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화요일 휴관
갤러리 아쉬 헤이리 GALLERY AHSH HEYRI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55-8 Tel. +82.(0)31.949.4408 www.galleryahsh.com
외관의 몰락 시대 ● 과거의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대부분 자연 현상 안에서 인지했을 것이다. 낮이 밤으로, 여름이 겨울로 그리고 들에서 바다로, 태어남에서 죽음으로.., 인간의 현실은 감각 가능한 물리적 체험을 바탕으로 구성되었고, 그래서 자연은 미술의 가장 오래된 형식이자 목표 그 자체였다. 이 목표 안에서, 부정할 수 없는 객관으로서의 자연이미지는 '절대적인 것'의 명징한 상징이었다. 이때 자연이미지는 상상력에 한계를 부여하여 인간의 오만함을 제어했으며, 창의적인 생각들이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게도 도왔다. 회화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이미지를 존재의 자각이 이루어지는 곳 혹은 감각과 경험의 순수한 동기로 삼고 자신의 목표에 닿고자 했다. 화가에게 자연은 '리얼(the real)'의 최선이자, 그것의 이미지는 '리얼'의 최종적 확인이었다. ● 하지만 미술에서 이 의심치 않았던 '감각 가능한 리얼'의 권위는 현대에 들어 의심받기 시작했다. 리얼에 관한 철학의 오래되고 본질적인 질문이 미술에 파고든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실체론', 라이프니츠의 '단자론(monadologia)', 칸트의 '물 자체(Ding an sich)',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등의 철학적 논의는 현대 미술을 뜨겁게 달궈 놓고 있다. 특히, 베르그송-들뢰즈로 이어지는 실재에 대한 영향력 있는 담론에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던 물리적 현실들(virtual reality)'이 극한으로 수축한 결과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현실 혹은 자연이라고 불러 왔던 것들은 우리의 제한된 감각능력으로만 확인 가능했던 리얼의 초라한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20세기 양자물리학의 새로운 법칙들과 더불어 실재에 대한 이러한 관점의 각성은 점차 일반화되고 있다. 이제 세계와 존재의 경험을 증언해야 하는 현대미술가들은 '실재, 실제, 현실, 가상'이라는 용법의 구분 앞에서 난감해지게 되었다. ● 21세기는 그 난감함이 더욱 극에 달한 시대이다. 우리의 감각 기관은 자연으로부터 획기적으로 멀어져서 디지털 세계,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증강현실(Argument Reality, AR), 소셜 네트워크 시스템(SNS)들과 같은 이미지의 끝없는 리좀(Rhizome)적 순환에 길들게 되었다. 시작도 끝도 중심도 없는 이미지들이 전자적 입자의 형태로 존재하며 떠돌고, 이미지는 과거와는 다르게 통일되고 안정된 규칙을 떠나서 미시적이고 카오스적인 '관계 맺기'로 존재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화소(pixel)의 파편적 정보와 그것들로부터 무한히 반복 생산된 복제 이미지를 경험하는 것으로 자연 이미지를 대신하는 시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의 시뮬라시옹(simulation)이 지배하는 시대, 즉 진실과 착각이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우리의 현실을 규정하는 가공할만한 시대를 겪고 있는 중이다. ● 이제 21세기 미술가는 세계를 재현함에 있어서 감각의 제한적 능력에 의존하기 어려워졌다.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작은 세포들의 분열과 증식이 실제 우리 몸의 지독한 현실이듯이 그리고 우리 눈에 반짝이는 별 이미지가 별의 진정한 형상을 말해주지 않듯이, 세계의 진정한 실재는 '외관의 정의'로 구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미술가들은 직관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외관이 몰락'하고 드러나는 새로운 리얼리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풍경을 이루는 잠재된 리얼로서의 『Alterscape(대안 풍경)』는 이런 상황에서 출현하게 된다.
무엇에 의한, 무엇을 위한 상(image)인가? ● 이러한 동시대적 인식 안에서 작가 오택관, 서윤정의 전시는 참으로 반갑다. 시각 경험으로는 다 알 수 없는 우리의 참된 현실을 탐색하고, 그것을 예술의 재현 대상로 삼는 이 두 작가는 이번 『Alterscape』 展을 통해 감상자들의 눈과 정신에 특별한 울림을 전달한다. 그동안 다양한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를 심어준 이 두 작가는 기법적, 미학적 측면에서 많은 흥미를 갖춘 신작들과 함께 다시 대중 앞에 섰다.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는 현대 사회의 생태와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운 안목으로 디지털적 감성이 충만한 오늘날 우리의 심리적 혼란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두 작가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경험하고는 있지만 그 경험을 인식할 수 없는 우리 정신의 '또 다른 풍경, Alterscape'로 제시되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두 작가는 21세기 인간이 감각하는 수많은 사건의 흔적을 쫓으면서 이미지를 존재의 생존환경에 깊게 관련시킨다.
