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6월 민주항쟁 30주년 맞이 경희대학교 '청년'벽화 복원   복원기간 / 2017_0528 ▶ 2017_0608

초대일시 / 2017_0609_금요일_11:00am

주관 / 청년벽화복원 추진위원회

경희대학교 문화대학 '청년'벽화 앞 Kyung Hee University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로 26 Tel. +82.(0)2.961.0114 www.khu.ac.kr

민주화운동과 청년정신의 상징, 경희대학교 '청년'벽화 ● 1989년 겨울, 경희대학교 문리대학 벽에 가로 11미터에 높이 17미터의 거대한 벽화가 탄생했다. 1987년의 유월항쟁 이듬해부터 준비해서 1989년 봄, 한 달 남짓 작업을 거쳐 완성한 이 벽화가 올해로 스물아홉살에 이르렀다. 1987년 유월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한 이 작업은 한 시대의 정신을 집약하고 있다. 민주화운동 이후 통일과 노동, 인권 등의 사회적 의제들이 대학가의 최대 의제였던 점을 감안할 때, 이 벽화가 담고 있는 청년을 비롯한 인물 군상은 그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경희대 그림패 '쪽빛'이 주도하고 다수의 학우들이 동참한 이 벽화는 무수한 갈등과 합의 과정을 거친 공론장의 과정이자 결과이다. 찬반 양론 속에 대학 운영진을 비롯해 교수, 학생, 노조 등이 수차례 회담을 가지며 합의에 도달했고, 70일간의 작업을 거쳐 완성에 이르렀다. 두 차례의 벽화 테러와 문리대 외벽공사 관련 철거 논란 등 어렵사리 지켜온 경희대벽화는 경희대뿐만 아니라 1980년대라는 한 시대를 거쳐온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유산으로 남았다. 이 벽화는 안정적인 공공재로 자리잡기까지 창작과 훼손, 복원, 재훼손, 재복원의 과정을 거쳤다. 그것은 준비과정에서부터 여러 주체들의 결의와 동의, 합의, 후원을 거쳐 탄생했다. 물론 일각의 반대와 방해도 있었다. 이 작품을 둘러싼 갈등은 두 차례에 걸친 테러로 나타났다. 1989년 가을 첫 번째 벽화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옥상에서 흰색 페인트를 흘려 벽화를 훼손했다. 곧바로 복원작업을 했지만, 그해 겨울 같이 일이 또 발생했다. 이번에는 아스팔트 타르 10리터짜리 두통을 부었다. 겨울철이라 복구작업이 어려워 기다렸다가 봄에 다시 복원했다.

벽화 없는 경희대학교 문리대학 건물_1988
민주항쟁 기념 '청년'벽화_경희대학교 문리대학 벽면_1100×1700cm_1989
경희대학교 '청년'벽화 관련 신문 기사_1989년 7월 5일 한겨레_1989
경희대학교 '청년'벽화 2차 훼손_아스발트 타르_1989
6월항쟁 30주년 맞이 '청년'벽화 복원사업 후원의 밤_2017
경희대학교 '청년'벽화 복원 현장_2017
경희대학교 그림패 '쪽빛' 대표 박영균 동문(당시 4학년 재학)_1989
경희대학교 '청년'벽화 복원중인 박영균 작가_2017
경희대학교 '청년'벽화 복원 현장_2017
경희대학교 '청년'벽화 복원 현장_2017
민주항쟁 기념 '청년'벽화_경희대학교 문리대학 벽면_1100×1700cm_1989/2017 복원

