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의 경계

김영민展 / KIMYOUNGMIN / 金永敏 / painting   2017_0501 ▶ 2017_0628

김영민_Blue & R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12cm_201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봄파머스 갤러리 Bom Farmers Gallery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강남로 729-45(병산리 244-37) Tel. +82.(0)31.774.8868 www.fgbom.co.kr

반응의 경계로서 그리기- 세계를 출몰시켜 영혼을 풀무질하기 ● 세계에 반응하는 몸 몸이 세계를 그린다. 몸이 감각한 세계는 의미의 포섭을 거부하며 의미에 앞선 모습으로 출몰한다. 붓끝에 보이지 않는 형상들이 화면을 채운다. 세계의 형상은 구체적인 형태를 부수며 이름 위를 미끄러진다. 점, 선, 면이 만들어낸 덩어리는 화가가 그려낸 세계의 살이다. 분방한 스트로크의 캔버스 위에 세계는 몸이 된다. 캔버스는 세계와 몸의 경계이지만, 동시에 세계를 담는 몸이자 몸으로 육화하는 세계이며, 사이를 잇는 영혼의 그릇이다. ● 김영민 작가의 화폭은 선연한 색감과 가벼운 동세로 구현된다. 색면 위에 점을 찍고 선을 그리는가 하면, 엉킨 선과 면이 덩어리로 뭉개진다. 형상은 이름을 갖는 또렷한 형태가 아니다. 작품에 붙은 제목 역시 방향과 색, 실루엣과 직관적 분위기 등 형상들이 구현된 양태를 설명할 뿐, 온전히 점유하지 못한다. 점성체나 원형질에 가까운 모습은 정체를 유추할 수 있을 뿐 확신할 수 없다. ● 덩어리와 선의 다발로 구성되는 형상은 대상의 형태를 지시하지도, 이에 속박되지도 않는다. 선과 점들이 형상의 구심 위에 원심 운동을 하고, 발산과 수렴사이 긴장을 놓지 않는 가운데 세계의 살들이 현현한다. 매스감 있는 덩어리가 선들과 대치하다가도 선과 색으로부터 돌출된 형상이 색을 발한다. 기층의 물감이 멍처럼 표면 위로 비쳐 나오며 피하조직을 투과하지만, 저마다의 색은 형상에 흡수되거나 수렴하는 일이 없다. ● 붓질은 손의 움직임을 남기며 빈 화면에 살을 붙인다. 하지만 그리기는 인지 가능한 세계의 질서를 걷어내고 의미를 벗겨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살들을 붙임으로서 지워내는 역설의 경계에 그리는 행위가 있다. 클리셰를 지우며 형상을 드러내는 과정 위에 살을 가진 유령의 모습이 출몰한다.

김영민_spr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0×114cm_2017
김영민_고립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3cm_2017

캔버스, 평면으로서 지각의 경계 ● 그의 작업은 의미체계 심층에 세계를 지각하는 몸을 드러낸다는 점에 메를로퐁티의 '세계 내 존재'를 소환한다. 존재는 세계와 감응할 뿐 아니라 세계로부터 구성된다. 세계와 주체의 이분법은 이미 뿌리부터 내파된 셈이다. 그렇다면 회화는 세계에 대한 몸의 반응이자 세계에 반응하는 영혼의 얼굴이며 세계와 세계 내 존재를 매개하는 채널일 터, 화가는 세계에 반응하며 화면 위에 감각하고 지각하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의 살들을 드러낸다. 캔버스의 형상은 지각 가능하지만, 판명할 수 없다. '반응의 경계'라는 전시제목처럼 작가는 세계에 대한 감각적 반응의 경계로서 캔버스를 다룬다. 캔버스는 세계에 감응하는 작가의 행위를 가늠할 수 있는 매개이기도 하다. 관객은 색점과 색면, 선들의 집적으로부터 형상을 읽고, 이로부터 작가의 몸짓을 상상한다. ● 하지만 캔버스는 2차원의 납작한 스크린이다. 캔버스가 세계에 대한 몸의 반응을 시각화 할지라도, 캔버스에 육화된 세계와 몸의 감응은 평면 위에 괄호 쳐진 실재의 '이미지'일 뿐이다. 이미지는 상상된 허구이다. 그림은 화면이 가리키는 세계, 의미화 할 수 없는 감각적 형상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지만 평면의 화면은 너머를 차단하기도 한다. ● 스크린이 가로막은 세계는 온전히 표상될 수 없다. 대상과 주체 사이 반응의 경계란 결국 시각적으로 상상된 관념의 시각화된 이미지다. 허상을 통해 세계의 감응을 드러낸다는 점에 존재는 불완전함을 노출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영혼은 유령의 모습으로 시각장에 들어온다.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 했던가. 마음은 이름일 뿐이라는 금강경 제18분처럼, 감응하는 주체는 완결되지 못한 채 화면에 얼룩처럼 제 궤적을 남긴다.

