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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선영_백연수_이준展   2017_0607 ▶ 2017_0707 / 월요일 휴관

라선영_70억 프로젝트_나무에 채색_가변설치_2011~7

초대일시 / 2017_060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3 GALLERY3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11(인사동 188-4번지) 3층 Tel. +82.(0)2.730.5322 www.gallery3.co.kr

(생략) 세상의 중심은 '나'이다. 우리 하나 하나는 모두 '나'를 중심으로 '나'의 마음대로,'나'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입장의 차이마다 성격마다 외부의 환경을 대하는 인간의 시각은 변화한다. 내가 아는 하늘색이 알고 보니 너에게는 붉은 색일지 누가 아는가. 확대하면 지구에는 7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것은 곧 완전히 다른 70억 개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서로 너무나도 다른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이 좁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재앙이다.

라선영_서울, 사람-김부장, 이과장, 박대리_나무에 채색_높이 27cm_2014
라선영_서울, 사람_나무에 채색, 벽돌_150×250cm_2014
라선영_서울, 사람_나무에 채색, 벽돌_150×250cm_2014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며, 그것은 타인이라는 존재의 시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 가장 힘센 군주가 되고 싶은가 하면,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고 싶거나 또는 동네에서 가장 잘 나가는 나이길 바라거나 애인에게 가장 멋져 보이고 싶거나. 70억 사람들은 서로를 통하여 서로를 인식하고, 부대끼며 자신의 존재를 외쳐가며 살고 있다. 크고 작은 집단을 통하여 소속감을 확인하고 가족과의 사랑을 통하여 스스로의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

라선영_서울, 사람-전경과 시위_나무에 채색_높이 28cm_2014
라선영_서울, 사람-퀵아저씨_나무에 채색_높이 27cm_2014

여기서 잠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주 저 멀리서 지구를, 그 역사를 바라보자. 지구는 언젠가부터 거기에 있었고 거기에 우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붙여 그것을 기준으로 이 땅에 우리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적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지구라고 우리 스스로 이름 붙인 '특별한' 별의 표면에 붙어 아우성치는 우리들의 일방적인 관점일 뿐.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나' 조차도 결국 그저 무한의 우주에 박힌 어떤 한 별에 기거하는 미미한 존재 중 하나이다. 손오공이 날아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 그 안에서 누구와 누가 어떻게 치고 받고 싸우건 결국 우주의 관점에서는 "그냥 있을" 뿐이다. (후략) ■ 라선영

백연수_Work_2014_소나무, 아크릴채색_각 180×50×50cm_2014_부분
백연수_생수통_소나무, 크레파스_33×30×20cm_2012
백연수_슬리퍼_소나무, 아크릴채색_33×37×20cm, 25×36×22cm_2014

나는 하루 종일 무언가를 한다. 집안일, 장보기, 음식 만들기, 아이들 숙제 봐주기, 작업하기, (특히 나무작업을 하는 경우 작업과정에서 신체적 노동은 작품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필수요소이다.)등등.. 이처럼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work라는 동등한 행위로 놓고 보면 예술작업은 일상의 여러 일들과 다른 차원의 행위일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는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일상의 행위들이 작업의 행위와 같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상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 사이의 간극을 줄이지 못해서 결국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백연수_핸드크림_나무, 아크릴채색_25×25×20cm_2015
백연수_Green Crust_소나무, 아크릴채색_85×45×50cm_2005
백연수_My working table_소나무_70×182×50cm_2008

작업을 하는 것이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면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것 또한 특별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업은 그냥 하는 것이지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꼭 해야만 한다는 마음가짐은 작업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작업은 결코 즐겁지 않은 과업처럼 다가온다. Work는 나의 일상이기도 하고 내가 작업을 하는 과정인 동시에 작품 자체이기도 하다. 예술행위를 한다는 명목으로 관념적인 어떤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은 무의미하다. 작업할 시간적 여건이 되지 않을 경우 차선을 선택하는 것에 너그러워져야 한다. 작업은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의 내용이나 좋고 나쁨의 평가는 외부적인 시선일 뿐이다. 이와 별개로 나는 그냥 작업을 한다. 최근 작업들은 work연작으로 진행되고 있다. ■ 백연수

이준_Bias_플라스틱에 실_13×9×6.5cm×34_2015

Bystander ● 인간은 분명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무리를 짓고 집단을 이루고 산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혼자 살수 없는 인간들이라 하여 반드시 타인과 밀접한 관련을 짓고 살지는 않는다. 농경사회를 이루고 살던 시절만 하여도 혼자의 힘으로 농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변의 힘이 필요하였고 인간들은 서로를 돕고 의지 하고 살며 자연스레 밀접한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희로애락을 함께 즐기고 두레, 향악, 품앗이 등을 서로 해주며 살았었다. 심지어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매우 잘아는 사이인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예전처럼 주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살지 않는다. 어느덧 서로에게 무관심한 상태로 살아 가는 사회 속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이준_Bias_안경에 실, 디지털 프린트_가변크기_2015
이준_Bias_플라스틱에 실_각 13×9×6.5cm_2015

'Bystander Effect' 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은 미국의 한 여성의 살해 사건 후였다. 1964년 미국 뉴욕에 사는 키티는 집 앞에서 살해 당했다. 그녀가 살해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무려 38명에 달했다. 그러나 그녀가 칼에 찔리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아무도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구급차를 부르거나 살해범을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38명의 목격자들은 한 사람이 큰 위험에 처해서 목숨이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모두 방관만 하고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생략) ● 현재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일어나는 수 많은 일들이 서로가 서로를 방관하고 사회적 외톨이를 만들고 심각한 사태로 까지 치닫게 하고 있다. 팔짱을 끼고 먼 곳에서 구경하듯 바라보고, 뒷짐을 지고 남의 일인 냥 바라보는 방관자들, 언젠가 내가 저 한가운데 방관자들에 의해서 사회적 외톨이가 되고, 제2의 키티가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침묵으로 일관할 수 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서 사회 속에서 개인이 외톨이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는 다수, 집단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준_Bystander_레진에 실_라이프 사이즈_2012
이준_Bystander_레진에 실_각 8×2×1.5cm, 라이프 사이즈_2011~
이준_Bystander_레진에 실_각 8×2×1.5cm_2011~

이번 작업에서, 기존에 사용해왔던 재료나 방식을 떠나 나는 작은 인체들을 만들었다. 그 인체들은 두 가지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하나는 팔짱을 낀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뒷짐을 진 모습이다. 이 두 모습 모두 방관자를 표현한다. 팔짱을 끼고, 두 손을 감추어 마치 "나는 당신을 도와줄 손이 없어요" 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과, 뒷짐을 지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나는 이 일과 관련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모습을 나타내려 하였다. ● 또한 인체들은 8 인치 정도로 인형처럼 작은 크기로 제작하였다. 마치 큰 건물을 한 눈에 볼 수 없어 작은 크기로 줄여 만든 건축 모형을 보고 건물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게 되듯이 나는 실제의 사람의 크기보다 훨씬 더 작은 인체상을 만들어서 한눈에 사회적 외톨이를 어떻게 다수가 외면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천이 아닌 실이라는 재료를 선택하였다. 각각의 방관자들은 모두 다른 색의 실로 감싸주었다. 또한 감싼 패턴의 모양 역시 단 한 개도 똑같은 것 없이 다르게 만들어, 모두 다른 개인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 이준

Vol.20170607e | 3≒1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