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빈展 / SONGDUKBIN / 宋悳彬 / ceramic   2017_0503 ▶ 2017_0521

송덕빈_나무에서 노는 아이들1_브론즈_64.5×31×12.5cm_1997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7_0503 ▶ 2017_0509 초대일시 / 2017_050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선화랑 · 선 아트센터 SUN GALLERY · SUN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8(인사동 184번지) Tel. +82.2.734.0458 www.sungallery.co.kr

2017_0510 ▶ 2017_0521 초대일시 / 2017_051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12:00am / 월요일 휴관

인천아트플랫폼 INCHEON ART PLATFORM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218번길 3 창고갤러리 Tel. +82.(0)32.760.1000 www.inartplatform.kr

"손이 놀지 않는 곳에 창조가 있다." ● 송덕빈이 지도하는 학교 미술실의 슬로건이었다. 송덕빈은 우리나라 도조(도자기 조각)예술의 1세대작가이다. 송덕빈의 인체 표현은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정서적 공감대를 제공한다. 이 점에 대해 그는 '꾸밈을 적게 하려는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한다. 발가벗은 그대로의 인간미를 표현하고 , 옷을 입고 있어도 인체의 원초적인 모습을 드려내는 그의 작품은 말 그대로 한국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얼굴 표현에 있어서도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상징적인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의 작품은 재현에서 표현으로 진화했으며, 나아가 그 표현적 요소를 상징화하여 한 예술가의 독창적인 상징체계를 구축했다. ● 송덕빈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고통과 자애를 함께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그의 예술 세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모티프다. 그 어려운 형편에도 11남매를 낳아 기른 어머니에 대한 그의 기억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의 작품에서 침묵과 절제를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의 죽음을 맞은 어머니의 슬픔을 담은 작품들이 많다. 슬픈 모자상이다. 생전에 혼신의 힘으로 아이들을 기르신 어머니의 모습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담긴 작품이다. "내 작품 속의 어머니는 고개를 떨군 어머니예요. 처참하다 못해 처연하게 삶을 대한 어머니의 삶 그 자체입니다."다시 한 번 송덕빈의 예술에 담긴 비애와 인간미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깊은 삶의 고통을 승화한 송덕빈의 삶과 예술의 힘이다. ■

송덕빈_등 (숲속의 향연)_브론즈_60×24×24cm_1996
송덕빈_모정21_세라믹_63×27×19cm_1995

고통을 승화한 구도의 삶과 예술 ● 여기 한평생을 인간애의 의미를 찾아 정진하면서 따뜻한 보살핌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삶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 있다. 예술가이자 교사인 송덕빈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지난한 삶의 조건들을 스스로 이겨내고, 다함께 고난의 시대를 견뎌내던 시절을 지내며 어린 제자들에게 삶과 예술의 반듯한 길을 가르쳤다. 그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 수많은 제자들은 예술가로 성장하여 인생의 스승이자 예술계의 선배로서 한결같은 마음을 이어오고 있다. 교육자 송덕빈은 또한 예술가로서 평생을 정진해왔다. 자신의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인체 도조 작업으로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변용하고 변주하면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애의 의미를 찾는 예술적 구도의 길을 걸어왔다. ● 송덕빈은 오랫동안 인천남중고 미술교사를 지내면서 제자들을 길러낸 교육자다. 오랜 세월을 제자들과 함께 한 그의 생애에는 '삶과 예술 양면의 참스승'의 면모가 담겨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을 하기 위해 학교에서 숙식하며 공부하던 한 제자는 어려운 여건을 딛고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했다. 취업에 유리한 실업계 고등학교를 진학했다가 미술을 하기 위해 다시 인천남고로 진학한 제자도 있었다. 다듬이돌 장수에게서 돌덩어리 사서 조각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 함께 했던 제자는 지금 석조각 작업을 지속하는 작가가 되었다. 한없는 내리사랑으로 교육자 정신을 실천한 그는 미술이라는 기술을 가르치는 미술교사로서만이 아니라 반듯한 삶을 꾸리도록 따뜻하게 보살핀 인생의 스승이다.

송덕빈_모정20_브론즈_55×24×21cm_1995

그는 항상 연구하는 자세로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자율성에 기반한 열린 교육자 정신을 실천했다. 교육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 그는 미국과 일본의 여러 교과서들을 모아 연구하며 가르쳤다. 전국미술교사들을 대상으로 연구수업을 하며 디자인 수업, 도법 기초 등을 가르쳐 미술교육 전문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그림을 전공한 그는 불국사 문수보살 사진을 실재 크기로 조각해서 뒤에 세워놓고 수업을 할 정도로 여러 매체를 두루 섭렵하며 소임에 충실했다. 그는 학생들의 그림을 지도할 때 부분적으로 지도하되 학생 작품에 깊이 간여하는 일이 없었다. 이렇듯 자율적인 교육 방침 속에서도 미술대회 나가서 수상하는 학생들이 많았을 정도로 창의적인 학습으로 성과를 내면서 교육자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 성장기의 송덕빈은 건축을 시작해서 미술과 인연을 맺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는 미술과 연관이 있는 건축을 시작하며 삶의 좌표를 정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미술 재능을 살리라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를 받고 건축과에 진학했다. 경기공업중고등학교 건축과를 지원해서 3학년 재학 중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란 중에 학교가 불타 없어졌고, 서울 수복 후 학생들은 중앙청 옆 보인상업으로 모였다. 서부훈육소에서 공부하던 그 시절, 공업중학에 다니던 아이들은 서울역 앞 전기공업으로 보내졌다. 그도 전기공업학교에서 학습을 이어나갔지만, 당시의 혼란스러운 학교 문제에 휘말려 한때 학교를 그만두기도 하는 등 한창 예민한 10대를 혼돈 가운데 살아갔다.

