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717d | 강선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7_0623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 휴관
수호갤러리 SOOHOH GALLRERY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174-1번지 더샾스타파크G-24 Tel. +82.(0)31.713.0287 www.soohoh.com
나무를 알아가는 자리에서 이해되는 존재 ● 강선구 작가는 가장 기하학적인 형태 중 하나이자 평범한 형태인 육면체의 큰 틀에 책이나 병과 같은 사물 오브제를 대입시켜 낯선 상황으로 전환시키거나, 시멘트 덩어리와 결합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익숙한 사물은 본래의 기능과 의미를 잃고 새로운 형태의 모호함(ambiguous)을 감상자에게 전달한다. 작가는 틀로 인식되는 육면체, 기능으로서 주어진 병, 의미로서 강제하는 책 등을 하나씩 상징적으로 해체하여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회의의 과정을 거쳐 왔다. 작가의 작업에서 특히 주목하게 되는 오브제는 '책(book)'이다. 세상의 책, 특히 사전에는 현상계에서 이미 주어진 수많은 의미들이 집약되어 있으며, 세계를 일방향으로 해석하는 틀로서 작용한다. 작가는 물리적 공간에서 책이 지닌 이 심리적 확장성,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의미의 공간을 시멘트라는 재료로 고체화시킨다. 외형상 책이라 인식할 수는 있지만 의미를 지니지도 읽을 수도 없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이 책은 과연 책이라 부를 수 있을까.(The Book I 시멘트 캐스팅, 전사, 철분 35x25x5cm, 2003)
『내일 완성될 이해의 초도(草圖)』전에는 작가가 최근 진행해 온 두 작업, '그것과 그 사람에 대한 기록 작업'이 전시되어 있다.「잘 아는 사람을 위한 기념비」에서, 작가는 설문지 작성자에게 본인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기록하고 가명을 짓게 한다. 작가는 알지 못하는 미지의 인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분류하고 정리한다. 전시장에 보관된 기록물을 통해 누군가의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감상자에 의해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진다. 감상자가 누군가의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다리에 오르거나 켜켜이 쌓인 기록물을 한 장씩 펼쳐 읽는 수고로움을 거쳐야 한다. 작가는 기록과 분류, 미지의 인물에 대해 가명을 지어줌으로써 해석 행위에 참여한다. 이제 작가가 지은 이름인 김주원 씨는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박진수 씨를 미지의 감상자에게 소개하게 된다. 이렇게 진행된 '잘 아는 사람을 위한 기념비'는 정성연 씨와 손진영의 B씨와 김주원 씨의 박진수 씨를 '알게' 해줄까? 내가 아는 그는 당신이 아는 그와 같은 그일까.
「만들어진 유물_잘 모르는 것들에 대한 기록」에서 작가는 자신이 생활하는 반경을 중심으로 주변 나무의 가지 일부를 흙으로 감싸 본을 뜬다. 그 본뜬 자리를 실로 묶어 두고 자신이 알지 못하던 그 나무의 학명을 나무도감에서 찾아본다. 작가는 흙으로 본뜬 형상에 시멘트를 부어 떠낸 형을 솔로 털어내고 기름칠하고 수건으로 닦아 낸다. 시멘트로 떠낸 나뭇가지의 형상은 조금씩 갈라지고 뒤틀려 제각각이지만 애써 갈아내거나 다듬지 않는다. 시멘트 로 작가가 본뜬 나뭇가지의 표본과 나무의 학명이 기록되어 '만들어진 유물'이 된다. 작가는 자신이 본뜬 나무를 GPS 좌표상에 구멍으로 표시하여 '나무를 알아가는 과정'을 지도에 완성해 나간다. 작가의 두 작업. 나무를 알아가는 과정과 미지의 누군가에 대해 아는 과정은 의미화를 목적하지 않는 '과정이자 행위'에 가깝다. 아는 게 중요하다기보다 알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인식을 넘어 '행위'하는 것이 작가에게는 더 중요해 보인다. ● 강선구 작가의 기록물로서의 작품, 누군가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 대해 표현한 사전에는 없는 문장들은 마치 누군가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표정과 마주하는 듯하다. '감정에 솔직하지 않다.' '미안하다는 말과 용서를 잘 하지 못한다.' '목소리가 크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 '그냥 괜찮다고 한다.'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한다.'… 등의 표정을 지닌 얼굴들.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face)'에서 발견한 현전성에 대해 데리다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타자의 얼굴은 불확실하고 모호하다고. 데리다의 의문은 레비나스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존재에 대한 질문, 긍정에 가깝다. 의미를 해체한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타자, (비)의로서의 너는 존중할 만하지 않거나, 남루하거나, 심지어 흉측하거나 무서운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가 타자와 만남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타자(라는 모호함과 불확실성)를 통과해야만 존재로서의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서로 알지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비록 나의 초도(草圖)를 오늘 이해하지 못하고 내일 완성할지라도,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불확실성과 다층성을 나무를 알아가듯 천천히 하나씩 나의 행위로서, 나라는 존재로 표현하려는 시도. 의미화에 대한 오랜 회의 과정을 거쳐 타자와 만나려는 작가의 시도, 그 표현 행위는 그래서 이전보다 자유로운 (비)의미화의 과정, 충분히 가치 있는 '질문하기'로 보인다. ■ 이정화
Vol.20170619c | 강선구展 / KANGSEONOGU / 姜善求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