김영민_감정경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3cm_2017
김영민_화학반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162cm_2017

삼차원 환영을 해체하여 이차원의 평면으로 시각화하는 작업, 화면 위로 몸의 흔적을 남겨 세계에 감응하는 형상을 돌출시키는 작업은 풍경을 해체하여 평면 위에 색을 분리하고 매듭을 풀어 화면에 옮기는 일종의 '번역'에 가깝다. 회화는 세계와 의미체계를 절합한다. 그 과정에 미적 가치보다 추와 더러움이, 불완전함과 비정상이 두드러진다. 구체적인 형태들이 파쇄된 자리에 잔여의 형상이 남는다. ● 의미체계를 일탈하고 삭제하며 나타난 형상들은 표층에 올라온 멍처럼, 화면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경계에 피어난 곰팡이처럼 잔여의 모습으로 조합된다. 물감의 흔적들로 채워진 형상은 추상의 연안에 걸쳐 있다. 하지만 작가가 감각하는 세계의 이미지는 엥포르멜 류의 추와 더러움의 부정적 이미지 보다는 선연한 색상들의 향연에 가깝다. 휘날리는 신경망과 핏줄처럼 속도감 있는 살의 형상들이 역동적으로 호출된다. ● 삼차원 공간에서 평면으로의 차원변환은 물질로부터 이미지로의 형질변환을 이행한다. 하지만 이는 이미지가 물질성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심상에 맺힌 세계가 허구의 이미지로 재현될지라도, 우리는 캔버스를 통해 작가의 몸과 세계가 감응해온 궤적을 지각할 수 있다. '영혼은 실재하며 리얼리티를 갖는다'는 미셸 푸코의 문장은 앞서 마음의 실체가 없다는 금강경의 내용과 반대에 있는 듯 보이지만, 작가는 회화의 장치와 이미지를 통해 영혼이 (고정된 실체가 아닐지라도) 불완전하고 유동적이나마 물질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반응하는 경계로서 영혼은 존재냐 비존재냐의 고착된 이분법에 고립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유령의 모습으로 출몰할지라도. 영혼의 물질성은 외적 환경과 장치에 조응함으로써 구성된다는 점에 과정 중인 실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물질로서 영혼을, 몸이 조응하는 세계의 흔적을 지각한다.

김영민_버려진 반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61cm_2017
김영민_푸른사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17

세속성 위에 지각의 형상 구축하기 ● 화면을 통해 세계로부터 몸의 반응을 시각화하고, 이를 세계와 몸의 경계로 의미 부여하는 작업은 이성에 선행하는 몸과 세계의 교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클리셰를 지우는 과정은 더러 현실의 의미체계로부터 관계를 끊으며 고립을 자초하기도 한다. 이는 작가가 세계와의 감응을 드러내는 과정에 어떤 방식으로 현재성을 갖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연장된다. ● 작가는 오랜 시간 생업으로 미술과 거리를 둔 생활을 접고 붓을 들었다. 감각적 훈련이 둔감해진 중에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서 출몰하는 불안은 피할 수 없다. 김제와 양평이라는 지리적 거리는 작가에게 변방의 위상을 부여한다. 의미를 지우고 지각된 세계의 심상에 집중한 데에는 붓을 다시 잡는 시점에 나온 결의가 아니었을까. 감각에 의지하는 방식은 감응에 민감한 촉을 세워가며 불안정/완전한 감각을 숨기지 않고, 그 자체를 화면에 드러내고자 했던 자기객관화의 시도일 것이다. ● 2013년 작업에서 비어 있는 화면에 선의 동세가 유령처럼 미약하게 떠오른 형상은, 최근에 이르러 색을 쌓고 구조를 세움으로써 단단하게 잡아가는 유기체의 모습을 보인다. 색선 다발이 덩어리와 긴장하고 충돌하며 섞인다. 배경의 색면과 대치하는 덩어리는 점차 확장하며 화면을 채워간다. 캔버스 속 형상이 화면을 점유해가며 스크린 전체를 살로 채운다. 물감들이 피와 살이 되고 화면 자체를 몸으로 구축하는 일련의 흐름은 출사표를 던진 직후의 서투름으로부터 화면의 공간을 구축해가는 과정과도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김영민_푸른천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91cm_2015
김영민_swa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70cm_2013

