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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60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스페이스 캔 Space CAN 서울 성북구 선잠로2길 14-4 (성북동 46-26번지) Tel. +82.(0)2.766.7660 www.can-foundation.org
회화의 새로운 활용법: 이강욱 회화의 이면에 숨겨진 시선에 대하여 ● 예술의 역사는 집요함의 산물이다. 역사 속에서 예술가들은 계속해서 시대를 반영하는 환경의 영향을 힘겹게 맞이하거나 때로는 억지스럽게 거스르면서,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역할이라 여겼던 '자아의 완성'을 추구해 왔다. 이러한 집요함은 서로 다른 시류의 줄기들을 자연스럽게 이어내거나 혹은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던 거대한 이념의 덩어리들에 쐐기를 꽂으며 이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이는 여타 다른 역사의 기록 속에 등장하는 정치적 혹은 사회적 변화에 일조했던 인물들이 향유했던 삶의 목적과 전혀 다른 형상이기도 했다. 이에 더해 실질적으로 예술의 역사는 작가들의 작업과 그것을 공공의 장소에 선보이는 전시의 연속으로 그 맥을 이어 왔다. 즉, 예술가는 스스로를 완성함에 있어 끊임없이 자신을 탐구하는 한편, 또한 이를 관람의 창구를 통해 대중들과 공유하면서 일반적인 개인의 성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성취를 추구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라는 복잡하고 미묘한 제 존재의 증명을 위한 하나의 극단적인 방법론으로도 인식될 수 있다. ● 따라서 한 예술가의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 전체를 돌아보아야만 할 것이다. 어쩌면 시각 예술 자체가 우리의 인지 기관을 통해 관찰 가능한 것이므로 이에 대한 오독이 그만큼 자주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시각 예술의 결과물 안에 숨겨진 작가의 의도를 살피는 관람자의 진지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우리가 흔히 '회화'라고 통칭하는 일련의 평면 작업들은 그 매체 자체가 가지는 물리적 한정성, 즉 '화면'이라는 일면의 틀 안에 구성되는 창작자의 심상 재현을 오롯이 평면 위에 재현된 시각적 정보의 조합을 통해서 인식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관람자에게는 회화의 감상에 있어 좀 더 깊은 단계의 이해 범주로 진입하는 일이 여타 매체들의 관람에 비해 좀 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화의 감상이 본래 상대적으로 높은 차원의 집중력을 요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여기서 관람자가 작가의 창작 의도라는 부문에 일단 성공적으로 진입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물성과 움직임으로 보는 이를 제압하는 다른 매체를 사용하는 작업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감상의 세계를 체감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회화를 이분하는 가장 가시적인 경계는 바로 구상과 추상을 구분하는 지점이다. 특히 추상회화는 기술 과학의 발전에 따른 미술의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했던 것은 물론, 재현성의 한계를 깨고 미술과 이를 실천하는 예술가의 정체성에 그 중요성의 방점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기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예술은 이렇듯 다단한 인간사의 일면을 담당해 왔으며, 그 중에서도 회화는 단기의 수명과 복잡한 마음을 소유한 인간으로서 가지는 제약과 그 돌파를 상징하는 새로운 갈래의 인류 역사를 새로이 써 내려왔다. 곧, 회화의 전개는 단순히 예술이라는 범주 가운데 하나인 어떤 매체가 변화해 온 축적의 과정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 사회와 이를 구성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변화의 역사 자체를 의미할 수 있다.