작가 오택관의 신작들은 무엇보다도 담론적 완성도가 돋보인다. 오택관은 기존의 작풍을 유지하면서도 '화면을 어떤 풍경의 구조적 지점과 사유 된 메타포로서(김복수)'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면을 더욱 강한 확신으로 쪼개고 교차시킴으로써 세계가 가진 '내면의 힘'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들은 수없이 겹치며 기하학적 구조를 이루는 색과 선들이 벌이는 차이(différence)와 반복(répétition)의 변주곡이다. 작가의 회화는 무한한 변형의 가능성 안에서 침투와 교차 배열의 실천을 통해 형상의 '역행적 진화'를 본격화시키는 곳이다. ● 오택관은 종전의 「그래픽쳐스(graphics+pictures)」 시리즈와 같은 연결 선상에 있다. 작가는 도시적 속도와 날카로운 기계음 그리고 자연의 현란한 변화와 우발성의 총체적인 풍경을 회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 난무하는 이미지의 힘이 이번 전시를 통해 원초적 의미를 분명히 획득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더 확신에 찬 어조로 타협을 위한 절제를 용납하지 않으며, 일상이 남긴 당혹스러운 잔상을 냉정하게 기록한다. 진짜이면서 현실에서 감각되지 않는 세계, 시끄러운 모든 것들이 무한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세계, 이미지가 무한 증식하고 무한 반복하는 이미지만을 위한 이미지의 공간.., 작가는 인간 정신의 가장 순수한 모방 욕망을 '분노'에 가까운 날카로운 패턴들로 표출한다.
그래서 작가는 절대 완성되지 않는 어떤 구조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이는 구조의 완성이 목표가 아니라 구조의 끝없는 생성 자체만이 문제 되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현란한 직선과 색채들이 만드는 그의 화면은 하나의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번뜩이는 '찰나'만을 위한 구조로 보인다. 이제 그에게는 수많은 모더니스트가 꿈꿨던 추상(abstraction)을 향한 맹목적 애정도 없다. 오직 붓과 물감만을 이용해 정신에 일어난 사건을 꼭 붙잡고자 한다. 추상을 닮았으나 오히려 실재를 묘사한다. 그리고 그 '실재'는 '외관의 실재함'이 아니라 외관의 원인이자 궁극의 실체로서의 그것이라고 확신한다. ● 컴퓨터 스크린 내부에서 쏟아져 내리는 전자 기호와 이진법들의 알 수 없는 파편들이 만들어 낸 세계처럼 오택관의 이미지는 모든 현대적 감수성이 형상으로 드러나기 전에 거치는 곳이자, 현상이 잠재되어 현실로의 수축을 기다리는 이미지의 모체(matrix)이다. 작가는 그래서 카오스를 현상 발생의 근원으로 파악하는 21세기형 붓질을 감행한다. 외관이 몰락함에 따라 미시계로 진입한 그의 이미지는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의 혼란스런 질서를 현실로 받아들인다. 작가에게 하나의 이미지는 정신에 외상처럼 새겨진 이미지들의 잔상이 된다.