스크린 위에 의미체계를 해체하는 시도는 정신분산적이지만, 색을 조합하고 구조를 만드는 작업은 집중을 요하는 점에 역설적이다. 그리기의 역설은 형상들이 저마다 색을 발하며 구조를 만들어가는 화면으로 시각화된다. 표층에 부유하는 색들의 반짝임이 화면에 스며들어 캔버스를 육화하는 과정은 세계에 대한 반응의 집중도를 높이려는 시도인 바, 의미로부터 거리를 두고 서투른 감각을 훈련시키며 화면 위에 작가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훈련은 자기 수양에 가깝다. ● 평면에 붓의 흔적으로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에 그의 작업은 세잔 이후 모더니즘 회화의 계보를 연상시킨다. 평면 위에 시각의 본질을 추구하는 하이모더니즘 회화보다는, 납작한 색면을 배경으로 육체를 고기처럼 짓뭉갠 프랜시스 베이컨의 시각언어에 인접해 있다. 하지만 선연한 배경 위에 요동치는 형상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보여준 고립된 육체의 비명과 다른 갈래를 갖는다. 구체적인 이름과 형태를 벗은 붓의 흔적은 색의 웃음으로 약동한다. 경쾌한 색은 회화에 대한 그의 태도가 진지함에 매몰되는 것을 견제한다. ● 화면에 도드라지는 강렬한 색상 사용은 독해를 요구한다. 캔버스 전반을 채운 핑크와 민트 계열의 색상들은 명도를 달리하거나 서로 덧대어 배경이 되고 형상을 이룬다. 물감의 두께와 대비될 만큼 선명하고 화사한 색상은 팬톤 컬러 목록을 소환시킨다. 엷게 빛나는 트랜디한 색상 운용으로 화면에는 살갗 같은 표면의 심층이 도드라진다. 강렬한 채도의 색상이 표층의 형상을 투과하여 저마다의 색을 발한다. 작가는 붓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마티에르를 두껍게 사용하지만, 가벼운 톤을 유지함으로써 붓의 움직임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물성을 강조하는 화폭을 가볍게 지각하도록 한다.

김영민_시선경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90cm_2016

색의 강조는 형상의 속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채도 높은 색상과 강한 스트로크는 형상에 속도를 더하는 동시에 색의 방출을 높인다. 발광하는 색은 육화된 형상의 존재감을 강조한다. 손의 흔적이 가득한 화면은 그래픽에 가까운 만큼 선명하다. 총천연색 OLED 디스플레이 시대에 대한 회화의 응답이 이런 모습일까. 이는 증강현실 속 회화에 대한 고찰로도 연결되는 바, 납작한 회화의 본질을 견지하면서 색으로 발광하는 형상을 도출시키는 회화작업은 포스트 매체 시대 이미지와 감각에 대한 화두에도 닿고 있다. ● 높은 채도의 색상은 쾌락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평면의 공허함을 압도하지만, 거꾸로 발광하는 색들이 화면 가득 채우는 표층은 의미가 비어버린 화면을, 회화의 공허를 노출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현대적 색감을 극대화함으로써 회화 본연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인지, 화면의 빈 공간과 균열을 참을 수 없는 작가의 강박인지, 작가로서 서투름과 조급함을 가리고자 덧칠된 장치인지 당장은 분별하기 어렵다. 다만 색의 운용이 당대 미디어 문화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를 숙고하고, 빈 공간과 형상의 긴장을 조율하며, 작업에 임하며 인접한 미술사를 참조하고 비평적 거리를 둔다면 세계에 감응하는 육체의 작업으로서 작가의 화면이 세계의 질서에 잠식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 육화된 형상은 캔버스의 스크린을 바탕으로 벼려진다. 이를 고려하면 세계와 몸의 감응은 허구로서만 인지될 수 있다. 하지만 허구는 물성을 갖는다. 설령 그 위상이 위태로울지라도 말이다. 회화 장치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형상화 충동에 제한을 두지만, 동시에 형상을 가능케 한다. 경계의 얼굴을 담는 작업은 작가와 화면 사이, 물감과 물성 사이, 붓의 흔적들과 감각 사이 경계로부터 세계와 주체를 연결하는 육체를, 육체에 연결된 영혼을 끌어내는 작업이다. 영혼의 기반은 세속적 질료를 바탕으로 한다. 그것이 영혼의 실체를 드러내는 불가능한 작업일지라도 말이다. 현재적 색상 사용은 의미를 벗겨낸 세계를 드러낸다는 관념적 활동마저 세속성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작업에 당대 색상을 사용한 것은 사회에 자신의 감각을 새기고 번역 가능한 시각언어로 표현하려는 의지로 읽어볼 수 있다. 작가의 색 운용은 의미를 벗겨낸 세계 역시 세속적 의미들이 유통되는 시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그럼에도 세속적 기호의 잔여들로 벗겨낸 세계를 감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숙고의 몸짓을 거친 화면은 선연하다. 클리셰를 지우며 주체가 감각하는 세계의 체계를 주조하는 작업은 작가가 취한 예술가의 임무라면, 물리적 제한에도 점, 선, 면과 색상을 운용하는 작업은 세계 속에서 영혼을 풀무질하는 시도일 것이다. ■ 남웅

Vol.20170505i | 김영민展 / KIMYOUNGMIN / 金永敏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