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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526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 30길 28 (평창동 97번지) Tel. +82.(0)2.720.1020 www.ganaart.com
화면 가득 여러 색들이 해맑고 곱게 어울려, 컬러 판타지를 연출한다. 즉흥으로 붓을 놓은 위치에 따라 그은, 아크릴릭 물감의 곡면 색띠(color bend)는 덧칠을 반복해 밀도 높게 도톰하다. 한획한획 마다에는 한 뼘의 너른 붓끝 자국을 따라 미려한 살떨림이 스친다. 아련한 중간색조와 구색을 잘 맞춘 노란색, 붉은색, 분홍색, 형광색조들의 구성이나 흰색 덮기에는 유난스레 작가의 심성이 맞닿아 있는 듯하고, 성실함이 짙게 묻어난다. 바니시(varnish) 마무리마저도 정갈함을 더한다.
표현주의로 시작해 추상화가로 우뚝 서 ● 하태임의 추상작업은 유학 시절 표현주의 화풍에서 비롯되었다. 휴학 중 잠시 귀국해서 가진 1995년 첫 개인전에서 그 화풍이 잘 드러난다. 「토하기」「벙어리」「험담꾼 친구들」「자화상」등 일그러진 얼굴 그림들과 추상표현주의 화풍의 대작들은 하태임이 벌써 20대 초반에 좋은 작가로 성장할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 첫 개인전 후에는 유학시절의 체험, 특히 언어의 소통문제를 자신의 작업방향으로 잡았다. 1998년부터 화면에 문자나 기호를 담았고, 2003년 이후로는 그 문자들을 덮고 지우며 색원이나 색면, 색띠들을 등장시켰다. 이를 통해 하태임은 언어 이전의 소통 문제를 풀어내려 했던 거라 한다. 「문(La Porte)」「통로(Un Passage)」「흔적(Les Traces)」등 작품들에는 추상표현주의풍 붓질이 생동했다. 이런 경향은 1999년 유학을 마치고 엄마 곁으로 귀국한 뒤, 2004년 국내 미술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 단단히 뿌리내렸다. ● 박사과정 수료 후에는 색띠(color bend)의 추상화가로 우뚝 부상했다. 화사하고 장식적인 색면으로 이목을 끌었고, 2008년부터 가나아트 장흥 스튜디오에 입주했다. 이 시절 2006~9년에는 색띠 컬러 밴드의 「통로」, 짓이겨 뭉갠 붓질의 「문」, 색줄 스트라이프(stripe)의 「인상(Un Impression」으로 세 가지 표현 유형을 보여준다. 2012년 개인전부터 컬러 밴드 구성에 전념해 왔으며, 2013년에 삼육대학교 미술콘텐츠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 다채로운 작업이 '지우기'에서 '칠하기', '덧칠하기'로 변모하며 형상보다는 붓질의 제스처에 의미를 부여하며 색채 추상화에 몰입했다. 분홍 노랑 흰색의 현란(絢爛)은 그야말로 컬러 콘서트(color concert)였고, 컬러 밴드(color bend, color bar, color pigment)로 올 오버 콤퍼지션(All-over composition)을 이루었다. 밝은 색 사이사이로 회색조나 미묘한 중간 색들의 어울림도 돋보였다. 2015년 전시 때는 색띠를 입체 조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기도 했다. 스테인리스 스틸에 색칠한 「확장(Une Extension)」이 그것이다. 이 시기의 작업들은 실제 하태임이 출발점으로 잡았던 '소통'이나 '통로'를 크게 벗어나 있었다. 「통로(Un Passage)」를 여전히 고집하나, 봄꽃 풍경다운 형광색조의 캔버스는 그런 개념과 거리가 크고 판타지로 이행해 있었다. 작업과정의 변모에는 하태임이 성실히 공부한 19세기 인상주의, 20세기 전반 야수파 표현파 추상파 등이 섭렵되어 있다. 특히 색면 추상화는 프랑스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의 오르피즘(orphism)이나 미국 모리스 루이스(Morris Berstein Louis)의 스트라이프(stripe)에서 그 형식적 선례를 만날 수 있다. 또한 하태임의 추상은 화가 부모, 특히 아버지 고(故) 하인두와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하인두의 1980년대 추상화인 「만다라」「역동의 빛」「혼불」같은 작품은 불교나 민속적 소재이면서 스테인드 글라스식 외곽선에 원곡면의 빨강 파랑 노랑 색채감이 선명하다. 이들은 프랑스의 오르피즘을 연상시켜, 더욱 하태임의 색면 작업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한편 컬러풀하지만, '무심(無心)으로 그었다'는 하태임의 자기 붓질과정에 대한 설명은 최근 미술시장에서 붐이 일었던 단색화 작가들의 '도(道) 내지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른다'는 주장과도 통한다. ● 20여 년 동안 하태임은 22번의 국내외 개인전을 치르며 추상작가로서 위상을 굳혔다. 최근에는 더욱 상승세를 타며 국내외 주요 공사립 미술관이나 기관들이 하태임의 작품들을 소장하게 되고, 미술시장에서 뜨는 순수 추상미술 작가로 주목받는 모양이다. 기업체나 공공기관과의 콜라보레이션과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횟수가 부쩍 많아졌다. 추상화의 장식성이 현대인의 생활공간이나 색채도시 조성에 요긴하게 활용되는 케이스들이다. 이를 보면 하태임 색채 추상화의 인기와 유명세가 어디쯤인지 짐작이 간다. 하태임 스타일과 유사하게 섬려한 색채 추상화가들이 여러 나라에서 출현하는 것을 보면, 하태임식 추상화 또한 국제적으로 주목받을 가능성이 크다.