작가 서윤정이 보여주는 'Alterscape'는 또 다른 미술적 시도이다. 인식 과정에서 발생한 이미지들이 감각의 세계인 현실로 이동해 있다. 작가에게 이미지란, 일상에 뜬금없이 나타난 '비-일상'의 경험이다. 2차원의 평면이미지가 3차원의 오브제가 되고, 그림이 조각이 되며, 일상이 미술이 된다. 이 전환의 과정에서 형식은 구차한 것이 되어 결국 그녀의 '오브제-회화'들은 현실에서 흩뿌려지거나 아무렇게 놓이면서 하나의 우발적 사건이 된다. 서윤정의 작품은 감각과 지각, 증식과 종결, 미술과 장식, 축제적 난잡함과 이성적 난잡함이 모두 집결하는 혼란스런 풍경이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이미지와 공간과의 '곤란한 관계 맺기'의 일례로서 손색이 없다. ● 이런 관계 맺기로 만들어지는 '오브제-회화'들은 그녀가 매일같이 경험하는 일상의 공간 속에서 체험한 수많은 이미지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작가의 '오브제-회화'들은 어디 한 곳에 고정된 이미지의 진실이 아니라, 이미지로 촉발된 심리적 진실을 가리킨다. ● "그것은 집, 작업실과 같은 실재의 물리적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과 같이 SNS상에서 경험하는 가상의 공간(남의 집 침실의 체크무늬 이불커버, 파리의 한 가정집의 테이블 위 와 같은)도 될 수 있다. 나는 내가 매일 접하고 흡수하는 수많은 이미지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재조합하여 또 다른 이미지들을 추출한다." (서윤정 작가 노트 중)
작가는 이미지를, 그것이 평면이건 입체이건 간에, 경험의 산물로서 정신의 '소품(props)'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것들은 독립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놓인 장소, 붙여진 벽면, 이미지의 방향, 전체 공간에서의 위상, 그리고 작가와의 거리와 시각적 효과 같은 것들이 주는 인식의 차이에 의해 의미가 수시로 바뀐다. 키네틱 극장(kinetic théâtre) 같기도 하고, 어지럽힌 작업실 같기도 하고, 옵아트 전시장 같기도 하고, 몬드리안의 꿈 속 같기도 하고, 스마트폰의 정신없는 화면 이동 같기도 하다. ● 결국, 변하고 움직이는 것은 이 소품들이 아니라 감상자인 인간 주체이다. 서윤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현실의 인식 변화를 유도한다. 눈을 크게 뜨고 보기도 하고, 단번에 훑어보기도 하며, 무의식중에 스치듯 보기도 하는 모든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대로의 모습일 뿐, 그것들에 변화와 운동을 가하는 것은 오히려 주체의 변화와 운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품은 그저 놓여 있을 뿐, 그것으로 야기된 혼란은 오롯이 인식 주체인 우리의 몫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서윤정에게 이미지들은 오택관의 이미지들과는 다르게 지극히 상대적인 것들이다. 오택관의 세계가 광속 운동하는 이미지가 우리를 에워싸는 형국이라면, 서윤정의 세계는 멈춰진 이미지들을 우리가 광속 운동으로 관통하는 형국이다. 따라서 서윤정의 작품은 상대적인 변화와 상대적인 인식의 창발을 목표로 정한다. 그리고 그녀의 평면이미지와 입체이미지는 공간과 하나의 구조로 흡수되어 설치의 묘미를 드러낸다. 이런 식으로 서윤정의 '곤란한 관계 맺기'는 일상에 대한 인식의 변이(variation)를 끝없이 만들어 낸다.
떠오르는 정신의 몽타주 ● 세계와 존재의 복잡함은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는 절대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추적하면서 각각의 시대에 영민하게 대응하며 진보를 이루어 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늘 이 역할의 중심에 있었다. 이번 전시는 이 예술가의 오래된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는 두 명의 젊은 미술가들을 보여 준다. ● 자연과 인공, 빛과 속도, 물질과 환영, 구획과 탈주, 이 모든 것들의 혼재를 토대로 오택관, 서윤정의 정신 풍경은 차이의 생성을 실현한다. 또한, 추상이라는 미술 형식을 빌려 세계의 생경한 풍경을 묘사하는 이들은 실재를 끝없이 탐색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들은 또 다른 의미의 리얼리스트들이다. 우리가 감각의 대상으로 삼는 실재는 과연 무엇이냐는 문제를 공공연히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들은 형상으로 귀속되지 않은 리얼리티를 오히려 현실로 받아들이며 감상자들을 하나의 유의미한 철학적 반성으로 유도한다. "가상(the virtual)은 온전한 실재(the real)를 소유한다."라고 단언했던 들뢰즈(G. Deleuze)처럼 말이다. ● 그래서 이들에게 가상으로 주어진 이미지의 '가상-모호함'은 하나의 권력이다. 그 어떠한 분석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모호함이 정의(定義)이고, 모호함이 형식 자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게 '리얼'은 진실이 수축하여 등장하게 된 눈앞의 분명한 형상이 아니라, '진실의 근사치' 즉, 몽타주(montage)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재걸
Vol.20170617e | Alterscape-오택관_서윤정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