내가 이처럼 장황하게 예술과 회화의 역사에 대한 의미를 돌이킨 것은 지금부터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이강욱의 회화 작업이 바로 평면 작업에 대한 형식적 고민과 이를 실천하는 예술가의 삶 자체를 총체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나아가 회화의 실천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반추하도록 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은 이와 같은 회화 매체의 의미를 시사하는 다양한 지점들을 아우르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남긴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강욱의 연작들은 회화 매체를 활용한 '창작하기', '관람하기' 그리고 '이해하기'로 수행되는 예술 형식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아 성찰' 및 이를 위한 '세계에 대한 인식 전환'에 이르는 근원적인 인간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관통한다. 그저 화려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회화'라는 이해의 포장지로 스스로를 감싸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의 작업은 한국 회화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연구에 의해 언제나 적정한 선에서 해석되어 왔다. 그리고 그 해석의 핵심은 바로 추상화, 현재에는 단색화의 재부흥이라는 시류와 맞물린 한국 현대 미술사의 흐름에 편승한 표면적인 단상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의 회화와 삶을 관조하며 떠오른 궁금증은 바로 이강욱이라는 작가의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작업 의도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심이었다. 그는 그저 장식성을 강하게 보이는 추상의 회화를 그리는 작가임을 드러내기 위해 지금껏 작업 활동을 지속해 왔던 것일까? 과연 이강욱의 회화 연작이 품어내는 작업에서의 자기 성취와 사회와의 소통 지점은 기존의 주류적인 해석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질서에 대한 고민과 인간 인식의 (객관적) 환기'라는 느슨하고, 어쩌면 피상적으로 다가오는 의미의 정도에서 모호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일까? 지금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작업 원천이 되는 핵심 대상을 주제화시키고, 그것으로부터 작업이 점차 변조 또는 확장하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견고히 해 나가는 일반적인 작업 세계 구축의 과정 전반에서 바로 '개인의 욕구' 전반을 드러내려는 작가적 의지를 발견하기가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강욱의 회화에 대하여 그의 작업이 자신의 주관이 인도하는 바로 그 의도 지점에 대한 비평적인 이해가 수반될 때, 비로소 이강욱의 회화 이면에 존재하는 세포 분열의 태초에 오롯이 다다를 수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 이강욱의 작업 세계에 대한 내 의문의 시작은 과연 그의 회화가 지금처럼 추상회화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출발했다. 그의 초창기 작업을 살펴보고 나서 이 물음의 정당성에 대한 자기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강욱의 초창기 회화 작업 「Another World」(1998-2000) 연작은 그의 회화가 어떻게 점차 추상회화로 인식되어 갔는지를 단명하게 드러내는 단초가 되는데, 이 시기 작가는 인간의 물리적 육신인 신체("The Body")나 그 일부("The Hand"), 그리고 다른 생이 분포하는 또 다른 세계인 바다("The Sea")에서 출발하여 그 구성 개체가 되는 식물("The Plant")이나 이를 이루는 세포("The Cell")에 대한 고민을 비교적 직접적/구상적으로 재현한다. 이는 작가가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인지하는 겉보기의 세계에 대한 표면적 인식에 대해 흠집내기를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이 때 그는 주체를 파악하기 위한 대상적 방편으로서 '세포'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평면 위에 끌어들였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연상 가능한 세포의 이미지들을 특정하게 설정된 배율로 확대 혹은 축소하여 새롭게 회화화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로서 이강욱은 '세계는 단일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인식 체계 기준에 따라 서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진실을 자가-확인하는 단계에 이르렀던듯 하다. 작업에 대한 강력한 인용으로서의 '세포'에 대한 작가의 초창기 접근에서 내가 특히 주목하는 요는 당연하게도, 이것이 거대한 담론을 뒤틀기 위한 거창한 시도였다기보다 '자기'를 찾기 위한 과정의 노력임에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는 곧 '자신=인간'이라는 수용적 공식 뒤에 놓여 있는 두 갈래의 길, 그 하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감성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이자, 다른 하나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라는 접점, 그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을 위해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고심 끝에 자신의 시각적인 결과물의 창작을 이어나감에 있어 후자의 길을 향해 나아가기로 한다. 그리하여 생물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세포'에 흥미를 두면서, 이를 향해 스스로가 미세하게 조정하는 물리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관점의 배율을 차차 높여가며 차츰 물성적인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본인이 세운 '자아의 세계에 대한 인식 구조'에 대해 객관적인 논리 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공간'의 개념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한다. 세계는 곧 공간이라는 물리적인 장을 통해 우리에게 인식되며, 공간은 본래 시간성을 내포한다. 이전의 연작이 시간(성)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로 "그 세포가 있음", 즉 "다른 세계가 존재함"이라는 논점에 대한 자기 인정 수준에서 그 개념의 전개가 일단락되었다면, 「Invisible Space」 작업에서 작가는 공간의 요소를 동반하며 잃어버렸던 시간성을 개념적으로 끌어안은 채 자기 시선의 배율을 재조정한다. 이와 같은 시도는 선과 점이 묘사하는 세포의 형태 뒤에 자리하는 '면'의 기능을 극대화하면서, 이것이 만들어내는 배경의 깊이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기법을 통해 실천된다. 은은하게 채색된 색면은 마치 그 뒷공간을 암시하는듯한 다른 깊이를 만들어내거나, 또는 세포가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유동하는 흔적을 형상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그는 점차 다른 세계의 현존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다른 세계의 구동을 위한 '움직임'을 포착했던 것이 아닐까.