상흔을 덮는 색띠들의 판타지 ● 하태임의 추상화는 초기 개인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만큼 개인전 때마다 평론가들이 전시 팸플릿 글들을 썼다. 조금 어렵고 갸웃하게 하지만, 하나같이 상찬이었다. 나는 2013년 일호갤러리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하태임의 소품들을 스쳐보았다. 그리고 2015년 서울옥션 강남전시장 개인전에서는 하태임을 비교적 유심히 살폈다. 화사한 판타지의 색채 작품들을 보며, 흔히 그렇듯이 "그 사람의 그림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화여기인(畵如其人)'을 떠올린 채 전시장을 나온 기억이 남아 있다. 하태임은 화가부부인 하인두와 류민자 선생의 딸이니, 화가가 될 유전자를 그대로 타고났을 법하다. 나아가 파리 유학생, 미술학 박사, 성실한 미모의 화가, 인기 작가, 대학교 교수, 동시에 착한 딸이자 좋은 엄마까지, 하태임이 지내온 이력은 구김살 없어 보인다. 그 인생이 밝고 명랑한 색채 추상작가를 만들었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런데 잠깐 화가로 살아온 얘기를 들으니, 완전 반전이다. 하태임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 보자. ● 저 되게 우울하거든요.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웃고, 약간 농담도 하고 그러는데, 개인사에 아픔이 퍽 많은 편이에요. 감성이 너무너무 예민해서 작은 일에도 크게 상처를 받는데, 도피처가 색깔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그림을 그리면서 색깔을 보고, 색깔에 푹 빠져서, 색깔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제가 열심히 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봐요. 컬러가 주는 에너지를 받으면서 제가 스스로 힐링이 되고, 나름 치유하고 삽니다. 자신이 우울한 만큼, 우울함을 통해서 발광을 하죠. 어떤 분들은 그림이 굉장히 밝고, 치유하는 그런 힐링의 메시지가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데요. 저와 비슷한 분이신가 봐요.(하태임 아티스트 토크에서, 2017년 4월 4일, 서울옥션 강남점) ● 이 얘기를 들으니 화사한 색감은 자신의 아픔을 감추고 위로 받으려는 애틋함으로 밀려왔다. 어떤 이는 하태임의 색들이 힐링된다고 했으나, 순수해 보이는 색면 판타지의 민낯읽기가 낯설게 다가왔다. 그러나 '화여기인'론을 반전시킨 이면에서 하태임과 그의 작품을 다시 보아야 하니, 나로서는 원고 양이 늘어날까봐 살짝 당혹스러웠다. 화면 까뜩 엉킨 컬러 밴드의 구성으로 자기색을 완성한, 하태임의 개성미는 그 상채기들의 반영으로 재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반복하는 겹붓질은 자신이 위안을 삼으려 했던 만큼, 하태임이 혼신을 다한 결과인 셈이다. 화가는 그림 그리는 행위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즉, 하태임은 화사함으로 위장해 왜 자신의 상흔(傷痕)을 드러내지 않은 걸까. 물론 인간이 본디 지닌 양면성이겠지만, 자기 인생과도 무관한 듯 작업에 몰두한 하태임은 무엇을 얻었을까. 이번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전환점을 맞는 새로운 시도들 ● 40대 중반이라는 작가의 연배도 그러하려니와, 하태임은 이번 개인전을 인생과 작품세계의 전환점으로 삼은 듯하다. 전시는 총 22점으로 꾸려진다. 5점의 소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100호 이상의 의욕이 여전한 대작들이다. 컬러 밴드의 꽉찬 구성이나 스트라이프 색줄 위에 컬러 밴드를 얹은 추상작품들은 이전 그림에 이어 하태임의 자랑거리이다. 몇몇 작품들은 살짝 화풍의 변화를 보여 전시장을 청량하게 한다. ● 나는 하태임이 의식적으로라도 혹은 어떤 형태로든지 한국의 전통색과 자신의 추상화와 관계설정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냥 '저 멀리서 오는 영감'만으로 그려낼 것이 아니라, 한국현대미술사를 빛낸 선배들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가까이 아버지 하인두의 말년 불교나 무속적인 색면 추상화, 자연이나 전통과 친화력을 가졌던 김환기나 유영국 같은 화가들의 산, 바다, 하늘, 노을, 달, 달항아리, 새벽, 메아리, 고요, 봄의 소리, 매화 등을 되새겨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물론 하태임은 하태임으로 진즉이 우뚝 섰기에, 어느 방향에서건 꾸준히 가작을 쏟아낼 거라는 확신은 든다. ● 잠깐 스쳐보았지만, 악착같고 지독하게 색띠 붓질에 몰입해온 하태임의 창작의지가 최고여서 사족을 달 필요는 없겠다. 다만 작업하지 않거나 노는 일도 때론 작업하는 일 못지않게 의미가 있고, 스튜디오에 가지 않는 쉼은 인생과 세상과 자연을 만나고 벗할 시간이 마련될 수 있기에 소중하다는 얘기를 덧붙인다. ■ 이태호
Vol.20170526d | 하태임展 / HATAEIM / 河泰任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