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다 길호

박길호展 / PARKGIRO / 朴吉晧 / painting   2017_0521 ▶ 2017_0811 / 일요일, 마지막 주 월요일 휴관

박길호_새와 꽃_장지에 연필, 크레용_60.8×72.7cm_2016

초대일시 / 2017_0521_일요일_04:00pm

후원 / 경기문화재단_수원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10:00pm

에이블아트센터 2층 ABLEART CENTER 2F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수원로617번길 9 Tel. +82.(0)31.295.1077 ableart.or.kr

놀다의 작업을 보면서 나는 명료함으로 치장한 예술을 생각한다. 주저함이 없는 놀다의 그림은 천진하고 또 천진하다. 나는 마주칠 때마다 놀다에게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 그는 눈을 슬쩍 맞추어 주고 곧 딴청이다. 그는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데 그 사진 또한 슬쩍 보고 말뿐이다. 하지만 놀다는 가족, 선생님, 아버지의 친구, 산속의 새와 다람쥐까지 사진 속 대상을 거침없이 그려낸다. 무심하게 옮겨진 대상은 놀다만의 천진함으로 무장해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박길호_새가 물어본다_패널에 연필, 크레용, 아크릴채색_60.8×72.7cm_2016
박길호_아빠와 여행을_종이에 연필, 크레용, 파스텔_39×54cm_2016

놀다가 즐겨 쓰는 재료는 연필이다. 옆 사람에게 뭉뚝해진 연필을 건네며 몇 번이고 깎아 달라 부탁한다. 살이 깎인 연필을 건네받은 놀다는 심이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그림을 그린다. 놀다는 그려둔 선을 몇 번이고 따라 그리는데 종이가 닳아 구멍이 날 때까지 그것을 반복한다. 그리고 또다시 뭉뚝해진 연필을 옆 사람에게 건넨다. 연필이 지겨워지면 놀다는 가위를 찾아 선대로 자르기 시작한다. 종전에 그린 그림은 조각나 헤쳐지고, 놀다는 조각이 된 그림을 새로운 곳에 마음대로 붙인다. 그릴 때도, 자를 때도, 붙일 때도 놀다는 거침이 없다. 필압 조절이 어렵고, 작업의 마감을 명확하게 정하지 못하는 놀다의 특성은 그의 작업에서 의외의 흥미로움을 만들어 낸다. 캔버스나 패널에 연필로 낸 구멍이나 작은 화면에 두꺼운 오일바를 이겨 어쩔 수 없이 나온 마티에르 등이 그것이다.

박길호_아빠 광대_종이에 연필, 크레용_54×39cm_2015
박길호_아빠와 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연필, 오일바_31.8×40.9cm_2016

하루는 놀다에게 여러 장의 사진을 주고 윤곽을 따라 그리게 했다. 무심한듯하던 놀다는 이내 흥미를 느꼈고, 몇 번이고 사진을 따라 그렸다. 이후 놀다는 뭉뚱그려 그렸던 호랑이 얼굴의 줄무늬와 귀, 눈, 코를 구분하여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깨우침이 놀다의 천진함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놀다의 그림이 형태를 뭉뚱그렸든 구분해냈든 지간에 비슷한 인상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하지 않은 형태가 대상의 인상을 더 온전하게 담아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놀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독창성은 형태를 무색하게 하는 본능적인 인상과 그 자체를 꾸밈없이 꺼내 놓을 수 있는 놀다의 천진함 그 자체다.

박길호_창문 너머 어렴풋이 엄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오일바_130.3×162.2cm_2016
박길호_꽃의 속삭임_종이에 크레용_53×45.5cm_2016

놀다의 천진함은 가끔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부끄러움의 무게는 내가 하려던 치장의 무게와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처음 놀다의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작업에 어떤 의미를 얹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놀다의 작업에서 천진함이 넘쳐흐를수록 어떤 치장도 필요 없어졌다. 그의 존재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어떠해질 것도 없는 놀다의 작업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가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있는 방법을 그와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박길호_엄마 잔소리_종이에 연필, 크레용, 콜라주_54×39cm_2016
박길호_무제_패널에 아크릴채색, 크레용_가변설치, 61×61cm_2016

'놀다'는 길호의 호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청년에게 호라니 어울리지 않지만 '놀다'는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혼자 생활하기 어려운 길호 덕에 아버지는 그의 하루를 온전히 아들과 함께 한다. 분신처럼 생활의 전부를 함께하며 아들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아버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어느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표류하던 길호를 가장 몰입하게 한 것은 그림이었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길호가 길호로서 명료해졌다. 길호 스스로 색을 고르고 스스로 그리는 방법을 찾아 그린다. 그리는 동안에는 그림에 오롯이 몰입한다. 그 몰입이 끝나면 영락없이 어린아이가 되어 아버지의 손을 필요로 하지만 길호가 그로 온전할 수 있는 순간을 찾아 준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아닐까. 형편없는 고뇌에 빠져 박길호 개인전을 준비하던 어느 봄날의 아침 놀다의 아버지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를 위해 이 글을 마친다. ■ 이지혜

박길호_엄마생각_패널에 크레용_72.8×61cm_2016

편지 ● 봄이 좋냐? ● 예, 좋습니다. 날이 따뜻해지니 좋고 만물이 소생하니 좋습니다. 하루는 과도하게 웃고 하루는 슬피 울던 길호가 그림을 그리며 행복해해니 좋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갈 곳이 없던 지적 장애 1급 아들이 전시회까지 하다니 넘 감격스럽습니다. ● 말도 제대로 못하고 글도 못 쓰는 친구가 꼭두서니 빛깔로 도자기를 만든 날에는 이게 어찌된 일이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은 살 만하고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엄마, 아빠가 없어지고 저 혼자 남으면 어떡하나 잠을 못 이루던 제가 말이지요. ● 인디밴드 10cm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 봄이 오면 좋니 바보들아 / 봄이 오면 어쩔 건데 멍청이들아 // 바보가 되고 멍청이가 된 게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꽃을 그리고 로봇을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그리는 길호를 바라보는 게 이렇게 아빠를 약하게 할 수 있을까요? 60이 넘은 나이가 되서야 살아가는 풍경을 알 수 있을 거 같아 혼자 중얼거립니다. 봄이 오니까 좋구나. ● 10번도 넘게 이사하며 떠돌이가족처럼 살았습니다. 마음을 둘 데가 없어 지상의 방 한 칸이 이리 힘든 것인가, 혼자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집도 짓고 텃밭도 가꾸며 몸을 누이고 싶습니다. 모레 쯤 대형사고가 나더라도 별 일 아니야. 좋은 일 생기려고 야단이구나. 하면서 말이지요. ● ableart center 고맙습니다. 삐뚤빼뚤 그려도 '완전 피카소야!' 감탄해주시는 선생님들 사랑합니다. 좋은 화가가 되는 것은 저 만큼 두고 매일 매일 그리는 일에 행복해하는 날들이 되기를 비는 아침입니다. 창문 너머로 아파트사이로 조그맣게 보이는 칠보산이 인사합니다. 봄이 좋지? ■ 박구홍

Vol.20170521b | 박길호展 / PARKGIRO / 朴吉晧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