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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713_목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17_0726_수요일_07: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불투명한 빛 ●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혜림의 화면에는 불길 같은 것이 자주 등장한다. 발광하는 듯한 빛깔의 물감 자국이, 구체적인 형상을 이루지 않으면서 배경의 일부로 용해되지도 않고, 상대적으로 분명한 윤곽을 가진 대상들과 그것들이 놓인 공간 사이에 찢어진 구멍 같은 것을 만든다. 그의 그림이 어떤 합리적인 세계의 재현은 아니므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단언하기는 불가능하다. 그것이 불인지 물인지, 뜨거운지 차가운지는, 화면 안에 손을 넣어볼 수 없는 한 전부 상상일 뿐이다. 그러나 촉각적인 감각은, 설령 화면 안에 손을 넣어볼 수 있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것은 너무 뜨겁든가 너무 차가워서 손에 화상을 입힐 것 같다. 그것은 빛나지만 불투명하고, 형태가 없지만 날카롭다. 그것은 자신의 권역에 들어온 무엇이든 태우거나, 씻어내거나, 녹여버릴 수 있을 것 같고, 실제로 그럴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화가의 붓질의 흔적으로서 화면 위에서 거의 전능한 위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 마치 불길처럼, 화가의 붓질은 자신이 성립시킨 장면의 일부를 지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며 화면을 채우고 있는데도 전혜림의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 불길 같은 부분이다. 2014년부터 연속성을 가지고 축적된 그의 작업들, 회화와 드로잉을 오가면서 진행된 「나르카디아」와 「밤」, 그리고 새로 시작된 「낙원의 재건」 연작들을 빨리감기 하듯이 보고 있으면, 이 불길 같은 것이 꿈틀거리며 계속 변신해가는 일종의 애니메이션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것은 작가가 명시적으로 밝힌 연작들의 서사적 시간과 병행하는 어떤 회화적 시간을 드러낸다. 전자가 화면 안에서 개별 도상들의 관계를 조직하고 각각의 연작을 구별짓는 주제를 제공한다면, 후자는 화면 위에서 화가의 눈과 손이 행한 것을 노출하고 화면들 자체의 변화를 추적하는 길잡이가 된다.
전혜림은 2015년 개인전 『나르카디아; 의식의 밤』(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새 연작을 문자 그대로 연속 작업 또는 "순환 작업"의 형태로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나르카디아」는 헛된 환상이 지배하는 거짓된 현실을, 「밤」은 그 비현실적 현실을 부수고 맞이하는 어둡고 진정한 현실을 그린다. 그러나 양쪽 모두 현실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그리는 회화, 또는 그저 평면 위의 가상으로서, 현실에서나 현실 바깥의 어떤 초월적 세계에서나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구성된 장면들은 드로잉 작업을 통해 단편적인 형상들로 되돌아가 재배치되며, 일시적으로 회화면을 이루었다가 다시 와해되기를 반복한다. ● 당시 작가는 개인적인 환멸의 경험으로부터 거의 직접적으로 몇 점의 회화가 튀어나왔고 그것이 「나르카디아」 연작을 낳았으며, 거기서 「밤」이 파생되고 드로잉 작업이 뒤따르면서 결과적으로 어떤 순환의 고리가 작가 자신의 실존적 의식으로 성립되었다고 썼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어떤 회화의 실존적 의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화가를 통해, 그의 감정적 동요에 힘입어 자신의 무를 찢고 나온다. 그러나 한 점의 회화로 외재화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자신의 현존이 아직 불충분하다는 의식이 뒤따른다. 회화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고, 어떻게 자기 존재를 표명해야 하나?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수긍하며 순순히 드로잉 상태로 돌아가지만, 다시 무로 환원되지 않고 회화의 형태로 거듭 되돌아온다. 원한다면 그 존재를 좀비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제 모습과 처지에 만족하지 못해 끊임없이 자신을 해체하고 재생성하는 프랑켄슈타인처럼 행동하고 있다면, 그 행태가 무척 인간적이라는 것만은 인정해야 한다.
이제 갓 태어난 회화가 자기 존재를 의심한다. 대체 왜? 한 가지 실마리는, 전혜림의 그림이 언제나 피조물의 피조물 또는 그림의 그림이라는 자의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작가는 「나르카디아」 이전에도 카메라 렌즈나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옮긴 듯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실물에 대한 직접적 지각의 묘사나 순수한 추상 구성을 시도하더라도 결국 어디선가 본 그림의 그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작가 자신의 강렬한 내적 감정에서 비롯된 「나르카디아」 연작조차 다른 화가들과 사진가들, 미술책과 신문, 잡지를 통해 이미 존재하는 도상들의 재조합으로 구성된 것은 결국 그림의 그림이 작가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접근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순환 작업"의 운명을 결정한다기보다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성립한다. 화면들은 증식하고 분화하면서, 단순히 그림의 그림을 뒤섞는 주사위 던지기가 아니라 계속해서 다시 지우고 다시 그리는 붓질의 궤적을 형성한다.
