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성북예술동·N 전시지원 작가공모展   2017_0623 ▶ 2017_0719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7_0623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 강현아_김찬우_박창식_홍성혜

아티스트 토크 / 2017_0704_화요일_07:00pm

주최,주관 / 성북구_성북문화재단 성북예술창작터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성북예술창작터 SEONGBUK YOUNG ART SPACE 서울 성북구 성북로 23(성북동1가 74-1번지) Tel. +82.(0)2.2038.9989 cafe.naver.com/sbyspace www.facebook.com/sbartcenter www.sbculture.or.kr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성북도원 SEONGBUKDOWON 서울 성북구 성북로31길 126-9 Tel. +82.(0)2.2038.9989 www.sbculture.or.kr

지금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만을 확신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문학의 열풍이 상업적 마케팅에 상당부분 기인한다는 비판이 존재할지 몰라도, 인문학에 대한 수요의 폭증이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시대의 극명한 반증이라는 견해는 분명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실상, 좌표를 '잃었다'기 보다 좌표가 '없다'가 적합할지 모른다. 즉, 옳고 그름, 진짜와 가짜,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것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차오를 수 있겠지만, 진정한 공포는 지금까지 '참'이라고 믿던 대상들이 과연 '참'인지에 대한 의문과 불신의 증폭, 즉 근원적인 믿음의 판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는 명제가 동의를 얻는 시대는, '깨어있는' 자들은 '의심하는' 자들이라는 또 다른 명제에 이르게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끝없이 질문하는 행위'. 예술의 값진 유용성은 아마, 미술시장에서의 투자가치나 심미적, 장식적인 기능을 넘어서, 우리가 가진 통념들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수동적 삶에 침잠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과 맞닿은 곳에서 방점이 찍힐 것이다. ● 이번 성북예술동·N 작가공모에 선정된 작가들 역시, 암전 상태에 비견될 법한 불확실성과 불신 불안의 극대화에 맞닿은 시대정신을 공유한다. 이들은 각자, 세상에 널려있는 관습화된 믿음과 행동양식, 사회적 억압, 속물근성, 물신성, 소비사회의 기호들 앞에서 내밀한 저항들을 느끼고 자각하며, 그 자각들은 곧 작업의 출발점이 된다. 앞서 언급한 내밀한 저항들의 촉발 지점들은 '어디에나 혼재해 있는' 우리의 일상이다. 그 일상 속에서의 모순,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시대의 풍랑 속에서 끈기있는 의심과 질문, 그에 대한 실천을 필요로 하게 되며 '어디에도 없는 방식'의 고민과 질문들을 하게된다. '어디에나 있는 것'과 '어디에도 없는 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어디에도 없는 것들은 어디에도 없는 것들의 모순에 대한 반작용과 상호작용에서 나오는 특수하고 세밀한 아이디어들의 실천들이기 때문이다.

강현아_그림 우려낸 물_캔버스틀, 천_가변설치_2017
강현아_양생 약재_일상 주변재료_가변설치_2017
강현아_리노폴리아 rino folia_캔버스에 수채, 아크릴채색_62×42cm_2017
강현아_용미립 龍尾立_캔버스에 수채, 아크릴채색_62×42cm_2017

어디서나 흔히 목격하게 되는 사람들의 믿음체계에 담긴 관습과 허구를 유쾌한 방식으로 뒤트는 강현아 작가는, 콘크리트가 마치 무럭무럭 자라는 생명체인 것처럼 관람객들을 그럴듯하게 설득한 바 있다. 콘크리트는 흔히 목석처럼 무감각하고 냉정한 인간형을 묘사하는 메타포로 쓰이지만, 콘크리트의 양생(養生)과정을 한의학의 양생(養生)개념과 결합시킴으로써, 그는 전혀 상이한 특성을 지닌 콘크리트를 우리 앞에 내 놓았다. 한편, 이번 신작에서는 불룹타스 코로시부스, 리노폴리아 등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약초들을 창안하여, 불로장생을 꿈꾸는 인간들의 보편적 욕망을 슬쩍 건드려 보게 된다. 본래, 약용식물이란 특별히 신령이 던져주는 것이 아닌 주변에 흔히 널린 것들이 반복적 사용경험에 의해 효능 있는 존재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디에나 있는 것들이 어디에도 없는 것들이 된 셈이다.

김찬우_눈깜빡도구_영상_00:03:00_2016
김찬우_다시 쑥가라_영상_40:00:00_2017
김찬우_지구여행_영상_00:30:00_2017
김찬우_머리 처박기_잉크젯 프린트_가변크기_2017

한편, 김찬우 작가는 고정된 틀과 정해진 길로 가야 한다는 사회적 억압들이 공기처럼 퍼져있는 우리의 일상에 대한 반기로 해석될만한 작업들을 보여준다. 그림자를 따라 간다거나, 바람을 따라 간다거나, 눈깜빡임을 보여주는 장치를 고안한다거나 하는, 이런 '무용'하고 목적성 없는 바보 같은 행위들을 영상에 담고 있는 김찬우는, 무의미하고 사소하고 하찮은 망상들을 실현하는 과정을 통해 서사, 위계, 억압 등을 모두 해체한다. 이런 시도들은, 얼마 전 매스컴에서도 크게 보도 되었던 '멍 때리기 대회'와 마찬가지로, 성취주의, 성과주의의 강박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며, 동시에, 외부 통제시스템을 벗어나면 금새 표류하고 마는 무기력한 개인의 현존을 함께 담아낸다고 볼 수 있다.

