의 의도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흔적(글, 작품도 이에 포함된다)을 남긴다.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진동하며 이 진동을 다른 나무들에게 옮기는 것과 같다. 이 일의성은 다른 장소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

박창서_Para-phrase : Remember me_드로잉(종이에 혼합재료)_45×31cm_2017
박창서_Para-phrase : Remember me_아크릴채색_7×124cm_2017
박창서_Still Alive_니켈_각 10×50cm_2017

내가 있는 이 곳, 그리고 소통의 대상이 있는 그 곳은 여러가지 매체를 통해 연결되지만, 진정한 소통은 주체-대상의 이분법적 관념이 깨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작품의 의도는 그 장소를 벗어나야 하지만 작품은 물리적, 상황적 장소성을 내재하고 있기에, 그 의도를 다른 시공간으로 전달해야만 한다. 즉, 소통을 해야만 한다. 소통은 불가피한 것이며, 의무이자 영원한 작가의 과제이다. 박창서 작가가 정 화백의 말을 빌어 말하고자 하는 이 소통은 일방적이지 않다. 두 사람 또는 개체 간의 소통은 작가와 관객,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가 연결되는 즉시 다른 모든 이들과의 연결을 가정 또는 지향하게 된다. 예술작품을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은 그러므로 그 형태가 간접적일지라도 모든 관객들과의 연결을 가정, 지향하고, 작가의 의도의 역사적, 문맥적 이해의 공유 또는 합치를 요한다. 완전한 이해와 합치는 현실보다는 이상에 가깝지만, 드러나는 표상, 이미지, 작품을 통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 예술과 인간에게 있어 소통은 그물망처럼 드넓게 퍼져있는 사회, 정치, 철학적 네트워크에 '스며듦' 일 것이다. 그러나 이 공식에 박창서 작가는 일종의 경고와 같은 권고를 제안한다. 작가는 소실과 회귀가 반복되는 네트워크 너머의 무언가를 의식하는 듯하다. 얼핏 보면 소통은 사회, 정치, 철학적인 동물인 우리가 "살아가면서" 해야하는 일이지만, 작가는 지금 '예술'에 대해 말하려 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즉, 그는 생물학적, 물리적 죽음을 넘어서는 이상에 관심을 갖는다. 이 스며듦의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다름 아닌 모든 소통의 연결고리들의 종점인 죽음의 장소이다. 작가가 무덤을 연상시키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

박창서_Para-Phrase : Remember me展_갤러리 신라_2017
박창서_Para-Phrase : Remember me展_갤러리 신라_2017
박창서_Para-phrase : Remember me_2017_부분

"나"의 장소성의 초월: 소멸보다 사라짐 ● 고인 물은 반드시 썩듯이, 작품에 깃든 의도, 작가의 메시지, 그리고 작가라는 "나"의 존재는 끝없이 사유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경험해야만 창조, 재창조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작품을 보는 이들(작가도 여기에 포함된다)의 사유는 작품이 한 장소에서 발산하는 특정성과 그것이 암시하는 의미의 객관성 사이에서 진동한다. 즉, 지금 이 장소, 이 순간에 내가 경험하는 작품은 그 일의성을 타협하지 않고 다른 이와 공유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사유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동하고 변화해야 하기 때문에 특정한 시공간적 환경에 가두어 둘 수 없다. 만약 어떠한 사유의 움직임을 인위적으로 멈추어 그것을 한 장소에 묶어 두어, 그것은 곧 죽은 것, 고인 물과 다름없다. 이는 즉 작품은 사유로 하여금 원하는 방향을 지향할 수 있도록 권고, 유도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더 나아가, 작품은 그것이 처한 환경의 특정성을 벗어나 사유되어야 한다. ●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이전에 언급한 정리되고 체계화된 네트워크에 편입시킨다는 말과는 정반대되는 말이다. 이 네트워크야 말로 끊임없이 변화, 이동하는 사유를 묶어두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장소와 작품 간의 물리적, 개념적 불가분 관계를 벗어나기 위한 예술가들의 노력은 그 역사가 꽤나 길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여러 갈래로 분산, 이동, 전이, 교체되는 개념들과 작품의 장소특정성 간의 대립이다. (작가는 이를 자신의 박사논문 초반부터 세세히 다룬다.) 만약 작품이, 그리고 이에 대한 사유가 장소특정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어느 방향으로 집중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작가는 "묶어둠"과 겉으로 드러내려고만 하는 표면적 소통에 종말을 고하고, "나"로 하여금 장소특정적 환경에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기서 죽음이란 "나"라는 존재가 유일하게 특정하게 될 수 있는 장소는 자신의 무덤이며, 모든 이동, 전이, 교체 운동이 끝나고 자신이 "사라지는" 그곳이 곧 소통의 궁극지점이 아닐까? 그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닌, 소통의 씨를 작품으로 남겨두면서 말이다. 결국 『Para-phrase: Remember me』는, paraphrase, 즉 다른 형태로 교체, 전이되어 이동하는 어의가 para-phrase, 즉 그 어의가 갖는 절대적 일의성과 불가피한 객관화가 야기하는 네트워크로의 불가피한 편입을 초월(para-)하려는 소통의 노력으로 읽혀야 하지 않을까?

박창서_예술과 인간(故 정점식)_종이에 텍스트 프린트_29.7×21cm_2017
박창서_Para-Phrase : Remember me展_갤러리 신라_2017

박창서 작가는 자신이 피력하고자 하는 어의는 항상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언급했다시피 모든 어의는 그 나름대로의 경제체계를 갖고 있다. 이 체계 내에서 이동하는 동안 작가의 어의, 더 넓은 의미에서 역사적 진실은, 소실로 이어질 수도, 회귀운동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그 생성부터 어의와 진실은 양의적인 것이다. 박창서 작가는 이에 어떻게 답변하는가? 그의 작품 「Remember Me」는 제목만 보면 기억의 소실을 두려워하는 개념작가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지만, 그 작품은 오히려 그리스로 쓰여진 소통과 재창조에 관한 글귀가 과거로부터 기억되고 회귀하며 현재화되는 과정, 즉 점점 특정한 장소에 흡수되는 과정, 즉 어의의 확산, 침투를 강조한다. ● 그렇다면 어의는, 그것을 지탱하는 물질,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나"와 같이 언젠가는 소멸하는가? 작가에게 있어 "소실"은 "죽음"과 개념적, 이미지적으로 같아 보이지만 그 의미는 아예 정반대다. 우리가 기억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는 한 기억은 끊임없이 소실과 회귀를 반복한다. 소실되기 때문에 회귀하여 현재화되고, 회귀를 전제로 소실된다. 이를 인정하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죽음은 자의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와 역사상에 공존하는 자신의 어의를 "운명처럼", 죽음을 향해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를 작품을 통하여 소통하려는 것이다. 「Remember me」는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우리의 사유가, 잊혀짐, 망각 또는 소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재창조의 조건, 그리고 더 나아가 기억의 소실과 회귀의 역사로서의 미술사를 다시 사유하게 한다. ■ 손지민

Vol.20170720g | 박창서展 / PARKCHANGSEO / 朴昶緖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