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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715_토요일_06:00pm
주관 / 갤러리노마드_컬처큐브문화공동체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전라남도문화관광재단_여수신문_동부매일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노마드 GALLERY NOMAD 전남 여수시 새터로 82 (신기동) Tel. +82.(0)61.921.7777 www.gallery-nomad.com
김형규 작가는 주로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내러티브, 관계, 형식에 집중하는 비디오를 만들고 있다. 그는 시간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갖는 시선, 위치, 함의 등을 고민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최근에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이용하여 360도로 촬영, 평면화하는 비디오 작업을 연구하고 있다. 이번 개인전 『사회적 기둥들 Pillars of A Society』에서는 2016년부터 2017년까지의 제작된 비디오 작업 4편과 아카이브 자료, 영상기록물이 함께 구성되어 작품 제작과정도 엿볼 수 있다. ● 「바람을 듣다_세계의 저편 Listen to wind_Beyond the world」(2016)은 태풍전망대에서 DMZ의 하루를 촬영한 360도 타임랩스 비디오이다. 카메라가 놓인 장소는 휴전선(800m 거리)과 북한지역(1600m 거리)이 보이며, 후방으로 남한지역과 남한의 군사시설이 위치한 곳이다. 체제와 이념 그리고 긴장의 경계가 공존하는 이 곳의 풍경은 시간성이 지워진 광경으로 다가온다. 동서남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임의적 구분이 사라진 모습은 우리에게 분단과 평화의 경계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진심의 대화 A Sincere Conversation」(2017)는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랩-음악(Rap Music)과 비디오로 풀어낸 작업이다. 힙합 뮤지션 쿤타(Koonta), 반블랭크(Van Blank), 아이삭스쿼브(Issac Squab), 아날로그소년이 음악작업에 참여했으며, 롱-테이크(Long-take)기법으로 비디오의 형식적 실험을 진행했다. 특히 비디오는 랩-음악의 대화 과정을 중간에 편집으로 끊지 않고 한 번에 보여주며, 하나의 공간에서 여러 사람들이 주고 받는 온전한 대화를 담아냈다. 김기라 작가와 공동 작업한 「불확실한 대답 An Uncertain Answer」(2017)은 4채널 필름 몽타주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작품은 이념과 역사의 문제를 개인의 삶을 연결하여 상호적 관계를 모색한다. 또한 각기 다른 행위들이 서로 공존하거나 흩어져 있지만 결국에는 사회 문화적 위치를 갖게 되고, 이후에 신화화, 종교화 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이 같은 이미지의 단상은 사회 시스템과 규율 그리고 정치와 장치들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발견하게 해 준다. ● 각각의 작업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인 이념, 개인, 집단, 계층 등이 어떻게 균열되고 비틀어지고 재편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작가는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기둥들』을 비디오 작업으로 풀어내면서, 관객들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에 대해 재고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
「바람을 듣다_경계의 저편 Hear the Wind_Across the Border」(2017)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네 개의 장소를 360도 촬영기법으로 제작한 연작이다. 영상의 촬영지는 각각 임진각 전망대 · 강화도 연미정 · 용산 재개발 예정지구 · 광화문 이순신 동상이다. 카메라가 고정된 존재 위치, 즉 카메라가 촬영하는 로커스가 위에서 말한 네 개의 장소이다. 카메라는 360도로 회전하며 사방의 주위를 촬영한다. 로커스에서 24시간 안에 발생된 거의 모든 사건이 카메라에 포섭된다. ● 위 네 가지 영상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임진각이 있는 임진강 주위는 삼국시대까지 역사적 지층이 거슬러올라간다. 강화도 연미정 역시 고려시대 몽고인들의 침입 역사까지 사건이 거슬러올라간다. 용산이라는 특별한 지역 역시 조선의 500년 역사를 함께 끌어온 중요한 현장이다. 광화문 역시 조선의 500년 역사를 함께 했던 중심적 자리이다. 이 네 개의 장소는 우리 현대사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임진각과 연미정이라는 이름에 우리는 분단과 관련된 고통의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그러나 분단의 원인에 대하여 우리는 여전히 명료하게 생각해낼 수 없다.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모두 서구의 사상이다. 우리가 오천 년 동안 지켜왔던 애민의 정신, 인의예지, 혹은 중용의 정신은 분단의 과정에서 모두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분리시켰다. 분리된 개체 속에서 자기 의식은 고립화될 수밖에 없다. 임진각과 연미정이라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은 가장 끔찍한 인위적 분리와 맞닿아 있다. 첫 번째 인위적 분리이다. 민족과 민족 사이의 분리가 그것이다. ● 용산 재개발 예정지구는 지난 정부의 참사와 관련이 있다. 용산 재개발 지구는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발 이익을 놓고 벌이는 다이나믹한 열기를 떠올리게 한다. 용산은 서울의 정 중앙을 차지했지만 상대적으로 개발이 지연되었는데, 그것은 미군기지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미군이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이 지구는 개발 제한이 사라지고 각광받는 투자처로 떠올랐는데, 기존에 상주했던 빈약했던 계층들은 마땅한 보상 없이 쫓겨야만 했다. 이는 우리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이전하면서 다시 산업화 사회에서 금융자본주의 사회로 이전하면서 겪었던 계층간 분리라는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한다. 두 번째 인위적 분리이다. 자본이라는 명분 아래서의 계층간의 분리이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자리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초점이다. 언론사들이 집중적으로 모여있고 정부의 각종 공기관들과 공기업들이 위치한 자리이다. 우리나라 현대사 엘리트들의 성좌들이 모인 자리이다.