송덕빈_호반에서_브론즈_92×32×14cm_1994

하지만 그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그는 강한 인내와 의지로 그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학창시절에 전쟁을 만난 소년 송덕빈은 공부를 저버리지 않았다. 6.25 피란 때 영어사전과 제도기, 영어교과서만 들고 떠났을 정도였다. 그는 어려워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부산을 거쳐 천안 갔다가 다시 대전까지 내려가서 논산의 먼 일가친척을 찾아갔다. 그 집에 있던 아들 하나는 인민군으로 끌려갔는데, 그 친척집은 마치 아들 대하듯 잘 대해줬다. 거기서 4개월 여 머무는 동안 영어공부만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으로부터 큰 격려를 받은 그는 고등학교 때 3학년까지 반장을 지내며 또래 학생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렇듯 어려운 학창시절 경험을 해서인지, 훗날의 스승 송덕빈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자애를 베풀며 그들의 삶에 좌표를 제시해주었다. ● 청년 송덕빈은 고난의 시절을 지나면서도 언제나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한길을 걸었다. 그는 서울대 공과대학 건축과를 지원했다가 석연챦게 떨어지고, 한양 공대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대학에 못갈 형편이었는데, 동숭동 살에 살던 친구가, 서울대에서 단기 코스로 교사를 배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학해서, 2년간 준교사를 지내고 그 후 정교사로 근무했다. 당시는 교사 부족으로 대학에 중등교원 양성소를 설치해서 교원을 배출했다. 양성소 실기시험 볼 때, 김흥수 선생님이 시험감독 와서 그림 잘 그린다고 칭찬하며 눈여겨보았다. 입학 후 그는 장발 학장과 권옥연, 김흥수 등의 선생님 지도를 받았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가던 국가재건 시기에 그는 교사 양성 과정을 거치며 미술교사로서, 예술가로서 새 길을 맞이했다.

송덕빈_모정18_브론즈_60×28×19cm_1994

"손이 놀지 않는 곳에 창조가 있다."송덕빈이 지도하는 학교 미술실의 슬로건이었다. 교사로 부임한 그는 학생들과 함께 친밀한 환경을 만들어갔다. 처음에는 의정부로 발령받아서 뎃생, 유화, 디자인 등 다양한 미술 수업을 하며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의정부에서 시작한 교사 생활은 곧 인천으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인천남중으로 옮겨서 교사생활을 했는데, 실기대회에서 학생들이 수상을 많이 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을 지도할 때 자율성에 기반한 체계적인 교육철학을 실천했다.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수업하되 다양한 기법들을 학습할 수 있도록 배려한 그는 해외의 도법 교과서를 구해서 연구하고 그걸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림은 물론이고, 조각, 도법, 판화, 스텐실 등 종합미술실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예술가들을 길러낸 인천 미술가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 평생을 교육자로서 헌신한 그는 퇴임 후 강원도 평창 작업실에서 생활하며 예술 세계를 넓혀나가고 있다. 평창에 자리잡은 후 그는 나무에 마음을 실었다. 전나무를 좋아하는 그는 오대산 씨앗을 받아서 모종을 해서 키워서 7-8미터, 잘 큰 것은 10여미터까지 키웠다. 오랫동안 제자들을 길러낸 교육자는 이제 나무를 키우면서 자신의 삶의 궤적과 생명의 가치를 합일하는 여정을 거치고 있다. 나무는 그에게 매우 친밀한 존재다. 평생을 흙과 함께 살아온 그에게 나무는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는 매개체이자, 교사로 살아온 자기 삶은 은유와 같다. 흙과 함께 사람과 함께 도조 작품을 만들고 사람을 키워온 송덕빈은 평생의 삶과 예술의 길의 또 연장선상에서 나무를 기르며 자연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길어올리고 있다.