세월이 흘러 옅어진 색채를 보완하는 채색작업은 물론 부분적인 수정을 거치는 일이니, 이번 경희대벽화 복원작업은 거의 재제작 수준의 대형프로젝트다. 이번 일은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복원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를 되새기며 그 의미를 확대재생산하는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복원하는 일이다. 그것은 지난 30년간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지키고 그것을 공동체 구성원과 공유하며 마침내 공동체의 미래문화유산으로 지켜내는 상징투쟁의 과정에 중요한 이정표를 찍는 일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 경희대학교의 문화자원으로서 가치를 공인하는 자리인 것이다. 정치적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1980년대에 수많은 갈등을 거치면서도 벽화를 완성하고 지켜낸 경희대 구성원들의 신념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시점이다. 이 벽화를 부르는 다양한 이름이 있다. 작품 제목은 「청년」인데, 일명 '팔뚝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며, 때로는 '해방'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희대 내에서는 '문리대 벽화'라고 부르기도 하고, 바깥에서는 '경희대 벽화'라고도 부른다. 이 작품이 중요한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이 그림은 1980년대라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청년정신'을 담고 있는 예술작품이며 문화유산이다. 그것은 경희대의 것이면서 동시에 한국사회 전체의 것이기도 하다. 벽화는 벽과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그 벽이 사라지면 벽화도 사라진다. 그러나 때로는 벽화가 벽을 살리기도 한다. 유럽의 미술작품 순례 코스에 들어가는 그림 가운데 다수가 벽에 그려진 그림이다. 멕시코의 벽화는 세계인의 발걸음을 모으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경희대벽화도 문리대 공사때의 철거 위기를 넘기며, 이제는 경희대 대표 문화 콘텐츠로 자리잡았다.

벽화28 6월 항쟁도_벽에 아크릴 채색_1988_부분
전남대학교 벽화 '민족해방' 시안
전남대학교 벽화 '민족해방'_1500×1000cm_

좀 더 자세하게 이 벽화의 시대사적인 의미를 살펴보자면, 경희대 벽화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사회변혁운동과 맞물리며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청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벽화의 양식은 당시 유행했던 걸개그림의 전형성을 가지고 있다. 당시의 리얼리즘 미술 양식 가운데는 목판화의 강렬한 선묘에서 유래한 걸개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 전통의 괘불탱화에서 유래했다. 큰 법회가 있을 때 야외에 거대한 그림을 펼쳐 앞무대의 뒷배경으로 썼던 전통을 이어서 당시의 여러 대중집회의 논점을 그림으로 표현한 대형걸개를 그려 사용하곤 했다. 그러나 그 걸개그림들은 대부분 보존되지 않고 사라졌다. 경희대 벽화는 걸개그림의 양식을 현존하는 벽화로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경희대 벽화는 '상징투쟁의 장'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벽화를 그릴 당시와 그린 후 20년에 걸치는 세월동안 이 작품을 둘러싸고 다양한 생각들이 교차했다. 그 생각은 대중적인 논의와 모금운동으로 이어졌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페인트 테러와 같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벽화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표상한다. 갈등과 합의과정을 거쳐온 이 벽화의 존재만으로도 다른 학교들과 차별화하는 문화적 종다양성이 살아 숨쉬는 지성의 전당으로서의 명예를 획득한다. 특히 한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으로서의 청년 이미지를 둘러싸고 벽화를 그리기 위한 공론화 과정과 제작과 훼손과 복원을 반복하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재제작 수준의 복원작업을 진행한 것은 민주주의의 상징을 둘러싼 치열한 상징투쟁의 과정과 결과라는 점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의 민주화운동의 맥락 속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주필 류연복, 김기호, 이정민_광동대학교 인문관 벽화_1300×1900cm_
경기대학교 그림패_경기대학교 학생회관 벽화 제작 현장_1800×1500cm_
경희대학교 그림패 '쪽빛'_전북 순창군 오정자마을 마을회관_300×800cm_