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정치 · 경제 · 안보 · 문화의 정책 맥락이 빚어진다. 1968년 조각가 김세중이 제작했다는 이순신 동상은 우리나라의 현대사만큼이나 문제점을 많이 지녔다고 한다. 손의 위치 · 칼의 용도 오류부터 구조적 붕괴 우려마저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엘리트들이 만든 이념과 패러다임의 졸속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이순신 동상은 드디어 국민들을 염원을 자기 아래로 모았다. 그 염원은 엘리트들의 이익으로부터 소외된 다수 국민들의 분노의 변주이다. 우리는 분노를 평화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모든 차원의 문화를 동원했다. 이순신 동상은 세 번째 인위적 분리의 트라우마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정치라는 명분 아래서의 계층간의 분리이다. ● 세 가지 인위적 분리라는 비극적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네 가지 영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복잡한 해석 과정이 남게 된다. 김형규 작가는 카메라의 촬영기법, 그것도 360도 회전 촬영기법을 사용한 것에 대한 해명을 하고자 한다. 인류는 최초에 그림을 그렸다. 그 전에 우리는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하나였다. 그림 그리기는 인지와 인식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 인간의 역사는 자연과 하나로 일치되어 있었다. 태초에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였다. 이를 성경에서 말하는 파라다이스이다. 이를 자연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영어로 in-sist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파라다이스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고 이미지를 인식하고부터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림과 이미지가 자연 자체의 특성을 이해시켰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고 탈존(脫存)하게 된다. 이를 영어로 ex-sist라고 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한다. 그러나 그림과 이미지는 우리를 마법의 세계로 빠뜨렸다. 때때로 그림과 이미지를 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이 마법을 비판하기 위해서 우리는 문자를 개발했다. 문자의 본질은 이미지의 비판에 그 기원이 있다. 문자는 이성을 촉진시켰다. 문자, 즉 숫자와 알파벳은 이성적 사유를 촉발시켰고 자연을 방정식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이 방정식은 과학의 원천이며 기술의 모체이다. 그런데 이 과학기술은 디지털 세계와 가상세계를 만들었다. 0과 1이라는 이진법은 컴퓨터를 만들었고 디지털 가상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문자가 도리어 더욱 정교한 이미지를 만들어 또 다시 인간을 마법의 세계로 빠뜨린 것이다.
우리가 문화와 역사라는 본질을 잊고 그것이 문화적 현상인지 자연적 현상인지 혼동해버리는 이유는 구석기인보다도 훨씬 마법화된 디지털 가상에서 살기 때문이다. 작가 김형규는 이러한 인간의 역사와 한반도인의 역사,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문제와 더불어 자연과 문화의 본질적 의미를 360도 기법으로 담고자 한 것이다. ● 그림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을 때 인간의 패러다임을 지배하는 계층은 주술사였다. 주술사 중에 문자를 사용하는 주술사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을 성직자라 한다. 문자가 지배적인 역할을 했을 때는 경전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성직자가 인간의 패러다임을 지배했다. 성서의 세계로부터 과학이 분리되어 떨어져 나왔을 때 다시 과학자가 인간의 패러다임을 지배했다. 과학자로부터 컴퓨터 기술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그룹이 떨어져 나왔다. 이들을 프로그래머라고 한다. 현대의 패러다임은 프로그래머의 패러다임이다. 프로그래머의 본질은 게임이다. 정치 · 경제 · 외교 · 문화가 게임의 흥분 파고처럼 예측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에 프로그래머에서 또 다시 떨어져 나갈 그룹은 무엇일까? 바로 로봇이다. 로봇의 패러다임이 세계를 지배하면 인간은 로봇을 고치고 그들에게 먹이나 에너지를 주기 위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일 것이다. ● 이러한 역사를 막기 위한 길은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인간이 오로지 시적인, 즉 포에틱한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존재의 참된 진실을 찾을 수 있을 때 기술 일변도로 흘러 드라이해지는 사회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역사의 현장에서 펼쳐지는 사건들과 자연들의 흐름 속에서도 발견될 포에틱한 세계가 막대하게 펼쳐져 있다. 분리된 우리의 현실, 그것은 암울하고 어둡다. 그러나 어두운 지하의 암실을 밝혀줄 것은 오로지 시적 성찰이라는 빛밖에 없다. ● 작가 김형규는 분단의 분리 트라우마 · 자본의 분리 트라우마 · 정치의 분리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길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에 있지도 않으며, 상처를 헝겊으로 덮는 은폐에 있지도 않다고 한다. 오로지 만인에게 덤덤히 보여줌으로써 예지를 쌓아갈 때 시적 성찰은 성숙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시적 성찰은 번개처럼 꽂히는 금강경의 지혜가 아니며, 서서히 익어 사방으로 퍼지는 와인의 향기와 비슷하다. ● 예술은 미적 대상이라기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반의 존재와 존재양상의 진리를 드러나게 해주는 거울이자 빛이다. 따라서 김형규 작가는 아름다운 풍경과 정치적 · 경제적 풍경이 단순한 감상 대상이 아님을 말한다. 그것은 시적 성찰의 숙성으로 가는 수단의 길임을 보여주려 한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목적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일임을 보여주려 한다. 더 나은 인간은 자기와 사회 · 과거의 역사 ·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고 모두를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내리려는 예지의 인간이다. 기술 · 자본 · 예술 · 정치마저 깨달은 공적인 인간이다. ■ 이진명
Vol.20170715b | 김형규展 / KIMHYUNGKYU / 金亨奎 / media.vid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