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강민하_이신혜_이한솔_장유정 최민금_황명숙_Hege Beate Stokmo
주최,기획 / 경성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 휴관
경성대학교 제1미술관 KYUNGSUNG UNIVERSITY 부산시 남구 수영로 309(대연동 314-79번지) Tel. +82.(0)51.663.4926 ks.ac.kr
지상에 온전히 발을 디디고 살 수 없는 우리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야를 가지게 된다. 예술가는 그런 시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 시야를 다르게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모든 학문과 기술이 그러하겠지만 작가로 사는 삶은 그리 만만한 삶은 아닐 것이다. 지상에 온전히 발 디디지 못한 불안한 걸음을 연속하는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새로운 고찰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들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찰나의 작업도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음에도 세상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까지 그것을 놓칠 수 없기에 어쩌면 그 사소함의 역할을 예술가가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물음을 가지게 된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생각에서 출발한 전시이다. ■ 경성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자아는 이미 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고, 자아의 자유는 은총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늘 무거움이며, 자아는 풀려날 길 없이 자신이다." (한병철, 「타자의 추방」, p.102) ● 현재를 살아가면서 타자와의 관계는 당연한 것이지만 어려운 일이다. 타인과 관계에서 지칠 대로 지친 시기에 출구가 없는 곳에서 출구를 찾아서 헤매고 있다. 얽히고 설킨 선들은 풀어 갈수록 더욱 조여 온다. 이번 작품에서는 선의 움직임과 반복되는 형체들은 운동성인가? 아님 감정인가? 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이 행위들은 나의 감정을 의미하고, 단순하게 꼬인 선들은 지금의 관계에서의 지친 모습, 선을 통해서 감정을 표출하고 또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한 치유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 강민하
나에게 있어서 몸은 언제나 '미완성'의 실체이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이미지'들이 종용하는 신화적 (몸)프로젝트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내 몸을 감시하고, 비교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행위들은 끝없는 자기혐오를 생산해낸다. 나는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실패할 것이 자명함에도 멈출 수 없다. ■ 이신혜
일상의 공간과 관념의 공간 사이에는 괴리가 수반되고 완전히 분리 되어 떨어질 수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회색지대이다.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중간지대를 뜻하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계이다. 이 공간에서는 자아와 타자가 끊임없이 작동되고 뒤섞인다. 존재는 더 이상 유일하지 않은 뒤섞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뒤섞이는 과정에서 언어망에 걸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언어가 될 수 없는 감정의 파편과 덩어리는 혼탁한 물속에 부유하는 부유물과 같다. 혼탁한 구정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혼탁물이 가라앉으며 자연히 정화된다. 그리고 가라앉고 퇴적된, 언어가 되지 못한 '것'들은 가시적 형태로 확인하기까지의 일정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정화를 위한 버퍼링이며 묵혀내는 시간으로, 지연에 대한 용기이다. 이렇게 타자와 자아가 뒤섞이는 일상에서 발생하는 못 다한 말, 할 수 없는 말, 되지 못한 말들이 내안의 나의 방을 지켜보고 있다. ■ 이한솔
나의 불안의 근원은 인정 욕구의 결핍에서부터 온다. 인간이 가져야 할 욕구 중 하나인 인정 욕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으나 다른 욕구들과 마찬가지로 할당량이 충분하지 않으면 개인에게 어떠한 형태로 그 결핍이 비춰질지 모른다. 나에게 잠재되어 있던 결핍은 관계 속에서 그리고 언어를 통해 발견되었다. 관계 속에서의 나는 '인정함'이라는 관계의 이어짐 안에서 타자의 인정함을 받아들이는 '나'와'나 자신'을 인정하는 만족도에서 나의 불안을 발견하고 상황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일상에서 겪는 불안은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한 폭풍은 아니지만, 아주 작고 작아서 성가신. 몸 속 결핍으로 손톱 주변에 결핍의 신호를 주는 가시로서의 거슬리는 존재이다. ■ 장유정
마음 밑바닥에 숨겨둔 인간의 욕망은 발톱을 드러내고, 사납게 포효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로의 아우라를 내뿜는 호랑이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견디며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공필화(工筆畵)가 주는 수행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행복감은 인간자아 본연의 성숙한 향기를 전해 본다. ● "致虛極(치허극):텅빔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守靜篤(수정독):고요함 지키기를 독실히 하면, 텅빔(虛)에 이르기를 지극히 한다." 는 말은 마음을 완전히 비운다는 말입니다만, 마음 속의 욕망이나 집착을 비운다는 의미도 포함하지만, 단순히 개인적인 마음의 내용물을 비우는 것이라기 보다는, "나"라는 개채성을 비운다는 말입니다." (도덕경 16장 中에서) ■ 최민금
...인간은 성장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보고자 한다. 태어나 많은것을 습득하고,느끼고,행동하면서 개인의 주관과 가치관을 형성해 나간다. 개인의 내적세계와 외적세계의 주관적해석은 다양한 개성과 삶을 살아가게 한다. 특히, 사춘기시기에는 인격과 가치관이 세워지고, 세상을 보는 주관이 형성되어져 자신을 중심에 두고, 주위를 둘러싼 모든 사물과 이치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 세상을 어떻게보고, 느끼며, 표현해가느냐에는 우리네 삶속에서 양가적의미를 지니는 세계관과 개인각자의 삶에 새로운 시각과 관점으로 성숙되어간다. 그런 우리주변과 일상,그 너머 우주까지 많은 시각적 상징들과 기호들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정신적 세계를 나는 드로잉 한다. ■ 황명숙
Cross-Cultural Dialectics. Our contemporary globalized world is characterized by a dispersion of culture into different spheres. At the same time this scattering of cultures can be accompanied by a rise in focus of our native identity. I think of this as cross-cultural dialectics. My paintings and installations explores these cross-cultural dialectics by mirroring the contrasting cultures. These cultural oppositions can be thought of as a thesis and an antithesis. Optimally the thesis and antithesis can form a higher unit, a synthesis, as a new manifestation of developed understanding of culture. This dialectic is a consept of Hegelian philosophy, the triad of thesis, antithesis and synthesis. I focus on these cultural differences in my artworks, and I use subject matter and objects as common denominators to represent the cross-cultural dialectic. These denominators can also represent different feelings, like happiness, amazement, confusion, loneliness, ect. In my art, the rabbit can be understood as a symbol of loneliness. ■ Hege Beate Stokmo
Vol.20170523e | 지상에서 2cm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