그림의 그림이자 헛된 환상이 지배하는 세계의 그림인 「나르카디아」의 화면은 충분히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흐린 잿빛에 잠겨 있다. 기본적으로 이 잿빛은 여기저기서 발췌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통합하는 만능 배경막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 잿빛의 물감 얼룩 속에 잠복해 있던 무언가 형태 없는 것이 때때로 화면 위에 떠오른다. 반투명할 때는 안개나 유령처럼, 불투명할 때는 유독한 연기나 먹구름처럼 화면을 뒤덮는 이 어스름한 것은 일종의 특수 효과처럼 장면에 봉사한다. 그러나 「밤」의 화면으로 넘어가면, 그것은 좀 더 짙은 어둠 속에서 좀 더 밝게 불길처럼 빛나거나 물줄기처럼 솟구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화면을 가로지르고 장면을 찢으면서 환상을 부수는 '밤'의 폭력적인 에너지를 표현한다. 드로잉 작업의 경우, 작은 화면에서 도상들과 장면들에 집중하는 「드로잉 맵」에서는 이런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여러 장의 캔버스를 넓게 쓴 「연속 드로잉」에서는 화면 전체가 홍수가 난 것처럼 들끓고 불길 같은 것이 다시 그 표면을 찢고 나오며 형상들과 대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작가는 회화 작업을 곱씹거나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려보는 회화가 아닌 그림을 모두 '드로잉'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정의는 드로잉과 회화를 구별하는 척도이기보다 작가의 작업 전체를 바라보는 하나의 대안적인 관점으로서 더 유용할 수도 있다. 여러 점의 회화들을 때로 번호도 없이 그저 「밤」 또는 「나르카디아」로 명명할 때, 그것들은 하나의 우주를 이루는 여러 개의 파편일 수도 있고 하나의 주제를 표현하는 여러 개의 판본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작가는 아직 하나하나의 그림들을 자기 완결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들은 단지 전력을 다해 회화로서 성립시키고자 했던 결과라는 점에서만 드로잉과 구별된다. 드로잉 작업은 대체로 정해진 시간에 끝내고 놓아줄 수 있는 데 반해 회화 작업은 오래된 것이라도 자꾸 덧칠을 하고 싶어진다는 작가의 말은, 회화를 보는 그의 시선에 대한 한 가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회화는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회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 속에 반쯤 잠겨 있다.
여태껏 작가는 이 '아직은 아닌' 시간을 되도록이면 움켜쥐고 있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이 미결정의 시간을 공공연하게 펼쳐놓고 보는 편을 택했다. 새로 시작한 「낙원의 재건」 연작은 어떤 형태로든 회화로 성립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버려둔 자신의 그림들과 오래 전에 완성되어 미술사에 등재된 다른 화가들의 회화를 접붙여서 다음 그림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시도다. 뒤늦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습작 같은 이 그림들에서, 「나르카디아」와 「밤」의 장면들은 잘려나가고 덧칠되고 이질적인 요소들에 둘러싸이며 과격하게 모습을 바꾼다. 화면은 어느 때보다 덜컹거린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전에 없던 기대감과 전과 다른 불안으로 충전되어 있다. 화면은 햇빛 같기도 하고 샘물 같기도 한 밝은 색깔의 붓질로 꿰뚫리고 다시 꿰매어진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다음 화면을 기다린다. '낙원은 없다'는 단언에서 시작된 붓질의 궤적이 '낙원의 재건'에 도달한 시점에서, 그림들은 여전히 그림의 그림이고 여전히 초조하지만 적어도 자기 존재가 아닌 것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 전혜림은 「낙원의 재건」 연작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신기루'라는 말을 썼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화가의 낙원이란 결국 그저 계속 그림을 그리는 것, 회화를 향하고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면서 계속 움직여 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은 신기루일 수 있고, 그런 것으로서 치명적일 수 있다. 누구나 사막 한가운데서 재가 되지 않고 불타는 떨기를 본다면 일단 자기 정신을 의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 그 불꽃은 살아서 사막을 건너는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설령 태양 같은 것은 없다고 해도 붓이 움직여 빛을 그리는 손을 비추는 한에는 여정을 계속할 수 있다. 오로지 그 불투명한 빛을 따라, 전시는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의 입구를 연다. ■ 윤원화
신기루는 대기 속에서 빛의 굴절 현상에 의하여 공중이나 땅 위에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라 한다. ● 이번 전시에서 신기루는 나의 작업에서 하나의 그림을 향하는 두 가지 이상의 시선을 의미한다. 그것은 미술사(Art history)일 수도 있고, 지금껏 내 그림을 이루던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리기 과정에서 겪는 크고 작은 실패, 그리고 손과 눈 속에 자리하고 있는 미술사가 늘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작은 행위도 단독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내고 싶었다. (이번 전시 전반에 뭉크의 「The Sun」이 가장 큰 영감을 주었다.) ■ 전혜림
Vol.20170713j | 전혜림展 / JUNHYERIM / 田惠林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