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205a | 이명희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주관 / 튤립아트랩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주말 휴관
래미안갤러리 운니동 서울 종로구 율곡로 78(운니동 114-2번지)
이명희, 경이(驚異)의 발견 ● 형태가 먼저냐 색채가 먼저냐 하는 문제는 '디세뇨와 색채'(disegno e colore)논쟁에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형태를 중시하는 쪽에서는 논리를, 색채를 중시하는 쪽에서는 정념을 각각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논쟁은 푸생주의와 루벤스주의, 프란스 할스와 디에고 벨라스케스, 앙투앙 와토와 부셰, 현대에 와선 기하학적 추상과 서정추상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 이명희는 형태보다는 색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편의상 색채화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화면에는 다채롭고 풍부한 색깔들이 펼쳐져 어느 봄날에 꽃밭에 나온 것처럼 오감을 자극한다. 2010년 인사아트센터에서 가졌던 제8회 개인전 때보다도 구김살 없는 색의 구사를 느낄 수 있고, 그런 탓인지 화면의 표정도 한층 활기가 넘치고 발랄해졌다.
작품에 변화가 있다는 것은 작가한테 어떤 변화가 있음을 방증한다. 큰 폭의 변동이 아니지만 색채의 비중과 자유로운 필선 등이 새롭게 목격되는 것은 자신의 화풍을 구축해 가는 데서 오는 자연스런 과정으로 이해된다. 추상양식의 기조위에 색채와 필선을 한층 강화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심증을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작업이, 부단한 모색과정을 일단락 짓고 궤도에 안착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 우리는 추상회화를 볼때 종종 테마나 주제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명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는 색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색을 의미전달의 매개물로 사용한다. 작가가 모티브로 삼는 것이 바로 꽃인데 추상작가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이미지를 정직하게 묘사하거나 재현하기보다 주제전달을 위한 화제(畫題)로 이용한다. 즉 색조의 힘을 빌려 꽃의 생동감이나 계절감각을 표현하는 셈이다.
근래에 올수록 작가는 색채의 유희본능이 재현보다 훨씬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런 점이 두드러진 부분은 필선인데 화면 곳곳에 색색의 필선들이 힘차게 나부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색 막대로 볼 수도 있겠으나, 정확히는 평붓이 남겨놓은 생기에 찬 흔적들이다. 필선들은 마치 불꽃놀이를 하듯이 공중에서 산화하며 영롱한 빛깔들을 내뿜는다. 단속적인 필선들은 리듬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화면에 활력을 주입한다. 특별히 중심과 주변이 나누어지지도 않았는데 화면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풍경을 연출한다. 모필 대신 유화 붓을 들었을 뿐 동양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 그가 이처럼 필선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작가는 화면에 적극적으로 신체활동을 개입시킴으로써 대상과의 교감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회화의 두 축인 필선과 색채를 모두 적극 기용하고 활성화시키는 것은, 한마디로 생명의 적극적인 교감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화면정황을 고려해볼 때 그 교감의 세기나 강도는 대단히 강렬하고 힘차다. 그것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존재의 체험이요, 그 생명율과의 교감이랄 수 있다.
꽃을 그린다고 했을 때 그 꽃은 그에게 있어 작품에 구체적인 영감을 주는 동시에 존재의 명백한 표식이 되기도 한다. 충일한 생명이란 돌이켜 생각하면 까치집이 우기(雨期)가 되면 비에 젖어버리듯이 언젠가 시들어버릴 것의 전조(前兆)이다. 따라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회의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존재의 의미에 주목하고 이를 감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명희는 설레고 들뜬 분위기를 그대로 우리 앞에 펼쳐놓음으로써 경이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 있음을 제시한다. 만일 경이가 우리가 가보지 못한 미래의 세상에만 있다면 그것을 과연 체험할 수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생각은 정반대이다. 오늘 경이의 순간이 있기에 내일의 소망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 근래 예술이 차가운 이성과 논리로만 접근하다보니 신비감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적인 확신으로 예술을 하는 것은 정당성은 있어 보이나 감동은 없다. 가슴없는 미술은 공감을 얻는데 한계가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을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감상한다는 사실을 잊는 경향이 있다.
이명희의 작품은 가슴이 느낀 것을 발화하는 특징을 지닌다. 갖가지 색들이 만나고 교차하며 포개지는 가운데 빚어지는 충일함이 그것을 암시한다. 이런 광경은 기운 넘치는 봄날의 분위기를 연상시키지만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황홀한 순간의 경험이 아닌가 싶다. 그런 순간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몇 차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 우리 기억 속에서 오래 남는 것도 없다. 어쩌면 평생 동안 우리의 뇌리에 영원히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순간에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며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 작가는 바로 이런 기대와 설렘으로 우리의 삶과 자연세계를 응시한다. 그러니까 작가의 기대와 설렘이 잎사귀에 달린 이슬방울처럼 화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의 화면에서 술렁이는 색들은, 웅크렸던 생명들이 대지를 박차고 솟아올라 바람에 입맞춤하는 어느 봄날의 일처럼 소중한 날의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 서성록
Vol.20170513d | 이명희展 / LEEMYUNGHEE / 李明熙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