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시간적 흐름을 받아들이면서 이강욱은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의 줄기를 점차 자유롭게 뻗쳐간다. 이러한 사고의 확장은 관람자로 하여금 회화에서 나타나는 시각적 재현의 정도에 대한 미적 태도의 의미에 집중하도록 만들기도 하는데, 이는 작가의 분열된 자아,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스스로를 대상화시켜야 하는 모순적인 자아의 모습을 이중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특히 2009-2010년 사이의 「Invisible Space」 연작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자아 발현 혹은 실현의 태도와 작가적 시선으로서 인간을 대상화하려는 태도가 좀 더 명확하게 발견된다. 그 이유는 이전의 작업이 세포의 단입자를 표현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여기서는 그것의 집합체에 대한 도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인데, 이처럼 시각-현미경의 배율이 변화된 새로운 화면 구성은 이강욱의 인간적작가적 고민의 진전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관찰할 수 있게 하는 면밀한 기점이 된다. 하지만 실상 본 작업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장식성의 점철은 발광하는 안료의 사용과 함께 그 군락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점들의 묘사로 표현되면서 관객의 내적 시선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도상의 형상은 철저하게 의도된 작가의 구상을 따라 그려진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자기 의지에 천착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표현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 시기의 연작이 한층 깊어졌으나 여전히 불안정한 내적 상황을 겪어내고 있었던 작가의 당시 세계관을 반영하는 인지 심상을 재현하고 있음은 명료하다. ● 작가는 나에게 본인이 자신이 진행할 작업에 대한 완벽한 이론적 준비 상태를 맞이하고서야 작품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한 개인의 성향 때문인지 「Untitled」 연작은 그 제목에서부터 자연스레 연상할 수 있듯이, 극단적인 심적 혼란을 야기한 그의 외적 상황과 맞물려 다시금 자신의 작품 세계에 시각적인 변화를 일으켰던 작업이다. 그러나 그 내외적 불안정감은 그가 잠시 미뤄두었던 회화성에 대한 탐구를 재개할 수 있는 순간을 불러일으켜 주기도 했다. 점, 선, 면이라는 회화의 기본 구성 요소를 이해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당시 주제에 대한 그의 주관적 고민을 지속시키는 데에 큰 한계를 지워주지는 않았겠지만, 지속적으로 전진해 가는 작가 탐구의 중간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기를 위한 변화가 수반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 시기, 그는 아마 작가로서의 왕성한 활동 가운데 맞이하는 반복적인 시각적 결과물 생산의 행위에 지쳐버렸던 것 같다. 이러한 내적 어려움은 작업을 통해 개인의 고민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있어 그에게 뒤따르는 스스로의 매체 활용법, 그 방법론에 대한 정체를 작가가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후 이강욱의 회화는 형식적으로, 나아가 시각적으로 추상의 형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간다. 본 연작에서 곡선과 직선의 표현이 단순해짐과 동시에 그 선들의 수와 배치는 더 복잡해졌는데, 이는 개인의 자아에 대한 외연화와 내연화의 화해가 이뤄지는 장으로 향하는 출구를 찾아 나아가는 듯 꿈틀거린다. 본래의 세포 형태를 망각하도록 우리를 유도하는 형이상학적 도형의 형태들은 다채로워진 색채의 사용과 맞닿으면서, 실은 객관과 주관이라는 두 갈래의 선을 따라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작업관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실마리가 된다.
이강욱에게 찾아온 자기 내면적 유동은 최근작인 「The Gesture」 연작을 통해 어느정도 스스로 유연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을 확보한 것처럼 보인다. 작가로서 작업을 지속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연료화 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행위가 침잠의 형태를 띄든 혹은 외연의 방법을 취하든, 결국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숙고하고, 정의내려가면서 얻어진 잠정적 결론의 발현이 곧 한 작가의 작품으로 명명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강욱의 근작은 작가가 지금까지 몰아온 질문에 대한 최소한의 결론으로 귀결하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귀결의 지점은 바로 매체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물음과 그 주제로서의 역할을 도맡아온 작가의 심상이 조우하는 장으로서의 새로운 회화가 되었다. 작가는 이제 스스로 평면 그 자체가 되고자 한다. 매번의 미묘한 붓질과 이에 따른 점, 선, 면의 구성이 만들어 내는 표현 의식, 이것이 스스로의 존재 자체의 물음에 대한 당장의 대답이 되었다. 어쩌면 이제서야 그는 하나의 화면에 온전히 자신의 크고 작은 의도를 투영하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했으리라. 작가가 인용하는 '우파니샤드'의 전 우주적인 개념을 굳이 검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랜 기간 고민해 온 화합의 조건이 무엇인지는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에 대한 평등한 인정, 즉 소우주와 대우주의 개념은 그 인식 기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며, 보편이나 개별과 같이 보통은 상호 대립 구도로 인식하는 개념들의 종국에는 궁극적인 만남의 광장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으로, 그가 이 곳에 안착하고자 함은 합리적으로 이해된다. ● 이로 인해 이강욱은 타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궁극의 전제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우선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본 연작에서 아예 주제화시켜버린다. 그 확고한 생각의 기저 위에서 그는 작가로서의 표현과 매체의 형식적 탐구에 좀 더 자유롭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색의 경계는 모호한 상태에 머무른 채 완성이라 여겨졌고, 점들은 일정한 규칙을 벗어나 흩뿌려져 있으며, 심지어 선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서의 움직임을 드러내기보다는 면을 만드는데 조력하는 역할만을 수행한다. 덕분에 역설적으로 그가 투사하고자 했던 열린 공간은 어떤 의도적인 신호 없이도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신체가 구현하는 최소한의 물리적 움직임을 통해 자아의 세계관을 오롯이 열어내는 것에 대한 '나'만의 실천이 과연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최종적으로 이를 마주하는 관람객이 바라보고 느끼는 공감이나 이해라는 감상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결과와 함께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나'라는 존재의 자기 고민과 그 표현 자체를 자신의 작업 원료로 활용하는 이강욱의 방법론에 대해 심중하게 어떤 비판적 비평을 가하기는 어려운 것도 분명하다.