송덕빈_키스하는 모자_브론즈_61×31×21cm_1994

송덕빈의 도조 작품은 상당히 일견 이국적인 정취를 가지고 있다. 피카소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흑인조각 영향이다. 그는 피카소의 방법을 기하학적 영향으로 수용해서 한국인의 얼굴과 몸을 만들었다. 사람의 얼굴과 몸을 면과 선의 요소로 분해해서 재결합하는 방식이 그의 작품 창작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이국성 자체에 함몰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들은 이국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 토속성을 담고 있다. 피카소의 조각이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피카소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송덕빈의 작품도 그것과 무관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조각은 한국 사람의 틀을 벗어날 수다. 그의 작품에는 그가 만나온 한국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 송덕빈의 인체 표현은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정서적 공감대를 제공한다. 이 점에 대해 그는 '꾸밈을 적게 하려는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한다. 발가벗은 그대로의 인간미를 표현하고 하고, 옷을 입고 있어도 인체의 원초적인 모습을 드려내는 그의 작품은 말 그대로 한국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얼굴 표현에 있어서도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상징적인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의 작품은 재현에서 표현으로 진화했으며, 나아가 그 표현적 요소를 상징화하여 한 예술가의 독창적인 상징체계를 구축했다. 가령 눈의 표현을 보자면, 다양한 표정을 지닌 눈을 핵심적인 요소로 압축하여 상징화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의 눈 표현은 대체로 눈을 감고 있거나 눈의 위치만 알 수 있게 함으로써, 사랑과 슬픔의 양가적 감정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콧날도 높이 세우지 않고 구멍만 만들어 놓아서 친밀감을 높여놓고 있다.

송덕빈_모정16_브론즈_56×32×17cm_1994

서양문명에 기반을 둔 조각들, 가령 그리스 로마 등에서 나온 조각들은 사실적인 재현에 충실한 것들인데, 이렇듯 사실적인 문화적 바탕 위에서 미술인 발전했지만, 재현을 넘어선 표현이야말로 현대미술을 성립가능하게 한 핵심 개념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볼 때, 송덕빈이 채택한 재현 너머의 표현은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며, 나아가 표현 이후의 상징으로의 진화 과정은 그의 예술을 완성한 핵심 요소이다. 현대미술의 감동 포인트는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예술가 고유의 스타일에 기반을 둔 상징언어의 힘에 있다는 것을 그는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생활정서에 바탕을 둔 토속적이고 자연스러운 작품 세계로 그는 재현 너머의 표현을 이루고, 다시 그 속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상징세계를 만들어냈다. ● 송덕빈의 예술에는 종교적 영성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정신적으로 가장 깊게 영향 받은 이로 함석헌 선생을 꽂는다. 성장기에 친구 따라 교회 다니다가 함석헌 선생을 만났는데, 그분을 만나면서 종교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함석헌 선생은 기독교는 물론 불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산스크리트 문자도 알 정도로 해박했다. 평남 오산학교 출신의 함석헌 선생을 학생은 교수부터 지게꾼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회고한다. 함석헌 선생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종교평화를 주창한 분이어서, 이에 영향 받은 송덕빈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를 다 인정'하는 평화주의자를 자처한다.

송덕빈_모정13_브론즈_25×43×41cm_1992

이러한 종교관은 정성을 다해 마음을 모으며 기도하던 어머니의 정안수에서도 진정성을 느끼며 살아온 성장기부터 자리잡은 것이었다. 그의 범신론적인 종교관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남다르게 만들어주었다. 정신성의 국면에서 송덕빈은 확연히 휴머니즘에 기반한 종교평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천주교와 연관이 많은 집안 영향이 크다. 그의 어머니는 외할머니 모시고 살았는데, 그 외할머니가 천주교 신자였다. 와할머니는 마지막 임종 때 수녀님을 모렸을 정도로 독신한 신자였다. 그의 어머니도 돌아가실 때 천주교에 귀의하고 돌아가셨고, 송덕빈도 천주교에 귀의해서 프란체스코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 "젊은 시절 어려운 집안 일 때문에 몹쓸 생각을 하고 북한산 백운대에 선 적이 있다. 그때 찬바람을 맞으며 '내가 왜 여기 서있는가? 너 혼자 살아라' 라는 자신의 목소리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고독한 인간이 되었다. 69세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하면 많은 회한이 있다. 내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깊은 슬픔을 간직한 분이다. 돌 지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와 아이의 죽음이 겹쳐 한 없이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언제나 가슴 아프다."방황하던 청년 시절을 술회하는 그의 이야기는 삶에 대해 처절하게 비관하고 절망한 후 그것을 딛고 일어선 사람의 한없이 인간적인 면면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송덕빈_아이들을 위한 기념비2_세라믹_120×40×15cm_1990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송덕빈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고통과 자애를 함께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그의 예술 세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모티프다. 그 어려운 형편에도 11남매를 낳아 기른 어머니에 대한 그의 기억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의 작품에서 침묵과 절제를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의 죽음을 맞은 어머니의 슬픔을 담은 작품들이 많다. 슬픈 모자상이다. 생전에 혼신의 힘으로 아이들을 기르신 어머니의 모습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담긴 작품이다. "내 작품 속의 어머니는 고개를 떨군 어머니예요. 처참하다 못해 처연하게 삶을 대한 어머니의 삶 그 자체입니다."다시 한 번 송덕빈의 예술에 담긴 비애와 인간미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깊은 삶의 고통을 승화한 송덕빈의 삶과 예술의 힘이다. ■ 김준기

Vol.20170503i | 송덕빈展 / SONGDUKBIN / 宋悳彬 / ceramic

2025/01/01-03/30