홍성혜_Injoy_HD 영상, 사운드_00:03:50_2012
홍성혜_Dinner_잉크젯 프린트_66×100cm_2012
홍성혜_Sunday Living Room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17
홍성혜_조립 시리즈_종이에 색연필, 테이프, 싸인펜_29.7×21cm_2016

홍성혜 작가는 대중을 사로잡는 소비사회의 기호 스스로 당한 사기극을 자각하고 폭로하지만, 결국 스스로 다시 그것에 빠져드는 양태의 작업을 보인다. 엽서 한 장이 홍성혜의 '오인(Misconception)' 시리즈를 구상하게 만든 공신인데, 이 엽서는 자녀가 친구들과 함께 유쾌한 생일파티를 열고 있는 60년대 서양의 한 가정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장면을 보며 행복감과 노스탤지어를 느꼈지만, 결국 이상화된 소비사회의 기호에 불과한 것에서 느끼게 된 노스탤지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반문을 하게 된다. 그는 그것을 선전이미지라고 부르며, 색에 관한 보편적인 인간심리를 반영한 '에바 헬러의 색 배색표', 규격화된 색채를 가진 공산품들, 안정적 구도가 가진 규칙성 등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다시 해체하고 재배열하고 연출하는 식의 개입으로 확장해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심각한 비판의 어조라기 보다 '욕하면서도 즐기는' 톤으로 비춰진다. 강력한 서구문화의 지배 속에 '대중'이라 불리는 우리들이 친숙하게 접하고 소비하는 기호의 다양한 양태들이 홍승혜에게 포착되고 수집되어 흔히 볼 수 없는 특수한 아트오브제들로 분하였지만, 그것은 다시 또 하나의 달콤한 조형적 대상이 되면서 끊을 수 없는 순환고리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박창식_199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130.3cm_2017
박창식_Alle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130.3cm_2017
박창식_Dirty Tabl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130.3cm_2017
박창식_Tunne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50cm_2017

박창식 작가는 풍경을 그린다. 풍경은 우리가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을 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며 어디에나 존재한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풍경이 특수한 풍경이 되는 것은 오로지 그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와 그 선택과 사이에 일어나는 심리적 상호작용에 의해 가능해 진다. 박창식이 보여주고자 하는 풍경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의 풍경이며, 자신이 어릴적 살았던 공장지대, 건축잡지에 실린 현대적인 고급건축물 등 다양하다. 굳이 건축물을 그린다고 표현하지 않고 풍경을 그린다고 하는 것은 심리적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건축물은 기억과 추억과 경험들이 되살아 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매개가 될 것이며, 그것을 '건축적 풍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풍경은 고유한 감정들이 투사됐을 때 가능할 것이며, 이런 감정들은 탈 맥락적으로 병합된 건축물들, 붓질과 마띠에르 등을 통해 표현된다. 관람자가 이 그림 앞에서 자신만의 추억을 떠올린다면 이 순간 어디에도 없는 풍경화가 완성될 것이다. ● 세상 어디에나 만연한 사람들의 관습적인 믿음체계를 간파한 작가는 마치 연금술사처럼 분하여, 콘크리트도 생명이 깃든 것처럼, 세상에 없는 약초도 불로장생초처럼 제시하여 우리를 교란시키며 말을 건다. 세상 거의 누구나가 정답처럼 정해진 길들로 걸어가고 있는 것에 강한 의문을 품은 작가는 애써 구심점도 방향성도 없는 멍청한 행위들을 독특한 놀이처럼 즐기며 엄숙주의를 타파한다. 우리 삶에 깊숙이 파고든 서구의 소비문화가 얼만큼 강력하게 내면화 되었는지에 화들짝 놀란 작가는 그 구조를 여러 방식으로 해체하지만, 결국 다시 그 안락한 마약 같은 세계의 놀이 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역설을 보여준다. 어디에나 펼쳐진 풍경이지만, 그 풍경을 바라보는 개인의 감정과 경험들이 투사되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작가는 그 다름을 다양한 조형언어로 보여준다. 이렇듯 우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어디에도 없는 것들을 찾아내고 질문할 수 있다. 여기 모인 예술가들이, 때론 유머 넘치게 때론 황당하게 때론 날카롭게 던진 질문들은 다시 어디에나 있는 것들 속에 편입되어,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다른 희망의 영토로 인도할 것으로 믿는다. ■ 김소원

Vol.20170623f |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