또 하나의 키워드는 '공공미술로서의 경희대벽화'이다. 벽화는 예술적인 공론영역을 형성한다. 예술작품으로 공공연한 논의의 장을 여는 예술공론장으로서의 벽화는 20세기 예술의 엘리티즘을 전복한 소중한 역사이다.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역사는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을 폐기한 채 개인의 사적인 취향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큰 틀에서 보자면 미술 내적인 본질의 문제에 집중한 것이다. 수천년 동안의 인류 역사 가운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진행된 모더니즘 미술의 환원주의적 시각은 매우 짧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맞아 예술의 패러다임은 현실 또는 실재와 접점을 형성하는 쪽으로 이동하게 했다. 그런 점에서 경희대벽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이 지향했던 열린 장으로서의 미술, 예술공론장으로서의 공공미술 작품이다. 30년 가까운 시간 거리를 가지고 있는 벽화라면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했으므로, 그 의미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적 관점에서 1980년대 경희대 교정이라는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우리 모두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가령 30년 전에는 한국사회에서 통일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좌경이요 용공이었다면 지금은 정부부처에 통일부를 두고 통일을 중요한 국가의 정책으로 삼고 있는 것만 보아도 시각과 관점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의 가치는 그 당시의 선입견과 편견을 깬 저항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은 물론이려니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미완의 과제로 남은 민주주의와 통일, 평등, 인권 등의 가치를 담고 있다. 따라서 경희대벽화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유산일 뿐만이 아니라 '동시대와 미래의 보편가치를 담은 예술공론장'이다.

열린 그림마당_동아대학교 교수회관 벽화_300×3000cm_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벽그림 모임_서울대학교 학생회관 식당 현관_500×1000cm_

물론 지난 시대의 가치를 동시대의 관점으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건이나 상징들도 시대에 따라 해석을 달리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청년의 아이콘으로 남성을 내세우고, 남성성의 상징인 팔뚝 근육을 강조하고 있는 이 작품은 남성중심주의 문화가 팽배하던 당시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그림의 내용이 과격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작품의 서사는 매우 간명하다. 노동자, 농민, 학생이 힘을 합쳐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얘기다. 그것은 낭만적 회의주의 노선과 비판적저항주의 노선이 얽혀있는 당대 예술운동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듯 해석과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것은 경희대벽화를 지난 시절을 대변하는 박제화한 유물이 아니라 '동시대의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 예술소통의 매개체'로 살아있게 하는 길이다. 경희대벽화 「청년」은 1980년대 시공간의 문화적 전형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제작 과정의 지난함은 물론 두 차례의 복원작업을 거치며 한 시대의 상징을 지키려는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경희대학교는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1980년대 벽화를 보유한 대학으로서의 자부심을 얻었다. 부산의 동아대, 광주의 전남대에도 1980년대 벽화가 남아있으니, 세 작품은 한 시대를 증언하는 상징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교육공동체인 대학이 역사적의 가치를 지키고 확산하는 문화기관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의 시대도 이제 하나의 역사이다. 6월항쟁을 기념하면서 젊은이의 저항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경희대벽화는 팍팍한 현실 앞에서 고뇌하는 21세기 청년들에게 저항정신의 회복을 권면하고 있다. 동시대의 청년세대에게 있어 경희대벽화 「청년」이 역사적 유산 이상의 것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김준기

경희대 벽화 「청년」연혁 ∙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쟁취 ∙ 1988년 미술교육과 박영균(당시 3학년)학생이 벽그림을 구상, 총학생회가 후원 시작 ∙ 1989년 벽그림제작공동위원회   (미술교육과 그림패 '쪽빛', '생활미술놀이공동체' , 만화패 'ᄒᆞᆫ그림' 등 중심) 구성 ∙ 1989년 설문조사를 통한 디자인이 학교측과의 협상을 통해 최종안이 확정 ∙ 1989년 1월~6월 벽화 제작   -작업 중 작업대철사 절취, 작업대 철거, 붉은 스프레이 훼손사건 등 발생 ∙ 1989년 6월 20일 벽화 완성 / 크기 11m x 17m ∙ 1989년 9월 3일 흰색 페인트 훼손 사건 발생 ∙ 1989년 10월 14일 1차 복원 ∙ 1989년 10월 21일 검은색 콜타르에 의한 훼손 사건 발생 ∙ 1990년 5월 2차 복구 ∙ 1999년 문리대 외벽공사 관련 철거 위기 ∙ 2014년 벽화 앞 머릿돌 제작 ∙ 2017년 청년벽화 복원

Vol.20170611d | 6월 민주항쟁 30주년 맞이 '청년'벽화 복원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