이강욱이 펼쳐온 그동안의 작업 여정은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간 그의 전시 대부분은 작가가 그려낸 연작들을 개별 작품으로서 잘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에 편중되어 만들어져 왔다. 그러나 이강욱의 개인전 «Hidden Perception: The New Painting»에 임하는 그의 작가적 태도는 지금껏 '작품'의 의미에 상대적으로 더 천착해 왔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나는 우선 전시를 구성을 위한 특정 연작들의 조합에서 발현되는 새로운 전시 의도에 주목한다. 본 전시에서는 그의 작업 연작 「Invisible Space」와 「The Gesture」를 선보이는데, 이번에 소개하는 「Invisible Space」 연작은 2009-2010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들이다. 이는 스페이스 캔 공간의 1층에 설치되고, 위 층에는 근작인 「The Gesture」 연작이 자리한다. 내가 이 두 작업의 조합을 특별히 '새로운'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여 수식하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2009-2010년 사이에 등장한 「Invisible Space」 연작은 또 다른 세계를 의미하는 "보이지 않는 공간"이 최초로 출현하는 순간이자, 이것이 곧 작가의 태도가 크게 변화하였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주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강욱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이 두 작업 연작의 연결 흐름과 구체적 의도를 드러내는 전시 제목 "Hidden Perception"이 함께 반응하면서 전시는 기존에 작가가 구성하던 일반적 맥락을 탈피해 관객의 사고 지점을 좀 더 '존중'하고, 나아가 '이해'하려 하는 그의 숨어있던 시선을 꽤나 명료히 드러내려는 의지로 나타난다. ● 이 글의 처음에 밝혔듯이 예술은 특정한 시기의 인간 사회 모습을 반영하는 거울이면서, 한 개인의 자아 표현의 의미, 그 중간을 부유하며 이 둘의 충돌점을 소거하고 균형을 유지해 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강욱의 삶과 그의 작업 세계를 구축해 온 각 시기의 작업에는 개인의 자기 발현 욕구에 더하여,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라는 환경의 변화가 집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자아 존재에 대한 탐구로부터 인간 세계를 초월한 또 다른 우주 현존의 발견이라는 전환점을 돌아, 다시 자신의 인식 구조에 대한 사유로 회귀하는 원형적 심상 표현의 양식을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바로 우리 인간을 둘러싼 사회라는 하나의 우주이다. 이강욱의 작업은 이제 장식성이라는 내적 경건함을 포용한 채로, 시각 형상의 미묘한 변조와 이를 둘러싼 강력한 어조의 외연적 계열화 사이에서 자기 균형을 찾아가며 스스로가 일정한 초점으로 세계를 관찰할 수 있게 했던 숨겨진 시선을 드러내고자 한다. 너무 거대하지도, 지극히 왜소하지도 않은 인간의 인식체계를 자극하는 것이 역으로 우리의 자아 형성을 완성토록 한다는 진리로 귀환하는 작가의 근원적 사유는 마침내 '구조'로 집결한다. 이는 지금껏 작가가 수행해 온 객관적인 사회적 역할을 내포함과 동시에 한 개인으로 점철되는 주관적 영역에 이르기까지의 오묘한 경계 지점을 점령하던 예술에 대한 변화 그 자체를 시사한다. 작금의 시대가 공유하는 현재성의 속도와 회화가 복기하는 역사적 전형의 조건 사이에 발생하는 개별 특성 간 불일치 사이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찾아나가는 것, 그것은 그저 이강욱이라는 한 작가에게 주어진 개별 과제의 단계를 초월하여 초-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적용되는 전반적 문제 의식을 함께 담아낸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회화에 대한 또 다른 의의를 발견한다. ■ 장진택
Vol.20170604b | 이강욱展 / LEEKANGWOOK / 李康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